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치코트에 성냥개비 문 주윤발…관객들 향수 '소환'
이미 여러 차례 국내 극장가에 재개봉됐고, 이후에도 P2P사이트 등 VOD 서비스로 재미를 톡톡히 봤다. 이후로도 꾸준히 케이블TV에서 방영됐으며, 소위 '추억'을 소재로 한 각종 콘텐츠에 단골 아이템으로 등장해 기성세대가 아니라고 해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쯤 되면 '지겹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최근 이 영화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하면서 또 한 번 이슈로 떠올랐다. 그리고 또 한 차례 재개봉되면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미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노출된 이 영화에 여전히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이 영화는 1980년대 홍콩 누아르 붐을 일으킨 '영웅본색'. '재탕'에 '재탕'을 거듭하고 관련 에피소드도 더 이상 끄집어낼 게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영웅본색'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특히 대한민국의 3040세대에게 '영웅본색'은 어떤 의미일까.
◆'영웅본색' 1, 2편 디지털 리마스터링
17일 재개봉된 '영웅본색' 1편은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이다. HD보다도 4배 높은 4K 고해상도로, 1986년 제작된 '영웅본색'의 개봉 3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현재 케이블 TV나 VOD 서비스를 통해 볼 수 있는 '영웅본색'의 '묵은 화질'과는 월등히 차별화되는 선명도다. 그 덕분에 젊은 시절 주윤발과 장국영의 얼굴을 말끔한 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애초 18일로 개봉일을 잡았다가 예상보다도 더 높은 팬들의 호응에 힘입어 17일로 하루 앞당겼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어 '영웅본색2'도 다음 달 3일 역시 깨끗하게 리마스터링된 버전으로 극장에 걸린다.
사실 '영웅본색'의 재개봉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2008년, 국내 상영 22주년을 맞아 스크린에 상영됐다. 2008년 첫 번째 재개봉은 서울 서대문역 인근의 드림시네마에서 이뤄졌는데, 마침 이 자리가 1986년 '영웅본색'을 국내 관객에게 처음 소개한 화양극장을 전신으로 만든 상영관이라 눈길을 끌었다. '그 시절 그 장소'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된 '영웅본색'은 이 영화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팬들 사이에서 꽤나 즐거운 이슈가 됐다. 극장 측은 극 중 주윤발처럼 트렌치코트에 선글라스, 쌍권총을 든 채 성냥개비까지 물고 온 관객에게 무료입장 혜택을 주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당시 재개봉 첫날은 홍콩 누아르에 연관된 추억을 가진 세대들이 대거 모여 성황을 이뤘다.
그 뒤로도 '영웅본색'은 몇 차례 더 '재개봉'이란 타이틀을 내세우며 극장에서 관객과 만났다. IPTV와 VOD 등 부가시장을 노린 상술이었고, 그래서 스크린도 제대로 확보하지 않은 채 형식적인 상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재개봉'이란 핑계로 홍보 효과를 누리려던 계획이었다. 재미있는 건 뻔한 노림수를 쓰는데도 반응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는 사실이다. 수시로 케이블 TV에서 '특집'이란 수식어를 걸고 '영웅본색'을 보여주곤 하는데, 그래도 한 차례 재개봉 운운하다 보면 꽤나 많은 기사가 쏟아지고 SNS 등을 통해 전파되며 새삼 화제가 됐다. 당연히 이 여파는 이후 VOD 시장에도 상당한 영향을 줬다.
