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 <7>합천·성주 가야산

입력 2016-03-27 22:30:02

"비가 눈앞 가리면 마음을 여세요…내 안으로 산이 들어옵니다"

"가야산은 불법승 삼보사찰 중 법보종찰인 해인사가 둥지를 튼 천하명산이다. 산에서 좋은 기운 듬뿍 받아 가십시오." 엄홍길 대장이 서성재에서 원정대원들과 함께 산을 오르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전국 산객들이 합천, 성주를 찾은 날 가야산엔 춘분(春分) 비가 내렸다. 짙은 운무를 동반한 비 때문에 시계는 '제로'. 세찬 비는 우비의 깃을 때리고 있었다. 등산객들이 산행을 망설이자 엄홍길 대장이 참가자들을 독려하고 나섰다.

"우중(雨中) 산행은 하늘이 준 이벤트입니다. 운무에 시야가 가리면 귀를 여세요. 새소리, 물소리가 들릴 겁니다. 비가 눈앞을 막으면 마음을 여십시오. 산이 내 안으로 들어올 겁니다." 엄 대장의 격려에 힘을 얻은 원정대는 백운동계곡으로 발길을 내디뎠다. 3월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야산을 엄홍길 대장과 함께 올랐다.

◆백운동~서성재~칠불봉 원점회귀 코스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 주최 '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 가야산 행사에는 전국에서 1천여 명의 원정대가 참석했다. 며칠 전부터 비 소식이 예보돼 호남, 중부지역에서 일부 팀이 참가하지 못했다. 이날 등산 코스는 백운동주차장을 출발해 서성재를 거쳐 칠불봉, 상왕봉을 돌아오는 8.6㎞ 원점회귀 코스. 용기골을 가득 메운 우비 행렬을 보면서 날씨에 굽히지 않는 산꾼들의 의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백운동계곡은 왼쪽으로 만물상 능선을 끼고 있다. 계곡 너머에 두꺼비, 돌고래, 개구리 바위들이 구름 속에서 도열해 있을 생각을 하니 자꾸만 시선이 산 쪽으로 향한다. 빗속을 한 시간쯤 오르니 눈앞에 넓은 공터가 열리며 인파가 나타났다. 서성재였다. 이 재(峙)는 성주 수륜면과 합천 가야면을 이어주는 고개로 옛 가야산성 축성 당시 서문(西門)이 있던 자리다. 가야산성은 대가야 수도였던 고령의 외곽 방비를 위한 중요한 요새였고 가야왕의 휴양을 위한 행궁(行宮'왕실의 별장)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빗속 구름 뚫고 마침내 칠불봉 정상에

고대 천신(天神) 이질하와 여신 정견모주가 노닐던 곳으로 전해진다. 둘은 바위꽃밭인 상아덤에서 부부의 연을 맺고 옥동자를 출산했는데 이 왕자들이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서성재에서 한숨을 돌리고 칠불봉을 향해 나섰다. 너덜갱에 급경사 길이 이어지지만 철 계단, 나무데크가 잘 정비돼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서성재 출발 40분 만에 일행은 칠불봉으로 올랐다. 칠불봉은 1,443m로 최고봉이지만 그동안 상왕봉에 밀려 주봉(主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표고 측량에 혼선이 있었던 탓이기도 하지만 봉우리가 가지는 상징성이 상왕봉에 비해 떨어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칠불봉이 속해 있는 성주군에서는 최근 '합천 가야산, 성주 가야산 함께 쓰기'를 제안하고 있다. 성주 수륜중 송진환(52) 교장은 "가야산 전체 면적 중 성주군 관할 지역이 합천보다 더 넓고 또 최고봉이 성주 쪽에 자리 잡고 있으니 성주 가야산으로 불러도 되지 않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200m 거리에 있는 상왕봉은 소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봉(牛頭峰)으로 불린다. 이 두 봉우리는 최고봉답게 사방으로 시원한 조망을 펼쳐 놓는다. 쾌청한 날에는 매화봉, 수도산, 덕유산부터 지리산 줄기까지 한눈에 내려 볼 수 있다. "어느 구름 밑에 덕유산, 지리산이 있나." 운무에 갇힌 정상에서 산꾼들은 눈짐작으로 산들을 헤아렸다.

◆불교 설화'전설'기운 간직한 가야산

"산의 형상은 천하의 으뜸이요, 땅의 기운은 해동의 제일이라. 고대 사람들은 이곳에서 가장 높고 신비로운 산을 '가야산'이라고 불렀다."(세종실록 지리지)

가야산 이름 유래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전한다. 합천, 고령은 옛 가야의 땅으로 대가야의 기원에 관한 전설을 담고 있으니 여기서 이름을 빌렸다는 학설이 있고, 또 가야산의 '가야'를 인도 불교의 성지 '부다가야'에서 따왔다는 설도 전한다. 주변의 봉우리들이 우두봉(범어로 가야는 소), 상왕(象王'모든 부처를 말함)봉 등 불법과 관련한 이름들이 많아 불교와 연관되었다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기도 하지만 확인된 정설은 없다.

불교신자인 엄 대장은 산행 출발 전 "가야산에는 불법승(佛法僧) 3대 사찰 중 하나인 해인사가 깃들어 있다"며 "좋은 산에서 맑은 기운을 듬뿍 받아가자"고 산행객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비운의 최치원 말년 보내기도

가야산 하면 항상 패키지로 따라붙는 조합이 해인사와 신라 유학자 최치원이다. 해인사는 민족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보전한 덕에 600년 가까이 법보종찰의 명성을 이어받았다.

가야산은 종교뿐만 아니라 예술적 측면에서도 항상 시류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신라 말 비운의 지식인이었던 최치원이 이곳에 몸을 의탁한 후 홍류동 일대는 고금의 문인들과 묵객들을 위한 풍류의 이상향이 되기도 했다.

이제 일행은 백운사지를 거쳐 하산 길로 접어든다. 아침부터 내린 비는 그침을 모르고 오후 내내 가는 비를 뿌렸다. 비는 안개를 흩어놓으며 시야와 전망을 가렸지만 한편으로 소리의 향연을 펼쳐 귀를 즐겁게 했다.

용기골 물소리는 산객들의 근심을 씻어내고, 나뭇가지 사이로 가끔씩 들려오던 새들의 지저귐은 등산객들을 낭만 모드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아주 잠시 접었을 뿐인데 산은 '오감'(五感)을 잔뜩 열어주며 산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눈이 닫히면 마음이 열린다'는 작은 진실, 가야산 우중 산행에서 얻은 소중한 화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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