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몰래카메라와 친위대의 정치

입력 2016-04-11 19: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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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석사)·모스크바 국립사범대(박사) 졸업
경북대(석사)·모스크바 국립사범대(박사) 졸업

푸틴 9월 총선 앞두고 정적 제거 나선 듯

카시야노프 침대 몰카로 국민 분노 야기

개인 친위대 격인 '국가 근위대'도 신설

역사상 최악 폭군 이반 4세 되살아난 듯

올해 9월 총선을 앞둔 러시아는 정치 계략이니 음모니 하여 최근 들어 여러모로 어수선하다. 파나마 페이퍼에 언급된 세계 유명 정치인들이 사퇴하는 등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이름이 오르내린 푸틴은 이를 서방의 계략으로 치부하며 끄떡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통해 입지 굳히기에 나서다 보니 파나마 페이퍼 유출도 러시아의 음모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에는 푸틴의 정적 중 한 명인 카시야노프 인민자유당 당수와 그 보좌관 펠레비나의 혼외 성관계 동영상이 러시아 주요 TV 뉴스 시간에 30분 넘게 방송되기도 했다. 푸틴의 첫 임기에 총리를 지냈던 카시야노프는 푸틴의 과두재벌 제거 과정에 쓴소리를 했다가 해임된 후 야권 인사로 탈바꿈했다. 사사건건 푸틴을 비판했던 그인지라 이번 동영상 공개가 푸틴의 기획이라는 설도 들린다.

이 몰래카메라는 카시야노프 망신주기로만 그치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사생활 노출만으로는 성 관념이 비교적 자유로운 러시아에서 정치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다. 혼외 관계에는 오히려 관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분노를 야기한 것은 침대에서 나눈 지도층 인사들의 무책임한 언사였다. 경제 위기와 테러 위협 앞에서 국민들에겐 애국심을 강요하면서, 진짜 위기가 발생하면 지도층 가족들은 당연히 서방으로 이주하리라는 예측과, 정치인과 뇌물에 관한 시시콜콜한 대화는 특히 씁쓸하게 들린다. 혼외정사의 상대인 펠레비나는 카시야노프의 당 보좌관으로, 어린 시절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꾸준히 반(反)푸틴 사회운동을 해온 전력이 있다. 영미 정치권 인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그녀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스파이 의혹까지 받고 있는 바, 몰래카메라가 카시야노프의 정치적 생명에 어떤 식으로든 치명상을 입힌 것은 분명해 보인다. 몇 안 되는 푸틴의 정적 중 하나가 또 이렇게 사라지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일련의 사건이 푸틴에게 닥친 위기를 방증한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지난겨울 체감한 러시아의 경기는 2000년대 초반 이후 최악이었다. 키오스크라고 불리는 거리의 작은 가게들이 속속 문을 닫았고, 서민들은 오른 물가에 불평을 토로했다. 경제는 어려운데, 시리아로 군대를 파견하고, 서구와는 척을 져서 점점 고립되는 푸틴 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위기적 상황에서 선정적인 스캔들로 대중의 적대감을 서방과 정적에게 돌리는 발 빠른 움직임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인 위기 대처 방안으로 푸틴은 최근 직속 권력 기관인 '국가 근위대'를 신설했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테러 방지와 안전 유지를 위해서라는 이 근위대가 실상은 푸틴의 개인 친위대에 불과하다고 우려를 표한다. 총선과 경제 위기로 야기될 반정부 시위나 소요 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사전 장치라는 것이다.

사전 경고 없이 무력 사용이 가능한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은 이 근위대는 이반 4세의 친위대인 '오프리츠니키'를 상기시킨다. 러시아 역사상 최악의 폭군인 이반 4세는 그 공포정치의 상징처럼 벼락을 의미하는 뇌제(雷帝)라고 불렸다. 오프리츠니키라고 불린 그의 친위대는 빗자루와 개머리를 매단 검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황제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그야말로 빗자루로 쓸어버리고 개처럼 물어뜯었던 것이다. 

러시아 작가 소로킨은 2006년 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2027년의 러시아, 그 미래에도 이반 4세의 시대와 똑같이 오프리츠니키는 존재하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소설 속 미래가 아직 도래하지도 않았는데, 역사 속 오프리츠니키는 이미 되살아난 것 같다. 다소 허무맹랑한 이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될까 우려하는 것은 비단 러시아인들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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