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을 쌓는 나라, 독일…『독일사 산책』

입력 2016-03-18 22:30:02

독일사 산책/ 닐 맥그리거 지음/ 김희주 옮김/ 옥당 펴냄

독일은 여러모로 부러운 나라다. 일단 잘산다. 유럽에서는 1위, 세계에서는 4위의 경제 대국이다. 그런데 그냥 잘사는 게 아니라 꾸준히 잘살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재정위기 때문에 유럽 대부분 국가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독일은 지속적으로 플러스 성장을 했다. 이처럼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일은 정치적으로도 유럽을 이끄는 리더 국가로 자리 잡고 있다. 서유럽 국가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동유럽 국가들이 독일에 기대고 있는 것이 요즘 유럽공동체(EU)의 형국이다.

우리가 유독 부러워할 만한 점도 독일은 여럿 갖고 있다.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골치 아픈 숙제인 통일을 이미 27년 전에 이뤄냈다. 과거사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선진국이다. 기업과 정부의 나치 관련 사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 뉴스를 살펴보면, 올해 3월 7일 독일 자동차 기업 BMW는 2차대전 때 나치에 군수물자를 납품하고 포로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한 것에 대해 사죄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05년 취임 이후 수차례 독일 정부를 대표해 나치의 만행에 대해 사죄했다. 앞으로 사죄할 일이 생기면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일본 정부로부터 일제의 만행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독일 정부로부터 당연하게 사죄를 받아내는 나치 피해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소식이 그저 부럽다.

물론 독일이라고 모든 게 완벽하지만은 않다. 최근 발생한 독일 자동차 기업 폭스바겐의 엔진 배기가스 조작 사건이 그랬다. 굳이 찾자니 이거 하나 정도 눈에 띈다. 독일에 대한 여러 평가를 종합해보면, 지금 지구 상에는 독일만 한 나라가 없다. 어떤 기반이 지금의 독일을 만든 것일까?

독일 역사 속 유물로 21세기 독일을 읽어주는 책이다. 저자는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사학자이자 영국박물관장을 지낸 닐 맥그리거다. 그는 박물관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인물답게 이 책을 '독일 역사문화 전시회'로 꾸몄다. 독일의 건물, 성경, 소설, 동화, 그림, 조각, 화폐, 기계, 자동차 등 다양한 유물을 컬러 사진으로 수록하고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낸다. 독특한 점은 유물의 숨은 뒷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몇 가지 살펴보자.

독일은 미래를 위해 부끄러운 과거라도 과감하게 드러내 질책할 줄 안다. 유럽에서 살해된 유대인들을 기리는 '홀로코스트 추모비'가 좋은 예다. 1990년 통일 후 독일은 나치에 가담했던 사람들에 대해 강도 높은 조사를 시작했다. 나치 시절 이뤄진 범죄에 대해 소수 나치당원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인식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려면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공개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세운 것이 홀로코스트 추모비다. 정치평론가 미하엘 슈틔르머는 "수도 한복판에 수치스러운 역사를 담아 기념비를 세우는 나라는 독일뿐"이라고 했다. 이런 반성하는 자세는 결과적으로 독일에 실리를 안겨줬다. 국제사회가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수용하고 지금처럼 큰 역할을 맡기게 된 배경이다.

독일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유물도 여럿 있다. 두 가지를 살펴보자. 하나는 독일의 전신인 신성로마제국 시대의 '동전'이다. 당시 각 지역 제후국마다 다른 동전을 썼다. 통화가 통일돼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성로마제국은 문제없이 돌아갔다. 통화 체계의 중심에는 황제가 있었고 각 지역 제후국의 동전들은 비슷한 크기와 무게로 제작돼 통용에 큰 무리가 없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개념은 '창조적 분열'이다. 동전을 각자 따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자치권을 가졌던 바이에른, 작센, 함부르크 등의 도시들은 지금도 독일연방공화국으로부터 인정받은 자치권을 도시의 경쟁력으로 치환해 쓰고 있다. 이게 다시 독일의 경쟁력을 만든다. 제대로 된 지방분권을 외치는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들이 역사적 뿌리는 다르더라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그런 역사적 뿌리야 앞으로 새로 만들어가면 되는 것 아닌가.

또 하나는 '철십자 훈장'이다. 유럽에서 훈장은 신분과 재력에 따라 다른 재질로 제작돼 수여됐다. 그런데 1813년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은 기존 모든 훈장의 사용을 중단하고 철로 만든 훈장을 도입했다. 당시 프랑스에 맞서 조국 해방을 위해 전쟁에 뛰어든 모든 프로이센 사람이 계급에 상관없이 동등한 철 재질의 훈장을 받았다. 실은 당시 프로이센 재정이 좋지 않기는 했다. 어쨌든 철십자 훈장은 평등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강인한 이미지까지 더해 국민의 힘을 응집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국민의 힘이 응집된다고 늘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정권을 잡은 나치가 그 예다. 나치도 군인들에게 철십자 훈장을 줬다. 584쪽, 2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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