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문학노트] 꿈은 꿈일 때 아름답다?-김형경의 '성에'①

입력 2016-03-09 19:52:51

바로 그것이 이들의 치명적인 오류였을 거야. 유토피아를 꿈꾸며 환상을 살았다는 거. 아마도 이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에 도달해서야 그 강렬한 고통과 절망과 소진의 느낌, 그것이 곧 삶의 실체라는 것을 깨달았을 거야.

(김형경의 '성에'중에서)

한 남자가 있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왔는데 그 이유는 꿈 때문이다. 남자는 '세계 일주'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꿈을 이루기 위해 사선을 넘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직 남한조차 돌아다니지 못했다. 남자는 고속도로 휴게소 뒤 아무도 찾지 않는 후미진 산속에서 혼자 살아간다. 한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꿈은 '자연 친화'다. 젊은 시절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사랑했지만 상처만 받았다. 여자는 남자가 사는 산을 찾는다. 산은 여자에게 자연의 일부였으니까. 둘은 '자연'스럽게 살을 나누고 마음을 섞는다. 여자가 온 이후 산에는 그전에 찾을 수 없었던 생명력이 꿈틀거린다. 여전히 남자는 세계 일주의 꿈을 버리지 못하지만 이미 그의 삶은 여자의 삶과 동화되어 그 삶에 적응한다.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꿈은 '스위트룸'이다. 가장 완벽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그의 꿈이다. 사실 그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그런 그 사내가 남자와 여자가 사는 산을 찾아온다.

남자, 사내, 여자. 셋은 묘하게 동거를 시작한다. 동거라고 하지만 사실상 중심에는 여자가 있다. 여자는 자신의 성을 남자와 사내에게 공평하게 분배한다. 물론 그들의 노동으로 인해 얻어지는 부산물도 공동소유다. 그들은 별 문제없이 살아간다. 그걸 행복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여자가 임신을 한 것이다. 축복이자 또 다른 행복의 조건이 될 수도 있음직한 여자의 임신이 이들 사이에 틈을 만든다. 물론 남자는 여자에게 더욱 정성을 쏟는다. 문제는 사내의 내면에서 발생한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누구의 아이일까? 누구의 아이라는 사실이 무슨 의미를 지닐까마는 사내에게는 그것이 점점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그의 꿈은 스위트룸이니까. 이제 사내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결과는 파국이다. 공동체는 해체된다. 셋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모두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려 그 위를 덮는다.

정리한 이야기는 김형경의 소설 '성에'의 내부 이야기이다. 기억에만 의존한 정리이기에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소설은 산속 귀틀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인간이 지닌 마음, 욕망, 꿈에 대해 실험하고 있다. 남자, 사내, 여자라는 존재. 그들의 꿈, 세계 일주, 자연 친화, 스위트룸. 사실 꿈은 꿈일 때 가장 아름답다. 꿈이 일상으로 바뀌면 거기에는 남루한 외피만 존재한다. 남자는 세계 일주를 꿈꾸지만 그 가장자리에도 가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계 일주를 꿈꾼다. 세계 일주라는 꿈이 존재하기에 남자는 오히려 일상에 충실할 수 있다. 사내의 꿈 스위트룸, 사실 이 세상 어느 가정도 스위트룸만일 수는 없다. 부분적으로 스위트룸인 것이다. 여자가 임신을 하면서 사내의 꿈은 드디어 현실로 다가온다. 아마도 사내는 아기를 스위트룸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꿈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 꿈은 온갖 갈등과 번민과 결점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그것은 결국 세 사람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을 파탄으로 이끈다. 결국 김형경은 이 세 사람의 이야기에서 꿈(김형경의 표현으로는 환상)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고 있었던 셈이다. 다시 말하자면 꿈은 꿈일 때 진정 아름답다. 궁극적으로 꿈은 꿈이어야 한다. 그것을 현실로 바꾸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무의미함을 넘어 삶을 불행으로 이끄는 출발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가 부족하다. 꿈이 꿈일 때만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무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럼 김형경은 꿈의 무의미함을 말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니다. 이제 외부 이야기로 가 보자.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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