영화 속에서 주윤발을 비롯해 주연급 캐릭터들은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용케 치명상을 입지 않고 잘도 뛰어다닌다. 물론,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들이 줄줄이 눈을 감지만 수십 명에 달하는 적을 상대하는 과정을 보면 불사신이 따로 없다. 어지간한 총상에는 끄떡없던 극 중 캐릭터처럼 '영웅본색'이란 영화도 30여 년의 세월을 건너뛰며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진한 맛과 냄새, 향수 자극 촉매 역할
'영웅본색'은 1986년 홍콩에서 제작돼 공개됐으며 한국에는 이듬해 개봉됐다. 그 당시만 해도 홍콩영화라고 하면 성룡과 홍금보-원표 등이 이끄는 코믹액션이 주를 이뤘는데, '영웅본색'은 시종일관 진지하고 어두운 톤에 국내 관객 사이에서 생소했던 배우들이 출연한 탓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통합전산망 구축 전이라 정확한 관객 수를 말하긴 어렵지만, 그 당시 극장 측의 집계에 따르면 서울 관객이 9만5천 명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흥행실패를 겨우 면하는 정도였다. 멀티플렉스가 없었던 그 당시에는 개봉관에서 상영되던 영화가 이후 재개봉관으로 넘어가 의외의 성과를 올리는 케이스도 있었다. '영웅본색'이 딱 그랬다. 오히려 재개봉관으로 내려간 뒤 입소문이 퍼졌고 비디오가 출시된 뒤에는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2편이 개봉될 때는 홍콩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신드롬급 팬덤이 형성된 상태였다. 개봉에 맞춰 주윤발과 오우삼 감독 등 영화의 주역들이 내한했다가 인산인해로 모여든 팬들로 인해 현장에서 일정이 전면 중단됐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영웅본색2'는 전편에 이어 화양극장과 명화극장 등 메이저가 아닌 2류 상영관으로 들어갔는데 그럼에도 서울에서만 26만 관객을 모으며 대성공을 거뒀다. 이 시절 기준으로 보면 상당한 스코어다. 두 편의 '영웅본색' 시리즈 이후 주윤발과 장국영 등 주연배우들은 중화권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이 영화로 인해 코믹, 또는 격투중심의 액션물이 대세였던 홍콩영화계의 흐름도 변했다. 수많은 누아르 영화가 봇물 터지듯 쉼 없이 제작됐고 평론가들은 세기말, 그리고 홍콩 반환 시점 등을 거론하며 홍콩 누아르 트렌드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국내 광고계에서도 주윤발과 장국영을 데려와 TV용 CF를 제작했다. 해외 스타를 국내 CF에 출연시키는 일이 드문 시절이었는데 주윤발의 밀키스, 그리고 장국영의 투유 초콜릿 광고가 크게 성공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이동휘(동룡 역)가 '영웅본색'과 관련해 "내가 이 영화를 4천720번이나 봤다"고 자랑하는 장면이 있다. 드라마의 시작과 끝, 그 외 장면에도 '영웅본색'이 등장했다. 극 중 인물들은 수없이 본 영화라고 말하면서도 틀어놓은 비디오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여줬다.
현재의 10대와 20대는 이해 못 할 풍경이겠지만, 이건 엄연한 실화다. 필자 역시 4천720번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웅본색' 1, 2편을 각각 30~40번 정도는 족히 본 듯하다. 2008년 '영웅본색'이 처음으로 재개봉되던 해에도 지인들과 극장을 찾아가 대형 스크린을 통해 주윤발의 허세 넘치는 표정과 몸짓을 보며 환호했다. 물론, 처음 이 영화를 접할 때 찾아왔던 소름 돋을 정도의 흥분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데군데 허점이 눈에 띄곤 했다. 그렇지만 성장기 남자 아이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든 그 영화 앞에서 빈틈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국영이 부른 '당연정'과 박진감 넘치는 메인 테마가 귓가를 때리고 '윤발이 형님'이 쌍권총을 들고 뛰어다니는데,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있을까.
추억이 남기는 여운의 농도는 그 종류에 따라 달라지는 법인데, 필자를 비롯한 3040세대에게 있어 '영웅본색'으로 인한 추억의 농도는 푹 끓여놓은 청국장의 맛과 냄새만큼이나 진하다. 중독성이 강해 다시 찾게 되고 몸에 짙게 배어들어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도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게 된다. 향수를 자극하는 강력한 촉매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도 80년대 중후반 대중문화사를 논할 때 '영웅본색'은 빠지지 않을 테고, 영화 자체에 대한 유사한 분석도 톤만 바뀐 상태에서 무한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영웅본색'을 대중문화사적 의미로 풀어내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질 게 뻔하다. 당연한 흐름이지만 그와 별도로 지금 대한민국 3040 관객이 이 식상한 영화에 또 한 번 시선을 주는 이유는 그때 느낀 맛과 냄새에 대한 강한 끌림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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