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12월 김일성은 만주 몽강현 남패자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가족과 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토벌대를 피해 도피 길에 올랐다. 일본군의 추격은 끈질겼고 이듬해 3월, 김일성이 장백현에 이르렀을 때야 추격을 멈췄다. 도피 길에 오른 지 100여 일만이었다. 북한은 이를 두고 '고난의 행군'이라 이름했다.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정신을 본받아 '(현재의)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자'는 의미를 담았다.
안팎의 시련으로 체제가 흔들릴 때면 북한에선 주민 결속을 노린 '고난의 행군'이 등장한다.
1994년 김일성 사후 1998년까지 진행된 '고난의 행군'은 혹독했다. 그들 스스로 '선전포고 없는 전쟁', '사상 유례없는 국난'이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당시 북한에선 30만~300만 명에 이르는 주민이 굶주림과 기아에 따른 질병으로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은 1994년 김일성의 사망에 따른 정권 불안정과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에 따른 미국의 제재, 1995년부터 3년간 이어진 자연재해가 겹쳐 일어났다. 경제 정책은 실패했고 농업 생산은 붕괴했다.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은 9년 연속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아버지에게서 정권을 이어받은 김정일은 주민들에게 '고난의 행군'을 강요하며 정권을 향한 불만을 막았다. 1996년 신년 노동신문 사설은 "풀죽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사회주의를 고수하겠다는 신념으로 무장하고 '고난의 행군'에서 영예로운 승리자가 되자"며 정신무장을 선동했다.
20년 전 '고난의 행군'에 대한 트라우마가 가시기도 전에 북이 다시 '고난의 행군'을 거론하고 나섰다. 이번에도 노동신문 사설이 선봉에 섰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의 여파로 국제사회가 북의 변화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풀뿌리를 씹어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또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며 주민들에게 위기감을 주입시키고 나섰다.
다시 등장한 '고난의 행군'은 20년 전과 판박이다. 김정은이 아버지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도 똑같고, 북이 핵 관련 활동으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자초한 것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변하려 하기보다는 주민들에게 '풀죽을 먹든' '풀뿌리를 씹는', '고난'을 강요하는 점도 닮은꼴이다.
20년 동안 북한은 달라진 것이 없다. 굳이 변한 것을 꼽자면 핵실험을 몇 번 했다는 것뿐이다. 그것을 견뎌내는 북한 주민들이 그저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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