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護國)의 메아리<8·끝>-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입력 2016-02-24 16:48:37

12. 1'4 후퇴의 참경(慘景)

1'4 후퇴는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후퇴하여 붙여진 말이지만, 실제 아군의 주저항선 전지를 후퇴한 것은 1950년 12월 31일이었다. 그날은 1950년도를 마지막 보낸다는 마음에서 전선부대도 약간의 주류와 식료품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나도 파주군 적성면 주민들의 호의를 받아가며 감주와 단엿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한 해를 보내는 우리가 이렇게 소대별로 긴장과 허탈을 달래고 있을 때 조용했던 전선에 포성이 울렸다.

잠잠하던 적진에서 1분간 72발의 포탄을 쏘아 대는 것은 미리 준비해온 대전임에 틀림없었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포탄에 우리는 고개도 들 수 없었다. 포탄을 피하려고 고개를 호 속에 묻고 있을 때 무엇이 뒤에서 잡아당기는 듯하여 돌아보니 많은 중공군이 얼어붙은 임진강을 걸어서 건너와 우리를 생포하려 했다. 한두 사람의 중공군이면 격투라도 하겠지만 수천 명의 중공군이 몰려와 우리를 잡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손을 들고 나와 그들에게 끌려갔다.

진지를 벗어나 부락이 보이는 갈림길에 이르자 살아야겠다는 강한 집념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뒤에 따라오는 김창배와 김영철을 돌아보고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이냐? 나는 저 갈림길에서 반대편으로 도망갈 것이다"라고 했다. 다행히 우리를 끌고 가는 적은 한 명만 총이 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수류탄만 가진 채 총은 없었다. 다행스러운 기분으로 걸어갈 때 마침 적성면 구읍리 가까이에서 세 갈래의 갈림길이 보였다.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적이어서 우리가 도주하기 용이했다. 우리는 구읍리 앞 갈림길에서 일제히 동'남'서쪽으로 튀어 달아났다. 우리를 지키며 따라오던 적은 뭐라 소리만 지르고 총도 쏘지 않고 따라오지도 않았다.

우리 3인은 무작정 남쪽을 향해 달렸다. 남쪽에는 감악산이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대로는 이미 적군이 점령하여 갈 수 없고 오직 남쪽을 향해 가려면 675m의 감악산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려 산 밑에 이르니 입은 군복이 무거워서 겉옷을 벗어버리고 산을 올랐다. 후퇴하는 자들과 함께 산을 오르니 외롭지는 않았으나 낡은 군화를 신고 있는 나는 산을 오를 수가 없었다.

맨발로 빙판길을 걸어가니 발바닥은 통증을 넘어 감각마저 없어져 버렸다. 한길로 나온 우리는 빙판의 얼음길을 달려서 후방으로 철수했다. 대로를 꽉 메운 철수군은 소속과 계급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달렸다. 때때로 따발소총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앞뒤의 전우가 말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구호의 손길을 뻗질 못했다. 간혹 코밑을 스치며 날아가는 적탄은 짙은 화약 냄새를 남기기도 했다.

계곡은 생각보다 깊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5m 이상의 낭떠러지에 떨어져 1m 밑 절벽에 엉켜 있는 칡넝쿨에 걸려 있었다. 잡고 있던 소총은 어디로 달아나고 빈주먹만 쥔 채였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보니 다행히 1m 밑 강바닥이 발에 닿았다. 겨우 칡넝쿨을 벗어나 소총을 찾으니 2m 옆에 거꾸로 서 있었다. 천지가 내 것인 양 기뻤다. 그런데 총을 점검해 보니 장전된 실탄이 5발밖에 없었다. 4발은 대적하는 적의 공격용으로 쓰고, 나머지 1발은 마지막 나의 최후를 결정하는 자결용으로 쓰려 했다.

