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Raro Unus, Nunquam Duo, Semper Tres

입력 2016-04-29 17:05:12

벌써 근 30년 전이다. 막연하게 품고 있던 사제직에 대한 희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신학교 문을 두드렸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이 자라온 곳을 벗어나 전혀 다른 세상에 발 디딜 때는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모종의 두려움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예외 없이 나 또한 이런 복잡한 심정을 안고 신학교 1학년 과정을 시작했다. 처음 접하는 철학과 신학, 군대와 비슷한 공동생활과 기도 등 모든 것들이 새로웠는데, 그중에서 가장 신선한 것이 바로 산책 시간이었다. 밥을 먹은 후에, 기도 전후에, 짬나는 대로 학생들은 대구 앞산 밑자락의 신학교 산책길을 돌고 또 돌았다.(잠깐의 휴식 시간에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치기(稚氣) 어리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논하고, 학교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농담도 하면서, 산책길마다 그렇게 서로의 발자국을 새겼다.

그런데 이 산책 시간에도 일종의 규칙이 있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권고 사항이었다. 바로 'Raro Unus, Nunquam Duo, Semper Tres'라는 라틴어 격언이다. 우리말로 풀어 보자면, '가끔 혼자서, 둘은 절대로 안 되고, 항상 셋이서'라는 뜻이다. 라틴어의 알파벳도 잘 모르던 때 들었던 말이지만, 지금까지도 이 말은 기억 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Raro Unus 가끔 혼자서.'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조용히 혼자 산책하는 것은 아주 좋은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이는 가끔씩 필요하다. 만일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지속적으로 잦아진다면, 자칫 자신의 사고 속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산속에 깊이 들어가 있을 때 하나하나의 나무는 잘 볼 수 있지만 산의 전체 모습을 바라볼 수는 없다.

'Nunquam Duo, 둘은 절대로!' 왜 둘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흔히 자신이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심을 갖기 쉽다. 그리고 그것과 다른 생각의 잘못된 점을 들추어내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자기 신뢰는 자신감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는 자칫 독선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독선의 가능성은 둘이 모일 때 더욱 용이해진다. 둘이 함께한다는 것은 십중팔구 서로의 의견이 어느 정도 일치할 때 가능하다.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는 한두 번 같이 할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함께 다니기는 어려울 것이다. 애써 서로 피곤해 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둘이라는 숫자 안에서는 어느 정도의 필요한 반론 없이 서로에게 여과 없는 확신을 줄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인식 대상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만들기 쉽다.

'Semper Tres, 항상 셋이서.' 복수(複數)이지만 둘과 셋은 엄연히 다르다. 둘은 자신의 성향에 가까운 사람 아니면 다른 사람, 두 경우뿐이다. 그러나 셋의 경우에는 자신의 뜻과 비슷한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이 공존할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셋이라는 숫자는 산술적인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다양성, 그리고 개방성을 뜻한다.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이 함께 있으면서, 자신의 생각에 닫혀 있지 않고,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고, 설득의 작업을 하는 공간적 의미이다. 공자님의 말씀 중에, 셋이 길을 갈 때는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三人行 必有我師焉'(삼인행 필유아사언, 논어 술이 편 중)

'Raro Unus, Nunquam Duo, Semper Tres.' 이 라틴어 속담은 신학교 1학년 때부터 사제로서 경험이 조금씩 쌓인 지금까지 사람들을 만나면서 늘 되새기는 말이다.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 개방과 포용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꼭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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