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나라에 바람개비 있다면…이처럼 위대할까
바람이 주인이 되는 곳이 있다. 지중해의 비경을 옮겨 놓았다는 거제도 '바람의 언덕'이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오르는 해안 절경이 일품이라는 제주도 섭지코지도 바람으로 유명하다.
바람의 결과 질(質)은 다르지만 대관령도 바람 명소의 반열에 놓기에 충분하다. 거제, 제주의 바람이 낭만, 서정 위주의 친화적 바람이라면 대관령의 바람은 눈보라가 날리는 '불편한 바람'이다. 취재진이 도착한 그날도 소매 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공중에선 거대한 풍력발전소들이 바람을 갈아대고(Grind) 있었다.
낭만기와 감성은 쏙 빠지고 혹한의 칼바람만 산객들을 울리는 평창 선자령(1,157m)을 다녀왔다.
◆전국 원정대 '남한의 지붕' 선자령으로
대구경북 근교에서 횡(橫)으로만 돌던 '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팀이 이번엔 멀리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원정대가 6번째로 찾은 곳은 강원도 평창 선자령. 행사 주관사인 밀레가 전국의 산꾼들에게 마지막 설산(雪山)을 선물하기 위한 이벤트였다.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우수(雨水)의 절기지만 원정대가 평창을 찾았던 날 수은주는 영하 7℃를 기록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대관령 표지석이 일행을 맞았다. 해발 832m에 위치한 대관령은 강원도를 영동과 영서로 나누는 분기점 역할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원' 조에 '대관령은 지대가 높고 서늘하여 겨울이면 눈이 두어 길 쌓였다가 다음해 3월에야 녹는다'고 적을 정도로 다설(多雪)지역이다. 습기를 머금은 해풍이 대관령 고원의 냉기류와 만나 기온을 떨어뜨리며 눈을 만들기 때문이다.
산상(山上) 고갯길에서 살짝 비켜서 높은 경사면으로 몸을 일으킨 산이 있다. 바로 오늘 목적지 선자령이다. 대관령 북쪽 고원에 넓은 평탄면을 펼쳐 '남한의 지붕'으로 불리기도 한다.
◆90m 날개 풍력발전기에 압도
산행 들머리는 '대관령 양떼 목장' 입구. 송전탑, 새봉을 거쳐 정상에 오른 후 원점으로 돌아오는 10.8㎞ 코스다.
초입 등산로는 눈 반, 진흙 반이다. 맹위를 떨치던 추위가 풀리면서 대지가 언 몸을 풀었기 때문이다.
중턱쯤 이르자 산은 눈길로 바뀌고 맹수 같은 바람이 온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 매서운 바람은 산객들의 대화마저 얼려 버렸다. 기념 촬영을 부탁하는 취재진의 요구에 엄 대장도 "추운데 서두릅시다"며 '사무 모드'로 바뀌어 있었다.
중턱에 이르면서 등산객의 침묵 모드는 환호로 바뀌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광각(廣角)으로 도열해 등산객들을 맞았기 때문이다. 아파트 30층 높이 기둥과 90m 날개가 돌면서 내뿜는 기계음은 압도적이었다.
대구 화원읍에서 온 김원자(53) 씨는 "거인나라에 바람개비가 있다면 바로 이 모습일 것"이라며 "발전기 회전날개가 돌 때마다 서걱서걱 바람을 베어내는 것 같다"며 감상을 말했다.
대관령, 선자령 일대에는 모두 50여 기의 풍력발전기가 있고 이 발전기로 연간 24만㎿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풍력발전은 바람에너지를 전기로 변환시키는 청정에너지지만 그 입지 조건이 무척 까다롭다. 발전(發電)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초속 4m 이상의 풍속이 필요하다고 한다.
◆강원지역 명산들 한눈에 펼쳐져
'바람에도 결이 있다'는 다소 황당한 의문도 설산에서는 상식이 된다. 경사면 바람 길엔 빗질을 해놓은 듯한 선명한 풍문(風紋)이 드리워져 있었다.
중간 기착지인 새봉(1,070m)에서 한숨을 돌린다. 이곳 바람이 너무 세서 새들도 쉬어간다는 봉우리다. 좁은 산길을 한참 오르니 거대한 선자령 정상석이 앞을 막아선다.
선자령은 백두산-설악산에서 뻗어온 백두대간이 숨을 고른 후 태백산-오대산으로 맥을 이어 주는 구간이다. 최고의 조망터를 확보한 덕에 백두대간의 준령과 강원지역 험산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북으로 오대산과 황병산이, 서쪽으로 계방산이 실루엣으로 펼쳐지고 남쪽으로 가리왕산, 고루포기산이 스카이라인을 그린다.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강릉시내와 오죽헌, 동해바다까지 시선에 들어온다고 한다.
◆오늘 칼바람 산행도 추억 속으로
이제 하산길이다. 바람도 더 거세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다. 히말라야 차가운 연봉에서 생사를 넘나든 엄 대장도 얼굴을 친친 동여매고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안나푸르나 등정 때였어요. 7,600m 고지서 셰르파가 갑자기 발을 헛디뎌 추락했습니다. 이 친구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로프를 잡았는데 그 줄이 제 다리를 감으면서 발목이 180도 꺾여 버린 겁니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 2박 3일을 기어서 4,000m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온 적이 있어요."
영하 30, 40도 히말라야 극한의 추위는 아니지만 일반인들에게 오늘 선자령 칼바람 산행은 겨울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작은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참가자들은 대관령휴게소에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다. 특히 11번째 휴먼스쿨 설립을 위해 네팔로 떠나는 엄 대장에게 장도(長途)의 인사를 나누느라 다들 분주하다.
"엄 대장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인사 끝말까지 바람개비가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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