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한 회계는 몰락의 지름길이다
'회계'는 책임지기 위한 도구다. 오용하면 사기의 도구가 된다. 역사 속에서 전자와 후자는 칼로 자른 듯 명징하게 평가받았다.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치 가문은 정교한 회계로 은행업에서 성공해 큰 부를 쌓았다. 메디치 가문 남자들은 어릴 적부터 회계 기술을 배우고 사업 현장에서 그 기술을 몸으로 익혔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었다. 복잡한 회계를 장부에 쓸 줄 알고 볼 줄 알고 그래서 책임질 줄 아는 자세는, 외부 투자자들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후 회계 기록을 소홀히 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전체를 경제적으로 쇠퇴시키며 함께 몰락했다.
17'18세기 유럽의 전제군주들도 그랬다. 회계장부를 정확히 기록하면 지출을 제약받기 때문에 정직한 회계를 피했다. 프랑스의 루이 16세도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재무총감 네케르가 1781년 왕실의 회계장부를 공개했다. 그걸 보고 대중은 폭발했다.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피어올랐고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거듭하고 역사는 반복된다. 1929년 대공황도, 2008년 금융위기도 모두 회계의 오용이 빚어낸 결과였다.
회계의 역사는 '어떤 사회는 번영하고, 어떤 사회는 몰락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저자 제이컵 솔은 "상업 지식에 대한 존중이 있고 실용적인 수학이 인문주의와 결합한 국가와 사회는 번영하고 부를 누린다"고 주장한다. 피렌체와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공화정, 네덜란드, 18'19세기 영국과 미국은 모두 회계를 교육과정은 물론, 종교 및 도덕 사상, 예술, 철학, 정치 이론에 통합시켰고, 그래서 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로 치면 상인, 지금으로 치면 기업가만 회계에 대해 안다고 될 일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권력자가 투명성과 책임성을 감당할 수 있는지가 당대 국가와 사회의 경제적 성장은 물론 역사적 발전을 결정한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 한때 막강했던 제국들이 부실한 회계에서 비롯된 몰락을 경험했다. 지금 세계 여러 국가가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재정위기와 그에 따른 정치사회적 불안도, 실은 회계가 주범은 아닐까.
본문만큼 책 뒤편 부록도 눈길을 끈다. 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가 쓴 '한국 전통 회계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다. 세계가 인정한 개성상인의 회계 기술을 언급한다. 복식부기(재산의 이동 및 손익을 정확히 알 수 있고 잘못을 쉽게 검출할 수 있는 회계 기록 방법. 단식부기는 단순히 출납 등을 기록하는 것)가 키워드다.
"경영 방법의 하나인 회계장부 기록 기술은 지구 상에서 누가 처음으로 생각했을까? 그 누구도 복식부기 기술을 창안하고 사용해온 국가가 한국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18년 호주 회계학 잡지 '연방 회계사'에 실린 한 기사 내용이다. 1993년 잭 구디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도 책 '서양 속의 동양'에서 한국이 상인의 도시 베니스로 유명한 이탈리아보다 200년 앞서 복식부기를 썼다고 주장했다. 1494년 이탈리아에서 루카 빠찌올리가 복식부기에 대해 정리하기도 전에, 이미 개성상인들은 그와 유사한 '송도사개치부법'을 쓰고 있었다.
그 가치를 오롯이 전하는 유물이 있다. 개성상인 박재도 가문이 보유했던 회계장부 14권과 그에 따르는 문서 1천298쪽 분량이다. 1887년부터 1912년까지 25년간 이뤄진 30만 건의 거래 내역이 담겨져 있다.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이익배분처리서 등이 하나의 완벽한 세트로 구성돼 있다. 이처럼 모든 영업 활동을 복식부기 형식으로 기록한 자료는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찾기 힘들다. 15세기 메디치 가문, 16세기 독일 거상 야코프 푸거, 17세기 포르투갈 동인도 회사 등 세계적 명성을 얻은 거상들은 엄청난 부는 거머쥐었을지 몰라도 그들이 남긴 회계장부는 개성상인의 그것과 비교하면 초라하다.
이 자료는 지금 우리 경제가 새겨들어야 할 교훈도 던져준다. 개성상인의 회계장부를 비롯해 한국 전통 회계장부는 유동성 흐름을 요약해 강조한 보고서를 갖췄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개성상인의 회계장부를 보면 정기적으로 반드시 현금 흐름을 점검하는 절차를 거쳤다. 통계표 형식 회계문서 '용하기'도 전해진다. 전남 영암 남평 문씨 가문의 용하기를 보면 이익보다는 유동성에 초점을 맞춘 요즘 은행용 보고서와 닮았다.
한국전쟁 이후 등장한 한국 기업 대부분은 은행을 통한 차입 경영에 의존해왔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은 주주에게 공개할 목적이 아닌, 은행 차입을 유리하게 만들 목적으로 회계보고서를 작성해왔다. 재정 상태나 경영 실적을 부풀리는 분식회계도 마다하지 않았다. IMF 경제위기와 세계 금융위기를 거치고 난 지금 이게 어느 정도 개선됐다지만, 일부 기업의 행태는 그대로이고, 특히 중소기업'가계'정부의 회계 관리는 여전히 후진적이다. 가계 부채와 공기업 부채 관리가 지금 폭탄 돌리기가 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456쪽,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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