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랄할수록 시청률이 더…'나쁜놈들의 전성시대'
지난해 1천300만 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베테랑'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됐던 건 유아인이 연기한 악역 조태오였다. 재벌가의 망나니 아들로 '갑질'이 익숙해 나쁜 짓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눈꼽만큼도 반성할 줄 모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나쁜 놈. 요즘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하는 인기 있는 악역 캐릭터들의 구성 조건이다. 이들은 각각 스스로의 행동에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으로 인해 피해 받는 이들을 절대 동정하지 않는다. 선악 구도가 뚜렷하게 강조되는 작품일수록 악역이 돋보여야 하고 그래야 극 전반에 활기가 도는데, 요즘 이런 매력적인 악당들이 자주 등장해 눈길을 끈다. SBS 수목극 '리멤버-아들의 전쟁'에서 남규만을 연기한 남궁민, 또 tvN 금토드라마 '시그널'의 김범주 캐릭터를 맡고 있는 장현성 등이 유아인의 뒤를 이어 주목받고 있다.
◆'리멤버' 남궁민, 철부지'망나니 연기
남궁민이 살려낸 악역 남규만은 드라마 '리멤버'가 20%대의 높은 시청률과 함께 큰 인기를 얻었던 주된 이유였다. 매력적인 악역 캐릭터를 완성시켜 드라마의 주목도를 높이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해냈다.
극 중 남규만이란 캐릭터는 철부지 재벌가 아들로 각종 악행을 일삼고 쾌락을 좇는 인물이다.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광분하고 사고는 그저 돈으로 수습한다. 주행 중이던 자신의 차 앞에 끼어들었다는 이유로 앞차를 세워두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등 분노조절 장애 증세를 보이는가 하면, 술과 마약에 취해 살인까지 저지르고 죄를 은닉한다. 처음 '리멤버'의 캐릭터 설정이 공개됐을 때부터 '베테랑'의 유아인과 비교됐을 정도로 두 인물은 닮은 구석이 많다. 이 때문에 남궁민은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전부터 "유아인의 조태오 캐릭터와 비슷한데 어떻게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줄 거냐"라는 질문에 시달렸다. 부담감이 컸을 테지만 결론적으로 남궁민의 연기는 성공적이었다. 감정 기복이 심한 인물의 특징을 잘 살려내 웃음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는 연기로 '악역인데도 은근 귀엽다'는 말까지 들었다. 결국엔 남규만 캐릭터가 만들어낸 수많은 이슈로 인해 드라마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고 덕분에 시청률도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릴 수 있었다.
남궁민이 악역을 맡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조인성과 동반출연한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도 성공을 위해 친구를 이용하고 궁지에 몰아넣는 비정한 영화감독을 연기했다. 영화 '뷰티풀 선데이'에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붙잡고자 살인까지 저지르는 역할을 맡았다.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는 야망을 위해 가족까지 버린 이기적인 캐릭터를 보여줬다. 지난해 방송된 드라마 '냄새를 보는 소녀' 역시 남궁민을 악역으로 내세웠던 작품이다. 여유롭고 친절한 미소를 가진 스타셰프지만 내면의 상처 때문에 연쇄살인까지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역을 소화했다.
'악역에 특화된 배우'로 활동했지만 그동안 남궁민의 연기가 대중의 뜨거운 반응을 끌어낸 적은 없었다. 주인공을 잘 받쳐주는 투톱 연기자로 제 역할을 다 했다는 평가를 받는 데 그쳤다. 그런데 '리멤버'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레전드급 악역'이란 극찬 속에 '대세 배우'가 됐고 각종 광고 모델 제의까지 받고 있다. 이제껏 보여준 악역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더 나쁜' 모습을 보여줬는데 오히려 대중의 반응이 뜨겁다.
