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김 새는 수사

입력 2016-02-03 00:01:00

1990년대 초 문민정부 때 이야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 뒤 가장 강조한 것은 토착 비리 세력 뿌리 뽑기였다. 청와대 초청 인사에게 서민 음식인 칼국수를 대접하면서 자신부터 검소하다고 무게를 잡았다. 그리고는 직접 "돈 받는 공무원은 엄단하겠다"고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검찰이었다. 어쨌든 갓 취임한 대통령의 명이니 최고의 사정(司正)기관으로서 빨리 움직여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공무원, 기자 등 갑질을 할 만한 위치의 직업군을 분류해 금액을 정해 놓고 구속'불구속 여부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통상적인 명절의 떡값은 얼마, 위세를 내세워 강압적으로 받은 것은 얼마라는 식이다. 후자의 경우, 20만원을 넘으면 구속 수사가 원칙이었다.

최우선 사정 대상자는 고위 공무원이었지만, 토착 비리자 명단까지 공공연하게 나돌아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검찰은 웬만한 규모의 건설'건축'토목 사업은 다 훑었고, 나중에는 늘 있는 건축법 위반 같은 것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대구'경북에서 잘 나가던 분들이 줄줄이 수성구 범어동의 대구지검 문턱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당시 수사 검사를 맥 빠지게 하는 것은 사표였다. 기업인이야 대개 망하지 않는 이상 언제라도 현직 대표이사나 회장, 사장이지만 공무원은 다르다. 특히 고위급 인사를 목표로 수사했는데 혐의 내용 확인이 길어지면서 중간에 덜컥 사표를 내버리면 속된 말로 김이 샌다. 현직이 곧바로 전(前)으로 바뀌어 버리니 때깔도 별로고 세간의 관심도 떨어진다.

방석호 아리랑TV 사장이 사표를 냈다. 초호화판 출장에다가 가족 동반 식사에도 법인 카드를 사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지 이틀 만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사의 표명 여부와 무관하게 조사하겠다면서도 재깍 수리했다. 아리랑TV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재단법인인 한국국제방송교류재단이 운영해 사장의 임명과 사표 수리가 형식적으로 문체부 권한이지만, 그의 생사 여탈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는 다 안다. 이를 감안하면 초초(超超) 스피드인 셈이다.

그러나 사표는 면죄부가 아니다. 방 전 사장의 비위 사실은 대충 드러난 것만 해도 업무상 출장에 가족 동반, 최고급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동반자 허위 기재, 최고급 렌터카 사용 등 금액으로 수천만원대에 이른다. 문체부가 뭘 제대로 조사하겠는가? 전(前)이어서 김은 새지만 검찰이 수사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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