우리나라 전통 가옥에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은 딱히 역할이 규정된 공간이 아니었기에,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무더운 여름밤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우면 잠자리가 되었고, 들마루를 내고 상을 펴면 큰손님을 치를 식당이 되었다. 고추를 말리고, 빨래를 말리고, 타작을 하는 노동의 현장인 동시에 구슬치기, 소타기, 오징어가생을 하는 놀이터였다.
마당은 집주인의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공적인 공간이었다. 삽을 들고 논으로 나가던 이웃이 불쑥 들어와도 내 공간을 침입당했다는 거부감이 들지 않는 장소, 방물장수가 예고 없이 들어와 화장품이나 생활용품을 펴놓고 집주인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공간이었다.
집집마다 마당이 있었기에 동네 사람들은 이웃에 어떤 손님이 왔는지, 왜 왔는지, 그 집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까닭에 마당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는, 그리고 지켜주는 안전장치 역할을 했다.
아파트에는 마당이 없다. 단독주택 역시 마당이 있기는 하지만 높은 담과 철문으로 둘러싸여 '마당'으로서 구실을 하지는 못한다. 도심 단독주택의 마당은 '마당'이 아니라 집주인만의 '정원'이라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옛 사람들이 집에 마당이라는 빈 공간을 두었던 것은 개인 혹은 한집안 식구들이 처리해야 할 일의 종류가 많고, 영역이 넓었기 때문이다. 가령 남자들은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고, 농기구를 수리하고, 고장난 자전거를 고치고, 자식이 타고 놀 썰매를 만들고, 지붕에 이을 이엉을 짜고, 잔치를 위해 돼지를 잡았다. 생활에 필요한 많은 일을 스스로 했기에, 역할이 규정되지 않은 마당이 필요했던 것이다.
직업별로 전문화'세분화가 강화됨에 따라 한 개인이 담당해야 하는 일의 종류는 크게 줄었다. 자전거 펑크가 나면 수리점에 맡기고, 아이들 장난감은 가게에서 구입하면 된다. 하수관이 막히면 시설업자를 부르고, 형광등 안정기가 수명을 다하면 아파트 관리실에 연락하면 된다. 내 전문 분야 업무 외에 거의 모든 일을 타인에게 맡기는 세월이고 보니 마당이 필요 없어진 것이다. 집에서뿐만 아니라 생산공장에서도 갈수록 전문화와 세분화가 강화됐다. 덕분에 생산력은 높아졌고,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
편리하고 부유해진 대신 우리는 이웃과 공동체를 잃었다. 이웃 사람이 죽어 1년 동안 방치되어도 모르고, 옆집 아이가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해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외면한다. 이웃의 사정을 알 필요가 없고, 회사 동료가 갑자기 밀려든 업무에 깔릴 지경이 되어도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내 집 앞에 은행열매가 떨어져 구린내를 풍기고 눈이 쌓여 미끄러우면 빗자루를 드는 대신 구청에 전화를 걸어 잔소리하는 것으로 끝이다. 네 일은 네 일이고, 내 일은 내 일이다.
역할 분담과 전문화로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됐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뒤 살피지 않고 달려오는 동안 사람이 사람을 지키던 공동체를 잃어버렸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대구시 수성구의 한 아파트에는 '상추 할아버지'가 산다. 텃밭을 가꾸는 이 할아버지는 텃밭에서 돌아올 때마다 남아도는 채소를 3, 4개의 봉투에 나누어 담아 아파트 라인 입구에 놓아둔다. 그러면 먼저 발견하는 이웃, 저녁상으로 상추와 삼겹살을 생각하는 주부가 가져간다. 그래서 그는 '상추 할아버지'로 통한다. 덕분에 마을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다.
북구 침산동의 한 아파트는 1개 동 앞마당 1천㎡(300평)를 주차장 대신 텃밭으로 조성했다. 82명의 주민들이 추첨을 통해 텃밭을 가꾸고, 넘치는 야채를 이웃과 나눈다. 덕분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 '아파트'를 '마을'로 바꾼 것이다.
담을 걷어내고 그 자리를 따라 상추와 배추를 심고, 내 집 앞 쓰레기와 눈을 치우기 위해 빗자루를 들기만 해도 우리는 이웃과 마을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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