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시련의 시절…성공의 씨앗이 여물고 있었다
1989년 가을, 그는 편안한 교직 생활을 미련 없이 버리고 가족과 함께 파리로 떠났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극심한 생활고로 먹을 것이 없었고, 그림 그릴 도구조차 구할 길이 없어 원형탈모증이 생겼고, 돈이 없어 딸아이가 며칠씩 학교에 가지 못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손이 숯으로 형편없어질 무렵, 그의 이름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는 프랑스 파운데이션 브랑카에서 한국 작가로는 이우환에 이어 두 번째로 개인전을 열었다. 지난해에는 유럽 최대 동양미술관인 파리 기메 박물관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파리 생활 27년, 굶어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궁금해 전시 준비로 대구에 온 이배(60) 씨를 만났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나.
▶농부의 DNA가 작용한 듯하다.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모두가 청도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봄이 오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이면 김을 매고 가을이면 수확하는 농부의 유전자가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게 했다. 몸이 기억해서 그렇게 하도록 했던 것 같다.
-왜 편안한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외국 나갈 생각을 했나.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선생님 집으로 신년 인사를 갔다. 친한 선배가 "너도 여기 오느냐"고 묻기에 "별 방법 있나요"라고 답하고 헤어졌는데 그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부모님은 미술 공부하는 것을 반대했고 그래도 자식을 위해 논과 밭을 아낌없이 팔아서 서울까지 보내 공부를 시켰는데 고작 스승에게 눈인사나 하러 다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림을 그리게 된 목적과 처음 마음을 생각했다.
-그렇다고 모두 외국에 나가는 것은 아니다.
▶감나무 가지에 연이 걸렸을 때 이것을 푸느라고 애쓸 것이 아니라 연을 자르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 방법이다. 여기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있으면 나를 바라보기도 어렵고 이 땅에서는 개혁과 변혁을 이룰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내가 진정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를 떠올렸다.
-그때 34세였다.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아내는 큰 작가가 되려면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며 오히려 격려했다. 아내가 더 적극적이었다.
-파리 생활이 쉽지 않았을 텐데.
▶집 바깥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언어가 안 되고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시각이나 값어치가 달랐다. 물론 두려웠다. 그러나 외부가 나에게 잘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격을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구정물을 확 뒤집어 쓰고도 웃고 서 있어야 하는 것이 바깥세상이었다. 울면 지는 것이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을 듯하다.
▶미술관을 다니며 작가로서 나의 위치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수십 세기를 통해서 수많은 천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가 막히게 그려놓았기 때문에 여기에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문화적 열등감도 작용했다. 나는 15살에 피아노를 처음 본 사람이다. 문화적인 토양이 안 돼 있는 나와 문화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그들과의 경쟁에서 과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몰려왔다.
-어떻게 극복했나.
▶나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까? 비어 있기 때문에 쉽게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엎어버리자는 것이 현대미술이라면 나 자신이 이미 현대미술에 최적화된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유혹은 없었나.
▶외국으로 나간 사람들은 한국 대학에 자리만 생기면 국내에 들어오려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도 그런 제안을 받았지만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한국을 떠날 때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 당시 졸업한 대학에 자리를 제안한 은사님은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그때 내가 한국에 오지 않은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재료로 쓰고 있는 숯과의 만남도 가난 때문이라고 들었다.
▶1989년 파리로 떠나기 전에는 화려한 색채를 많이 썼다. 검은색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파리에 가보니 화실도 없고 물감 살 돈도 없었다. 오로지 있는 것이라곤 시간뿐이었다. 화실을 구하러 다녔으나 아무도 빌려주지 않았다. 1년 정도 그렇게 보냈다. 어느 날 과연 화실이 없어 그림을 못 그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흐처럼 밖에 나가서 그리면 되고, 재료를 살 돈이 없으면 값싼 재료로 그리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든 걸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숯이었다. 한 통을 사면 1, 2주는 재료 준비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모든 제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길이 열렸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화실이 없으면 어때하고 생각하니 버려진 빈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무섭고 커다란 빈 공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혼자서 무서우니까 여러 화가들이 모여 같이 그렸다. 추우면 비닐로 바람을 막았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그렸다. 주변 환경을 이겨낼 우악스러운 그림이 만들어졌다. 좋은 화실을 얻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지 못했을 것이다.
-기회가 왔나.
