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인공지능 시대 인간, 인간을 이야기하다

입력 2016-04-01 22:30:02

"감정 공유가 핵심인 정신과 의사, 인공지능 시대 살아남겠죠?"

대화에 참가한
대화에 참가한 '호모 파베르'들. 자신이 인공지능 '알파고'라 가정하고 이세돌과 바둑 둘 때의 자세를 취해달라고 요청하자 잠시 고민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재호 교수, 구은미 변호사, 배진우 원장, 최명철 부소장.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지난 3월 기계와 인간의 바둑 대결이 인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흥분이 가라앉을 즈음 대구 시내 한 카페. 아직은 인류를 지배하려는 무시무시한 인공지능이 없음에 감사하며-또는 인공지능이 없어서 힘들었을-하루 일과를 마친 한 무리의 호모 파베르(homo faber'일하는 인간)들이 들어섰다. 최재호(49) 대구교대 수학교육과 교수, 배진우(47) 마인드앤헬스의원 원장, 최명철(43) HP브레인 연구소 부소장, 구은미(39) 법무법인 어울림 파트너 변호사다.

◆인공지능 위세에 '깜놀'

대화는 인류 역사상 결정적 순간의 하나로 기록될 '돌 코너'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으로 시작됐다. 이른바 '바알못'(바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이번 승부를 잠시라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모두 인공지능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음을 실감했다는 표정들이었다.

승자 예측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수학자인 최 교수와 정신과 전문의인 배 원장은 인간의 우세를 예상했었고, 구 변호사와 신경언어학 박사인 최 부소장은 기계의 완승을 점쳤다고 했다. 그러나 결과와 관계없이 한목소리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최 교수는 "알파고의 2연승 뒤 기계가 무서워졌다"고 했고, 최 부소장은 "기술 발전이 상상 이상"이라고 털어놓았다. 구 변호사는 "이 9단의 4국 승리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고 귀띔했고, 배 원장은 "인공지능의 한계가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알파고 신드롬' 이후 달라진 점은 없는지 궁금했다. 배 원장은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싶어 인문학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고 했고, 최 교수는 "미래에 맞춰 살려면 기계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바둑을 배워보고 싶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이들의 직업은 2013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고용의 미래' 연구에서 자동화(automation)될 확률이 10% 이하인 것으로 나타났다. 현존하는 직업의 35%가 20년 내에 컴퓨터로 교체될 것이란 우울한 분석 결과에 비하면 '안전지역'인 셈이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다른 직종과 다를 바 없었다.

배 원장은 "감정 공유가 치료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정신과 의사가 가장 오래 남을 인간 의사라는 농담에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구 변호사는 "인공지능이 판례를 찾아주는 보조 업무 정도를 하겠지만 아무래도 직업 위상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프린스턴대학 박사인 최 부소장은 "미국 동료 연구자들도 인간과 인공지능의 주객이 전도될까 봐 우려한다"고 전했고, 최 교수는 "지식 전달자 이상의 역할이 교육자에게 필요할 것 같다"며 목소리를 낮췄다.

자신의 직업이 기계로부터 얼마나 안전할지 궁금하면 영국 BBC가 공개한 테스트(http://www.bbc.com/news/technology-34066941)를 받아 보면 된다. 구체적인 직업을 입력하면 자동화 위험지수를 보여준다. 텔레마케터(99%), 타이피스트(98.5%), 법률 비서(97.6%)가 위험도 1~3위다. 신문기자의 위험도는 8.4%로 낮은 편이지만 인공지능의 발달 속도를 떠올리면 안심할 처지가 아닌 듯하다.

한반도를 휩쓴 테크노포비아(technophobia'과학기술 공포증) 못지않게 '착한'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여성인 구 변호사는 "가사 로봇이 빨리 상용화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고, 최 부소장은 "자율주행자동차가 나오면 보복 운전이 없어질 것"이라고 상상했다. "포털사이트에서 '인공지능으로 교체되면 좋을 직업'에 정치인이 꼽힌 걸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는 배 원장은 "부상 위험이 큰 특수직업들은 인공지능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자녀들이 선택하면 좋을 직업으로 이어졌다. '알파고가 어디에 있는 고등학교인가'라는 인터넷 유머가 아니더라도 알파고 신드롬이 불러온 대한민국 학부모들의 최대 화두다. 이와 관련, 최 교수는 "고교에서 요리를 공부하는 둘째가 알파고 이후 로봇이 할 수 없는 게 뭐냐며 진로 변경을 고민한다"고 했다. 또 배 원장이 "중학생 아들이 방과 후 수업으로 컴퓨터 코딩을 선택했다"고 하자 구 변호사는 "코딩 가르치는 유치원이 등장하면 대박 날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최 부소장은 "아이들이 어려서 구체적 이야기보다는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감성임을 강조한다"고 소개했다.

1시간 30분가량 이어진 노변정담은 인공지능을 다룬 SF영화들을 거쳐 미래에 대한 준비로 귀결됐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인공지능으로 인한 '대재앙'을 막기 위한 논의에 나서야 한다는 데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최 부소장은 "인공지능이 문명 생활을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은 필연이지만 값싸고 튼튼하다는 이유로 환호했던 플라스틱 개발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배 원장은 "인공지능의 보편화에 따른 과실을 특정기업이 독식할 것이란 우려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학원에서 의료 윤리를 공부하고 있다는 구 변호사는 "인류의 미래를 이끌 어린이들의 도덕심을 높이고 인공지능 개발 못지않게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최 교수는 "인간이 통제 가능한 수준까지의 인공지능 개발에 합의할 필요가 있다"며 "기업 이윤만 추구한다면 유토피아 대신 디스토피아가 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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