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참여마당] 수필: 너무나 힘든 나의 인생

입력 2016-01-21 00:01:00

# 너무나 힘든 나의 인생

나는 1956년도 경남 밀양에서 아주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동네는 500가구가 넘고, 들판도 아주 넓어 볏논에 전염병이 들면 군에서 헬리콥터로 농약을 뿌리던 게 생각이 난다. 또 전기도 내가 5. 6세 때 들어온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가난하여 때가 되면 밥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도 있고 잘사는 집에 머슴살이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행히 우리는 머슴살이는 하지 않았다. 시골에 우리 재산이라야 한 뼘의 논과 오막살이 초가집이 전부였다. 그래서 먹고살려고 부모님은 남의 집 일을 하느라 항상 고된 삶의 연속이었다. 어린 나도 엄마의 등에 업혀 남의 논밭으로 일하러 다녔다. 그러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런 세월이 흐르다 보니 동생이 3명이나 생겼다. 모두 남동생으로, 그리고 막내는 쌍둥이로 태어났다. 내 나이 일곱 살 되던 해에 세 명의 동생이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게 되었다. 엄마가 밥을 저녁까지 지어 놓으면 동생들은 내가 챙겨 먹였다. 엄마가 지어 놓은 밥은 밥이 아니라 고구마라 해야 한다. 우리의 식사는 텃밭에서 뽑은 고구마와 보리쌀로 지은 것이다. 고구마로 밥을 지을 때는 고구마를 솥에 먼저 넣고 그 중간에 보리쌀을 담은 양푼을 넣고 아버지가 산에서 구해온 나무로 아궁이에 불을 때서 고구마와 보리쌀을 익혀 나누어 먹었다. 고구마 밥보다 싫은 게 있었는데 그것은 무를 넣어 만든 밥이다. 가끔 부모님이 부잣집에 일하러 가게 되면 저녁에 쌀밥을 조금 얻어 오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서로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으려고 싸울 때도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양이라도 쌀밥이 좋았다.

그러다 나는 한 해 늦은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내가 학교에 가고 나면 집에서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 쌍둥이 동생을 돌보게 되었다. 사실 나는 학교에 가서도 집에 있는 동생들 생각을 잊지 못했다. 그때 초등학교에서는 주먹만 한 강냉이 빵을 하루에 한 개씩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나는 그 빵을 먹을 수가 없었다. 집에 있는 동생들 생각에 집에 가지고 와서 동생들과 한쪽씩 잘라서 나누어 먹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힘든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소풍도 운동회도 싫었다. 소풍날은 도시락 밥과 반찬이 싫었고 운동회 때는 부모님이 남의 집 일을 하시느라 오시지 않으셔서 싫었다.

그러다 어느덧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학교 입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1956년생인 사람이 중학교를 못 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초등학교 졸업 후 다시 동생들을 돌보며 점심 저녁을 챙겨주게 되었다. 또 내가 할 일이 한 가지 더 늘었다. 그것은 산에 가서 땔감을 구해와야 했다.

17세 되는 해에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부산 친척집에서 생활하기로 했는데 친척집도 너무 가난하였다. 변두리 산비탈의 아주 작은 판잣집이었다. 그때 친척집에서 일자리를 소개하여 공장에 갔는데 내 나이가 한 살 적어 안 된다고 하여 나는 친척집의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의 등본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취직되어 처음에는 정말 즐거웠다. 그것도 잠깐 어린 나이에 부모님 생각, 집 생각에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래서 월급 타고 일요일이 되면 나는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집에 가면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동생들 과자도 사주고 하니 정말 좋았다.

그런데 고향에서 일요일은 왜 그리 빨리 지나가는지 정말 아쉽게 지나 또 객지로 갈 시간이 정말 싫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부산으로 가는 버스에 무거운 몸을 싣는다. 버스에 오르면 나는 항상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뒷자리 로 가면 우리 동네를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3년을 부산에서 보내고 고향 동네 사람의 소개로 대구로 오게 되어 3공단의 중소기업에 취직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즐겁게 회사 생활을 하는 중 친구를 사귀어 모임을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때 각자의 고향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방문 중에 다섯 명 모두 장남이란 걸 알았다. 그 후부터는 객지 생활도 익숙해졌다.

내 나이 25세 때 지금의 집사람을 만나 조금 사귀다가 동거 생활을 하기로 하고 사글셋방을 얻었는데 벽돌집이 아닌 블록집에 슬레이트 지붕이었다. 방에 누우면 하늘이 보였다. 천장은 종이로 붙여서 찢어지고 바람이 불면 펄럭이고 쥐도 다녔다. 겨울에는 연탄가스 방지를 위해 방에 물 한 대접을 준비하고 잤는데 아침이면 얼어 있었다. 나는 일어나면 바로 일터로 나가지만 집사람은 집에서 옛날 밍크 담요를 덮고 하루 종일 추위와 싸운 걸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하다.

