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반에는 10년 넘게 영국에서 살다가 온 학생이 있다. 학생과 상담을 하기 위해 1, 2학년 때 모의고사 점수를 보았더니 영어 성적이 1등급은 거의 없고 대부분 2등급 아니면 3등급이었다. 학생의 말로는 영어 듣기에서는 영국 발음과 미국 발음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문제를 푸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지문을 독해하는 것은 여전히 적응이 잘 안 된다고 했다. 영국에서는 쉬운 말로 간결하게 쓴 글이 잘 쓴 글이고, 글은 쉬우면서도 깊은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배웠는데, 한국의 시험에 나오는 글은 영국에서 배워 왔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고 했다. 시험에 나오는 지문들은 영국에서도 잘 쓰지 않는 현학적인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 구조는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몇 번을 읽어도 뜻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교내 학술대회에 나가기 위해 논문을 쓰는데 그런 어려운 문장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도 했다.
학생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연구의 대부분인 인문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과 '인문학 열풍'이라는 말이 공존하는 상당히 모순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문학계 내부에도 문제가 있다.
원래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설명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하층민들은 먹고사는 문제가 최우선이다 보니 그런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자연히 인문학은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류층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이 되어 왔다. 사서삼경을 읽고 이(理)와 기(氣)에 대해 중국의 역사를 인용하며 논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양반이었고, 그들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좀 더 어려운 말로 벽을 쌓아 왔던 것이다.(일반 백성들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명령만 들을 뿐이었다.) 현재도 문학, 철학, 사회학, 역사학과 같은 학문 분야들에서는 글을 쉽게 쓰면 품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인지 어렵고, 모호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잘 파악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의 인문학 열풍은 엄밀하게 말하면 쉬운 인문학, 생활과 밀착된 인문학을 통해 인문학의 가치를 재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중에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유시민이나 강신주, 이덕일과 같은 인문학 열풍을 이어가는 작가들의 글은 쉽게 읽히지만 읽고 나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이고,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쓸 수 있는 것은 글 쓰는 입장에서 보면 참 부러운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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