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양은 1874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났다. 1904년 대구군수로 부임한 뒤 대구 풍물에 반해 원적을 아예 대구로 삼고 죽을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다. 늘 지팡이를 짚고 다녔기에 '박작대기'라는 별명을 얻었다…."('1906, 대구 여덟가지 스토리텔링', 조두진, 2012년)
역사 속 4월의 대구는 결코 유쾌하지 않다. 이는 일제 골수 친일파 거두 박중양과의 악연과 그가 대구에 남긴 어두운 그림자이자 '흑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을 낳고 키우고 유학까지 보내준 조국을 한입에 삼키려는 일제를 위해서, 나라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대구읍성을 부숴버리는 행각을 비롯해 그의 일제 앞잡이 노릇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의 빠뜨릴 수 없는 숱한 친일 업적(?) 가운데는 대구 사람들에게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자제단'(自制團)이라는 친일 단체활동과 그가 벌인 단장 노릇도 있다.
그는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절대적인 후광에 힘입어 출세길을 달렸다. 대구군수로 내려와서 대구읍성을 부수었으며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가장 먼저, 전국 최대 규모로 대구에서 생긴 자제단 단장으로 3'1운동 반대와 독립운동 참가자 밀고, 첩보 제보와 같은 활동을 독려했다. 조국 배신과 대구읍성 파괴도 모자라 대구 사람을 일제 경찰의 밀고자로 몰아넣었다. 그런 일을 한 자제단 결성이 바로 1919년 4월 6일에 있었다.
작대기 하나로 대구를 호령했던 그가 영원할 것처럼 믿었던 일제가 망한 뒤 구차한 삶을 살다 죽은 날도 4월 23일(1959년)이다. 그가 '반한' 대구에 묻혔지만 뒷날 후손에 의해 무덤조차 없어졌다. 대구로서는 아픈 역사의 생생한 교육 장소 하나를 잃어버린 셈이어서 안타깝기조차 하다.
대구 4월의 또 다른 기억에는 4년마다의 총선이 자리 잡고 있다. 민주주의의 꽃이자 축제인 선거가 대구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지금 같은 소선거구제가 1988년 도입된 이후 특정당의 독식 결과가 1996년부터 이어진 4월 총선에서 되풀이되고 있어서다. 1996년 15대와 2008년 18대의 예외는 있었지만 나머지는 100% 일당 몫이다. 대구 선거를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선거라고 낮춰 보고 대구 당선의원은 여의도 국회에서 제대로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까닭이다. 대구 4월 총선의 흑역사가 낳은 비극이다. 작대기 투표를 되풀이할 것인가, 끊을 것인가. 5일 남은 4'13 총선에 대한 대구 유권자의 선거 참여와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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