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조 비운의 마지막 왕자 안동에서 꿈꾼 신라 부흥의 길
신라 마지막 왕자로 천년 문화의 신라 경영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신라를 떠나야 했던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 안동 도산면 용두산에는 그가 머물렀던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이곳에서 마의태자는 새로운 부활을 꿈꾸고, 준비했을 것이다. 이제 신라가 멸망한 지 1천 년이 훌쩍 흘렀다.
'마의태자 길'이 세계유교선비문화공원 탐방로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이 길을 걸으며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가 부활하는 꿈을 꿔보자. 마의태자 길 동행에는 최성달 작가와 남준호 박사, 그리고 주한외국인들의 모임인 '주한외국인나눔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권대경 회장이 함께했다.
◆마의태자 길, 세계유교선비문화공원 탐방로로 재탄생
안동시는 도산면과 예안면 일대에 모두 329억원을 들여 '세계유교선비문화공원 탐방로'를 조성하고 있다. 모두 146.5㎞에 이르는 이 길은 낙동강을 끼고 조성되는 55.6㎞의 '수변 탐방로'와 숲 속을 걸을 수 있는 34.8㎞의 '수림 탐방로', 그리고 56.1㎞는 산악자전거를 이용해 숲길을 달릴 수 있도록 '자전거 탐방로'로 탈바꿈한다.
이 길에는 용수사와 용두산, 태자리 등을 지나는 '마의태자 길'과 도산면 가송리 낙동강을 끼고 형성된 '퇴계 예던길'이 포함되는 등 오천군자리 마을에서 청량산 가송리까지 이어진다.
용수사 뒤편에 솟은 용두산 마의태자 길에는 용수사를 거쳐 용두산~장승마(월오령)~태자리 마을을 잇는 수림 탐방로가 조성되고 있다. 이 길에는 화장실과 육각 정자, 등 의자, 목재펜스, 흙먼지 털이기, 종합안내판 등이 마련된다.
이 길은 안동이 가진 탁월한 문화'생태자원을 활용해 관광산업화함으로써 미래의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3대 문화권 문화'생태 관광기반 조성사업'의 하나로 추진되고 있다.
이 일대 안동과 봉화를 중심으로 한국 정신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유교문화를 21세기 첨단문명을 활용해 현대인의 의미에 맞게 재발견할 수 있도록 추진하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안동지구에 ▷세계유교문화박물관 ▷세계유교문화컨벤션센터 ▷전망대 및 수변데크 ▷선비산수 탐방로 등을, 봉화지구에 ▷청량산 수림 탐방로 ▷수변 탐방로 등을 각각 만든다.
도산면 동부리에 들어서고 있는 세계유교문화박물관은 한'중'일 3개국의 유교사상 및 생활의 차이점, 변천과정, 현존 유교사상 등을 바탕으로 유교의 전통과 현대적 모습을 체계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복합전시공간으로 꾸민다.
세계유교문화컨벤션센터는 대규모 국제회의, 전시회, 이벤트 등을 개최할 수 있는 복합시설로 개발해 유교문화가치의 세계화 포럼을 설립할 수 있는 전진기지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봉화지구에는 청량산과 주변 스토리를 적극 활용해 탐방로를 주로 조성할 예정이다.
남준호 박사는 "안동의 숱한 문화 콘텐츠 가운데 가장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것은 유교문화다. 세계유교선비문화공원 탐방로는 곳곳에 흩어진 유교문화의 흔적과 정신문화의 가치를 느끼면서 걸을 수 있는 지역 대표 길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마의태자, 금강산 가는 길에 안동에서 신라 부흥 꾀했나?
고려 경순왕 9년이었던 935년 10월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한다. 태자는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했으나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가 전달됐다. 태자는 통곡하며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마의태자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마의태자가 왜 하필 당시에 그토록 귀부에 반대했던 적국 고려 땅인 금강산으로 들어갔는지,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곧바로 갔는지, 경주와 금강산 길 중간 지역 곳곳에서 전해지는 신라 부흥운동에 대한 유적과 전설들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계승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숙제가 남아 있다.
안동시 도산면과 봉화군 상운면 일대에는 이 같은 마의태자를 둘러싼 의문과 남아있는 숙제들을 풀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강원도 인제의 마의태자 전설은 실제로 마의태자가 아니라 경순왕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인제에 있는 '김부리'라는 마을은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富)에서 따왔으며, '김부대왕동'이라는 지명은 경순왕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마의태자의 이름은 김일(金鎰)이다.
