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한류열풍이 불면서 우리글인 한글도 외국인 사이에서 관심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수십 년 동안 우리말을 사용해 온 저로서는 바르게 말한다는 것이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 자연히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자주 하게 됩니다. 또 신자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한마디 말이 빌미가 되어 서로 오해를 하게 되고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우리말 전문가는 아니지만 오늘은 우리의 말 습관 하나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 중에 그 뜻을 따로 생각하면 그 의미를 알고는 있지만 막상 일상 대화 중에 무의식적으로 잘못 사용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틀리다'가 그중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면 "내 친구는 나하고 성격이 틀려"라든가, "난 너하고 생각이 틀려"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정답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틀려' 대신에 '달라'를 넣으면 문장은 정확해집니다. '다르다'를 '틀리다'로 틀리게 사용한 예문입니다.
굳이 사전적 정의를 내리지 않더라도 '틀리다'는 옳고 그름을 가릴 때 사용하는 단어이고, '다르다'는 이것과 저것 사이 혹은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를 비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릴 때 사용되어야 할 단어가 비교할 때 쓰이는 것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선택하는 잘못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화자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무엇이 연상되는 것이지요. 편견, 흑백논리, 우월감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연상을 하는 저 자신이 편견을 가졌을 수도 있겠지만, 특히 사람 사이에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부정적인 느낌부터 먼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비교해서 누군가 틀리다면 누군가는 옳아야 하고, 대부분의 경우에 그 옳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틀리다는 말 대신에 다르다를 사용하면 느낌부터가 달라집니다. 부정적인 느낌이 긍정으로 돌아서는 기분입니다. '다르다'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단어는 아마도 '인정함'이 될 것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대화의 시작입니다. 옳고 그름만을 따지는 '틀리다'의 세상이 획일화의 세상이요 흑백의 세상이라면, 다름을 받아들이는 '다르다'의 세상은 풍요로움과 조화로움의 세상일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방인 전도에 생애를 바쳤던 바오로 사도는 교회 구성원들 간의 일치를 촉구하면서 편지를 썼는데,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해 하나의 유기체로 설명했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바오로 사도가 코린토교회공동체에 쓴 편지 중에서 발췌)
바오로가 당시 교회 내에 갈등과 분열이 심했던 그리스의 코린토교회공동체에 쓴 편지이긴 하지만, 공동체를 사람의 몸에 비유한 이 편지 내용은 교회뿐만 아니라 인간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때로는 모험일 수도 있겠지만, '틀리다'고 말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또한 그 다름이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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