◆'시그널' 장현성, 실제 있을 듯한 인물
'시그널'의 장현성은 현실 속에 존재할 듯한 야비한 경찰을 연기해 시청자들의 분노를 유발하고 있다. 성공을 위해 경찰이란 직업을 이용하고 무고한 시민에게 누명을 씌우고 사건을 조작하는가 하면 심지어 살인까지 조종한다. 권력자의 옆에서 기생하며 오직 성공을 위해 달린 덕분에 고속승진을 하고 경찰 월급만으로는 불가능한 부를 누리게 됐다. 극 초반부터 간간이 등장해 조진웅-김혜수-이제훈 등 정의파 경찰들의 반대편에 서서 보는 이들을 열 받게 하더니 중반부가 넘어서면서 비중이 커져 전체 흐름의 중심으로 올라왔다. 극 중 조진웅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인물, 그 외 각종 비리의 온상으로 밝혀지면서 공분의 대상이 됐다.
장현성이 연기하고 있는 김범주란 인물은 재벌가 자제라는 설정에 비해 한층 현실에 가깝게 느껴진다. '잘못된 일' '해서는 안 될 일'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 조태오나 남규만처럼 약에 취해있거나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게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행하는 인물이라 더 무섭게 느껴진다. 타인을 밟고 올라서야 성공할 수 있다고 부추기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실제로 직장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성공지향적인 인물들의 행동패턴과 닮았다. 그래서 장현성의 연기는 더 리얼하게 느껴지고 덕분에 반대 지점에 선 조진웅의 싸움도 강한 설득력을 얻게 된다.
특별출연 형식으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손현주 역시 인상적인 악역을 연기했다. 장현성을 쥐락펴락하는 비리 국회의원 역을 맡아 잔혹한 권력자의 민낯을 드러낸다. 분명 나랏일을 하는 국회의원인데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모습은 조직폭력배 보스와 다를 바가 없다. 수행원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혼자 고급식당의 룸을 차지하고 앉아 느긋하게 비싼 회와 고기를 즐기는 장면을 통해 강한 카리스마를 과시했다.
◆나빠질 거면 더 나쁘게
매력적인 악당 캐릭터는 작품의 성패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목받는 악역 캐릭터의 탄생이 흔한 일은 아니다. 각본과 연출의 탄탄한 뒷받침 속에서 배우의 피나는 노력과 무엇보다 '운'까지 따라줘야 가능하다. '배트맨' 시리즈를 만들 때 제작진이 가장 공을 들였던 게 악당 캐릭터의 연기자 섭외였고, 두 차례 조커를 연기한 잭 니콜슨과 히스 레저는 매번 '역대 최고의 악역'이란 극찬을 끌어냈다.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보여준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 역시 마찬가지다. '어벤져스'에서 악당 로키를 연기한 톰 히들스턴도 이 역할로 스타덤에 올랐다.
극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인 만큼 연기력이 중요하고 그만큼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게 악역이다. 그만큼 배우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캐릭터지만 막상 마음먹는 게 쉽지도 않다. 소리 지르고 화만 낸다고 나쁜 놈이 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악역 역시 그 나름대로 행동에 정당성을 가져야 하고 그래야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다. 배우 본인의 기존 이미지도 중요하다. 평소에도 밉살스러워 보이는 배우가 '나쁜 놈'을 연기하면 오히려 보는 이들의 짜증만 불러오는 결과를 낳는다. 나쁘지만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작품의 성공에 기여하고 배우 본인까지 돋보이게 만들 수 있는, 그래서 성공의 요인 중에는 노력과 실력에 운이 더해져야 한다.
최근 악역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이 작품이 끝난 뒤에도 지명도를 높이며 인기를 끄는 데에는 드라마나 영화 콘텐츠 소비층의 관점 변화도 한몫을 하고 있다. 과거 영화 '공공의 적'에서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는 인물을 연기했던 이성재는 그 후로 한동안 광고계에서 배척당했다. 로맨틱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존속살해범'을 연기한 후에는 배우로서 연기력을 인정받는 성과를 얻은 반면 경제적으로 손해를 봐야 했다. '나쁜 놈'을 연기한 남궁민이 화장품에 신사복 광고 제안까지 받고 있는 지금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이제 대중이 연기를 연기 자체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들이 보여준 캐릭터가 그만큼 공감대를 형성해 대중을 설득시켰다는 뜻이기도 하다. 끝에 가서 개과천선하는 인물이 아니라 '반성할 줄 모르는 악당'이 벌 받는 모습에서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대중이 대리만족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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