마의태자는 신라를 떠나면서 아무런 저항 없이 금강산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신라에는 경순왕의 항복에 반대하는 무리가 많았다. 이들을 둘러싸고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이후 수백 년 동안 곳곳에서 신라 부흥에 관한 소문들이 끊이지 않았다. 안동에서도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을 꿈꾸며 절치부심했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최성달 작가는 "안동과 도산면 일대의 진산인 용두산, 그 터전에 아득하게 내려앉은 용수사와 용화전, 그리고 절터를 휘감아 흐르고 있는 용개천. 이것들이 전해주는 의미는 새로운 시대를 약속하는 어떤 기운이 전해짐을 말한다"고 했다.
◆용두산 둘러싸고 곳곳에 마의태자 연상시키는 지명
마의태자 길은 도산면 용수사 산신각에서 시작된다. 절 뒤편 오솔길을 따라 1㎞쯤 가다 보면 을미사변 때 불탄 영은암 자리가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마의태자가 경주 땅을 바라보던 '마의대'(麻依臺)가 나온다. 마의대에 앉아 바라보면 앞쪽은 신라 수도인 경주를 향해 있고 오른쪽에는 '국망봉', 왼쪽으로는 '건지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굽이굽이 3㎞를 더 가면 마의태자의 전설을 간직한 '태자리'와 '태자사'가 나온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사방이 마의태자를 연상시키는 지명으로 빼곡하다. 용두산 중심에 있는, 고려 의종 때 국왕원찰로 지목됐던 용수사에는 마의당과 월오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용수사 동편 건물은 마의당(麻衣堂), 서편 건물은 월오관(月午觀)이다.
월오를 해석하면 달이 대낮처럼 밝다는 뜻이다. 마의태자가 월오리를 넘어가다 밤에 달빛이 대낮처럼 밝아 망국 태자의 서러움과 한을 되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용두산 정상에는 마의대가 있다. 용수사 산신각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3㎞쯤 올라가다 보면 눈앞이 확 트인 곳에 큰 바윗돌로 만들어진 석좌대가 나온다. 이 좌대는 불상을 모셔놓은 것처럼 3단 기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마의태자는 경주를 바라다보며 울분을 달래고 신라 부흥을 꾀했다는 것이다.
마의대에서 2㎞쯤 산길을 내려가면 태자리가 나오고 태자리 마을 안쪽 산자락 폐교된 태자초등학교 터는 태자사가 있던 자리다. 태자사 자리엔 낭공대사 비문의 귀두 부분이 남아 있는데 신라 김생의 글씨로 집자를 했다고 한다. 비문은 197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져가 현재 그곳에 전시되어 있고 청량산박물관에는 이 모형을 그대로 본뜬 낭공대사 비문이 전시돼 있다.
마의태자가 올라 경주 쪽을 바라보았다 해 이름 붙여진 '만리봉',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를 담은 '건지산', 마의태자와 신라 부흥을 꿈꾸던 비밀무장결사대가 전투를 대비해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는 '투구봉'과 말을 훈련시켰던 '마장리' 등이 있다.
마의태자 길을 따라 용두산을 오른 권대경 회장은 "길에 쌓인 낙엽들이 발목을 덮고 졸졸 흐르는 산골짝 계곡 물소리, 낯선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이 길이 신라 부흥을 꿈꾸던 마의태자가 울분을 삭이면서 올랐다는 생각에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하다"고 했다.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에서 봉화군 상운면으로 넘어가는 경계지역에 있는 달래재길은 마의태자가 스스로 한을 달랬다는 일화에서 이름 지어졌다. 봉화군 상운면에는 '신라리'라는 마을이 있다. 또 신남리, 신라재, 신라길, 신라초교 등 곳곳에 마의태자를 연상시키는 지명이 있다. 명호면에는 '관창리'라는 지명도 있다. 게다가 만리봉'투구봉'건지산'국망봉'달래재길과 월오리 등 망국의 한을 달래고 새로운 신라 부흥을 위한 절치부심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용수사 주지를 지냈던 상운 스님은 "마의태자가 신라의 멸망을 부추긴 사실상 적국의 땅인 금강산으로 들어가 은둔하다 숨졌다고 전해지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고려로의 귀부를 반대했던 숱한 인물들과 함께 마의태자는 경주를 떠나 안강을 거쳐 안동 길안과 임하지역에서 삼베로 옷을 지어 입고 도산면과 봉화 상운면 일대에서 새로운 세계를 위한 터전을 마련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