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필리버스터의 굴욕

입력 2016-02-24 21:19:22

필리버스터란 의회 소수파가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의사 진행 발언을 중단 없이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 정치권은 여기에다 '무제한 토론'이란 말을 갖다 붙였지만 실은 '고의적 의사 진행 방해'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우리나라에서 필리버스터는 지난 2012년 '무제한 토론제'란 이름으로 부활했다. 말이 '토론'이지 사실 토론과는 거리가 멀다. 목적이 토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안 통과 저지에 있어서다. 필리버스터에 있어서는 말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길게 말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를 정치인의 능력으로 봤다. 그는 정치인과 말솜씨를 "2분 분량의 생각을 2시간 분량의 말로 희석시키는 예술"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정치인이 별로 알맹이 없는 허사를 늘어놓는 집단이라는 비아냥거림으로도 들리고, 말을 간결하게 하는 이상으로 길게 할 수 있는 것도 정치인의 능력이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역사적으로 필리버스터는 번번이 굴욕을 맛봤다.

정치적 의미에서 처음 사용됐던 1854년 시작부터 그랬다. 캔자스주와 네브래스카주를 신설하는 법안을 두고 민주당 의원이 법안 통과 저지를 위해 상원에서 5시간 30분 동안 연설을 이어갔지만 법안은 통과됐다. 인권법 통과 저지를 위해 1957년 스트롬 서먼드 의원은 24시간 8분이란 역사상 최장 연설 기록을 세웠지만 이때도 법안은 통과됐다.

최근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는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이 소위 '오바마 케어'로 불린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안을 두고 역대 최장 기록에 버금가는 21시간 19분 동안 쉬지 않고 발언했지만 이 법안 역시 만장일치로 의회를 통과했다. 심지어 크루즈 의원 자신도 찬성표를 던져야 하는 굴욕을 겪었다.

우리나라에선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3선 개헌을 막겠다며 10시간 15분 동안 연설한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이때도 법안은 통과됐다.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테러방지법' 반대를 위한 필리버스터에 나서 10시간 18분 동안 연설했다. 종전 기록을 3분 경신하고선 단상에서 내려왔다.

야당의 필리버스터 빌미가 된 테러방지법은 최초 발의된 지 15년째다. 그리고 이제야 '무제한 토론'이라며 진행되는 필리버스터는 그야말로 야당의 '의사 진행 방해'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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