나와 같이 탈출한 김창배와 김영철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나는 이 사지를 벗어나야 한다는 강한 집념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골짜기에서 죽을 운명이 아니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서 나가겠지 하는 집념과 용기가 생겼다. 눈 꺼지는 소리와 날아오는 적탄을 무릅쓰고 골까지 오솔길과 냇물이 흐르는 물길을 따라 기어가다 서기를 반복하면서 산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때 무슨 소리가 났다. 무엇일까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 연대장의 지시에 따라 후방의 헌병들이 후퇴하는 병력을 저지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 냇물이 흐르는 골짜기에 내가 있는 것을 알 리 없었다. 위의 대로에 모인 병력을 향해 중공군의 기마병은 기관총을 쏘아가며 집합된 병력을 강타했다. 순간 사나운 기관총 소리와 함께 "적이다" 하며 와르르 후퇴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전세 회복이 어려워 일정 지역까지 후퇴해서 집결하기로 한 것 같았다. 나는 무조건 냇가만 따라서 남하했다. 적과 아군이 혼합하여 남쪽으로 후퇴하는 전황 속에 피아가 구분되지 않아 어떻게 내가 소속된 부대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생겼다. 냇가의 얼음 꺼지는 소리, 얼어붙은 눈 꺼지는 소리를 죽여 가며 남쪽을 향해 가고 있을 때 문득 눈앞에 대로 사이의 교량이 나타났다.

살짝 그 교량 밑까지 기어가서 다리 위를 지나는 병력의 대화 내용을 엿들어 보았다. "김 중사, 이 하사" 하는 말이 틀림없는 아군의 대화였다. 나도 살짝 다리 위로 올라가서 그들 속에 섞여서 달렸다. 양말도 바닥이 없어진 맨발이지만 생사기로의 위급한 상황 속에서는 통증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 마냥 귓전을 스치는 총소리를 들으며 도로를 달렸다. 여기서 낙오되면 살길이 없다는 신념으로 달리니 한편 걸음도 가벼운 듯했다. 주변의 오가는 말을 들으니 거기가 파평면의 웅담인 듯했다. 거기서 힘을 내어 대로를 달렸다. 이제는 적이 따라오지 않겠지 생각하며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어둠이 물러가고 새날이 밝아왔다.

주변은 점점 번화한 듯했고, 우리를 막고 한곳에 집결시키는 헌병들이 서 있었다. "소속이 어디야?" "1사단 12연대"라고 대답하니, "12연대는 저쪽으로" 하면서 12연대의 집결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헌병이 가리키는 장소로 가니 1대대 병사와 3중대의 장봉호 하사가 와 있었다. 나를 보더니 반가움에 못 이겨 나를 껴안으며 "너 살았구나, 다른 아이들은?" 하면서 울먹였다. 장 하사를 따라 어느 집에 들어가니 소대장과 선임하사가 나를 반기며 쫓아 나왔다. 나는 선임하사의 손을 잡고 쓰러진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를 지나 깨어보니 대대 의무실이었다. 몸을 움직이려 하니 아파서 움직일 수 없고, 발바닥은 벌겋게 피가 맺혀 있었다. 일어날 수도 없고 걷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곳의 휴식이 끝나자 2주간의 입실 허가를 받고 의무대에서 치료를 마치고 소대로 돌아왔다. 과반수의 병력을 잃고 후퇴하게 된 이곳 법원리에서 차량으로 서울 녹번동까지 후퇴하고, 그 이튿날 영등포의 노량진으로 이동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멀리 건너다보이는 서울의 하늘은 힘차 보이고 맑아 있었다. 노량진에서 좀 오래 있을까 했더니 곧 경기도 안성으로 이동하여 방어전에 들어갔다. 그렇게도 못살게 따라붙던 중공군도 서울까지 왔으나 안성에는 발길을 옮기지 않았다. 한파가 극심할 때 우리는 서울을 다시 찾고, 원진지를 회복하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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