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 조성 앞장 수산나 메리 영거 씨, 하양 무학농장 터 찾아

입력 2016-03-16 22:30:02

"50년 전 무학산 개간 주민에 일·먹거리 제공"

수산나 메리 영거 씨가 12일 경산 무학산 나라얼연구소를 찾아 1960년대 중반 조성했던 무학농장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수산나 메리 영거 씨가 12일 경산 무학산 나라얼연구소를 찾아 1960년대 중반 조성했던 무학농장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벽안(碧眼)의 천사' 수산나 메리 영거(80'한국명 양 수산나'가톨릭푸름터 고문) 씨가 1960년대 중반 가난한 하양 주민들에게 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했던 무학농장이 있었던 하양 무학산을 50여 년 만에 다시 찾았다.

12일 (사)나라얼연구소(소장 황영례)의 초청으로 하양 무학산을 방문한 수산나 씨는 나라얼연구소 30여 명의 회원에게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수산나 씨는 스코틀랜드 명문가 집안 출신으로 옥스퍼드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12월 스물셋의 나이에 당시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의 초청으로 한국땅을 밟았고, 소외된 이웃의 복지와 교육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수산나 씨는 1964년 가난한 하양 주민들을 위해 무학산 개간 사업을 구상하고 있던 이임춘 하양성당 신부를 만났다. 무학산 개간을 통한 무학농장 조성은 어려운 시절 농촌을 근대화하고 하양 주민들에게 먹거리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안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비용이 문제였고, 수산나 씨가 이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외국의 구호단체와 가톨릭 비정부기구(NGO)에 수없이 지원을 요청한 끝에 후원금과 물품을 받았다. 여기에 경북도의 지원으로 군인들이 길을 닦았고, 무학산 중턱 30여만 평을 개간해 옥수수와 감자, 사료 작물을 심었다. 현대식 축사와 우유 가공소를 갖춘 유럽식 목장으로 1965년 무학농장이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췄다.

"당시 무학농장에서 일했던 하양 주민들에겐 품삯으로 돈 대신에 밀가루를 더 쳐서 줬어요. 주민들은 밀가루를 다시 팔아 생계를 이어갔죠." 하양 주민들에게 일자리와 먹거리를 제공했던 농장이 몇 년 후 깡패와 결탁한 한 우유업체의 방해로 결국 문을 닫았고, 나중에 농장을 판 돈은 무학중'고교를 위해 쓰였다.

수산나 씨는 1967년 영국에서 출간한 'Never Ending Flower'(무궁화)라는 책을 통해 한국에서의 사회복지활동과 무학농장 등을 소개해 당시 한국의 사회상을 외국에 널리 알렸다.

수산나 씨는 "무학농장이 가난한 주민들을 먹고살게 해 주고 자녀들이 다니는 무학중'고교를 위해 쓰였으니, 이 또한 하느님이 역사를 인도한 것"이라며 "이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서 봉사활동을 할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했다. 우리 모두가 공동선을 추구할 때 인류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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