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문학노트] 살아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은희경의 '빈처' ③

입력 2016-02-24 16:43:38

때때로 똥을 보고 놀랍니다. 저 흉측한 것이 내 몸에서 나왔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아내도 그렇습니다. 아내는 똥을 보면서 이제 막 궂고 수고로운 일을 마친 가족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똥은 아내의 구질구질한(?) 일상을 나타냅니다. 나아가 아내 스스로가 생각하는 아내 자신의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인식이 더러움이 아니라 엄연한 가족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이 은희경의 매력입니다. 결코 흥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족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미묘한 의사소통 방법을 제시합니다.

아들 녀석이 칭얼거린다. 아까 5분 넘게 벨을 눌러도 끄떡 않던 그녀의 잠은 아이의 뒤척이는 소리에 민감하게 깨어난다. 그녀는 황급히 아이 곁으로 다가가더니 이마 위에 물수건을 내려놓고 아이를 품에 끌어안는다. 그러고는 졸린 눈을 감은 채 아이의 뺨에 자기 뺨을 대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등을 토닥거린다. 그러나 잠이 덜 깬 탓에 등을 토닥이다가 뒤통수를 토닥이다가, 손놀림이 일정하지 않다. 그녀의 앉은 엉덩이께에는 약봉지며 체온계며 대야, 수건 같은 것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지금 아이를 안는 그녀의 동작이 몇 시간 동안이나 반복된 것임을 말해준다. 아이를 안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피곤에 절어 있다. 뒤로 묶은 머리가 머리핀 사이로 잔뜩 빠져나와 어수선하다. 나는 손에 펴들고 있던 그녀의 일기장을 가만히 덮어준다. 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은희경, '빈처' 부분)

아이의 뒤척이는 소리, 졸린 눈, 토닥이는 행위, 일정하지 않은 손놀림, 약봉지, 체온계, 대야, 수건, 피곤에 절은 얼굴, 머리핀 사이로 빠져나와 어수선한 머리, 그러한 일상을 은희경은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진지한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일상이란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똑같은 모양틀에서 얼려지는 얼음 조각과 같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엄숙합니다. 은희경은 그 엄숙함을 냉소 뒤에 숨긴 눈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냉정한 표현 속에서 은희경의 눈물을 읽습니다. 은희경이 소설이라는 양식으로 심은 희망의 씨앗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빈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남편들과 아내들에게 보내는 은희경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남편의 입장에서 이 글에 나오는 아내를 비판만 하거나 아니면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을 비난만 하는 것은 잘못된 소설 읽기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일상을, 남편은 아내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한다면 이 소설 읽기는 성공적입니다. 결국 소설 '빈처'는 소설 그 자체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의사소통 기능을 담당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남편과 아내가 있다면 이 소설이 실린 은희경의 작품집 '타인에게 말 걸기'를 아내에게, 또는 남편에게 선물하는 것이 어떨까요? 결국 남편과 아내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고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상이니까요.

단편집에 실린 다른 작품보다 이 작품에 더욱 끌린 것은 내가 바로 소설 속의 남편이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남편들의 풍경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내의 풍경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니체가 그랬나요? 삶을 하찮은 것으로,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깎아내리는 우울의 그늘을 걷어내고 자기 안에 있는 위대함을 끄집어내는 일, 그것은 일상 너머에 있는 무엇을 통해 시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그 일상을 응시하는 것, 그리고 그 응시를 마음 깊이 끌어안는 것, 거기에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길보다 위대한 길은 없으니까요. 현재 내 삶보다 의미 있는 삶은 없으니까요.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오래된 미래인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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