▶힘든 환경에서 여러 사람이 열심히 작업을 하자 이를 눈여겨본 미술평론가가 있었다.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숯을 소재로 한 작업의 의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숯은 불로부터 왔고 숯은 죽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불이 있으면 다시 에너지를 가지게 된다. 숯이 가지는 내재된 물성에 대해 이론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우환 선생의 어시스턴트로 오랫동안 일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우환 선생은 선배 예술가로서 또 멘토로서 중요한 분이다. 1991년부터 1997년까지 그의 조수로 있었다. 유럽 전시회 준비하는 일도 돕고 조각도 거들었다. 재정적인 도움도 되었고 그 시간을 통해 작가가 걸어갈 길을 배웠다.
-가장 많이 배운 것이 있다면.
▶미술의 메커니즘을 알았다. 이우환 선생은 불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의 생각과 철학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감과 인품과 당당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늘 당당했고 그가 지향하는 세계를 분명히 말했다. 인격적으로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것을 배우고 싶었다.
-메커니즘을 간단히 설명하면.
▶메커니즘은 세계이고 그리고 중심이다. 아무리 똑똑해도 메커니즘을 모르면 안 된다. 노벨상을 받고 싶으면 그 메커니즘을 알아야 다가가기 쉽다는 이야기다. 내가 중심을 만들면 더 좋다. 나는 그런 중심이 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이미 단색화 화가들이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이 돼 있다.
▶영국과 미국의 대단한 화랑과 컬렉터들이 참으로 발음하기 어려운 '단색화'를 입에 달고 있을 만큼 단색화는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이 되었다. 단색화는 세계의 어느 작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
-단색화가 인기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1970년대 젊은 추상미술작가들이 시도한 작품을 단색화라고 부른다. 그 당시 유학은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외부와는 철저하게 차단되고 내부는 통제된 사회였다. 젊은이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세상이었다. 그들은 캔버스를 직접 만들어 암울하고 우악스러운 세상의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애썼다. 한정된 재료로 표현하려고 하니 색은 단순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퀄리티를 담보해야만 했다. 정신과 직관을 담아내야 했다. 40년 뒤에야 세계가 그 진가를 알아봤다. 그들의 열정과 정신에 세계가 감동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의 그런 도전 정신을 기대하고 있다.
▶단색화 화가들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미련스러울 만큼 자기 고민과 검열에 치열했다. 기존의 것에 도전하고 누구보다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다. 무모할 만큼의 도전과 뜨거움이 바로 젊음의 전유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다.
▶'무명시절 우리는 이미 유명해져 있다'는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무명시절을 잘 보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나 지신도 무명시절에 이루었던 것을 떼어내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모든 작가들은 어려운 시기를 견뎌야 하고 또 그런 시기를 소중히 보내야 한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도전과 끈기다. 파리에서의 첫 10년 동안 그림 한 점 팔리지 않았다. 그때 한국의 유명 갤러리 대표가 파리에 자주 왔다. 그가 나중에 말하기를 나를 볼 때마다 그것이 새벽이든 밤이든 화실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 성실함에 반해 서울서 나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음해에 현대미술관에서 선정한 올해의 작가가 되었다.
-스스로 천재성이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재주가 많거나 천재성이 있는 작가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직하게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놀다가 영감이 떠올라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 매일 그려야 그림이 되는 재주 없는 작가다.
-꿈이 있다면.
▶큰 꿈과 바람이 있지만 이루어진 다음에 말하겠다. 괜히 미리 말하면 악령들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웃음)
글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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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는 청춘들에게
바깥과의 소통을 늘려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억지로라도 밖으로 나가서 부딪쳐야 합니다. 웅크리고 자기 것만 쳐다보고 앉아 있으면 자신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파악이 안 됩니다. 그리고 남의 도움을 받고 싶어도 가만히 있는데 누가 도움을 줄까요.
부딪칠수록 느낌도 배움도 강해집니다. 나는 한국에 가면 후배들한테 다 밖으로 나가라고 합니다. 안주하면 오히려 자기 세계까지도 점점 좁아지고 막힐 수 있습니다. 굶어도 밖으로 뛰어다녀야 합니다. 바깥과의 부딪침이 있고 그 부딪침이 강할수록 느낌도 배움도 강해집니다. 시선을 적극적으로 밖으로 돌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도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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