1980년대 초반이라 모두 부엌 아궁이에 연탄을 사용하여 항상 연탄가스에 신경 써야 했다. 동거 첫해에 우리 집에 축복이 들어왔다. 집사람이 아기를 가진 것이다. 즐겁게 지낸 것도 잠시, 집사람이 임신 3개월 만에 연탄가스에 중독돼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조금 약하게 중독되어 정신을 차렸으나 집사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해 내가 안고 마당으로 나와 눕히고 조금 있으니 정신이 들어 주인집 김칫국물을 먹이니 정신이 돌아왔다. 그 시절에는 연탄가스 사고가 많아 흑백TV 뉴스에 항상 나왔다.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집사람의 배 속 3개월 된 우리 아기는 괜찮을까. 땅이 꺼질 듯했다. 우리는 병원 문도 열기 전에 가서 기다려 진료를 받고 아기는 이상이 없다고 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때의 부모 마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즐거운 날도 잠깐, 우리에게 또 문제가 생겼다. 집사람이 임신 6개월쯤 맹장염에 걸렸다는 진단이 나왔다. 임신 중에는 감기약도 먹으면 안 되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용기 내어 병원을 찾아 전문의사의 수술로 아기에게 무리 없이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 그 힘은 아내에게 있다는 걸 나는 아직도 잊지 않는다. 임신 중이라 항생제, 진통제도 쓰지 못하고 수술의 아픔을 오직 아내의 인내심으로 이겨냈다. 배 속 아기도 건강하게 자라고 우리는 아기가 태어나길 기다렸다.

얼마 후 우리의 희망이 건강하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공주였다. 우리도 행복할 때가 있나 싶게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공주가 태어난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시골에 있는 동생들을 데리고 가라고 부모님이 부탁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살고 있는 옆방의 세를 얻어서 동생들을 같이 데리고 살면서 직장도 구하여 다니게 하였다. 식구가 6명으로 늘어 집사람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사실 나는 집사람 얼굴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우리 공주가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 우리는 미루었던 결혼식을 대구에서 올리기로 하였다. 지금은 대구에서 밀양에 가려면 승용차로 쉽게 가지만 옛날에는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대구서 관광버스를 전세 내 친구 한 명을 태워서 시골 손님 모시러 보냈더니 모두들 좋아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날 그 예식장에서 식을 올린 신부 중에 내 아내가 제일 예뻤다는 소리가 들려 나는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마치고 시골 손님은 관광버스로 보내드리고 즐거운 하루가 지나고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근데 문제는 내 나이가 60살이 될 때까지 신혼여행을 가지 못하여 집사람이 서운함을 참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먹고살기에 너무 바빠 미련하게 일만 해온 내가 바보에 속할까.

또 세월이 흘러 둘째 아기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우리 아이들과 동생들 모두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우리에게 또 불행이 닥쳤다.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다고 하여 시골로 내려가니 아버지께서 위중하셔서 병원차를 이용해 대구로 모시고 왔는데, 의사가 이미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하여 다시 시골로 가던 도중에 운명하셨다. 그때 아버지의 연세는 환갑 지난 63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께서 대구로 오셨다. 어머니가 오셔서 동생들을 데리고 따로 살고 우리는 결혼 15년 만에 우리 가족들만 살게 되니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우리는 조금의 여유가 생겨서 3층 건물에 전세를 얻어 이사를 하였다. 그 집은 큰 방 두 개에 거실이 넓어 우리 가족 모두 좋아했다. 이 집에서 열심히 살다 2년 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배운 게 없어도 굴곡 없이 일만 해온 나와 알뜰한 집사람 덕분에 이 집은 우리 집이 되었다. 물론 아이들도 바르고 착하게 자라주었다.

왜 이럴까. 우리 집에 또 시련이 생기니 기가 찰 노릇이다. 둘째 동생이 이혼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문제는 동생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100일이 채 안 된 아이를 동생이 우리 집에 두고 떠나버려 우리가 키우게 되었다. 우리는 이게 도대체 무슨 팔자인지 하늘을 향해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나와 아내에 딸 한 명, 아들 둘 다섯 식구가 되어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우리에게 또 안 좋은 소식이 들렸다. 부산으로 간 막냇동생이 사고로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에 꼭 내가 못 거둔 죄인 같아 괴로웠다. 동생은 떠났지만 잊고 우리 모두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년 후 바람 잘 날 없는 우리 집에 또 문제가 생겼다.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치매 증상이 있어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게 되었다. 어머니를 모시다가 증상이 심해 요양병원으로 모셔 몇 개월 지났는데 우리 집에 오시고 싶어하셔서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다. 집에 오시고 8개월 계시다가 우리 집에서 돌아가셨다.(나는 치매와 중풍은 안 걸려야 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딸과 큰아들은 착하게 살면서 제때 결혼해 항상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제는 막내아들과 우리 부부 3명이 살게 되었다. 우리 막내도 별 탈 없이 자라 주어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딸과 큰아들도 막내를 삼촌 자식이라 생각 안 하고 친동생처럼 잘해주니 우리 막내는 당연히 친형제로 알고 자랐다. 그래서 우리는 막내 출생 사실을 비밀로 하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막내를 입학시키려면 서류가 필요한데 서류에는 우리 자식이 아닌 조카로 등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이에게 직접 주지 못하고 집사람이 매 학년 올라갈 때마다 학교에 직접 갖다 주었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집사람이 항상 선생님한테 직접 갖다 줘야만 했다. 이 사실을 막내가 알면 어떻게 될까 불안해서 형식적이라도 우리 호적에 올리려고 동생한테 이야기하니 이왕 형의 자식이니 형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런데 친모는 그것을 해주지 않았다. 막내의 정신적 혼란을 막으려 형식적이라도 하려고 했는데도 안 해주니 정말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언제 한 번이라도 보러 온 적도 없는데 왜 안 해주는지 참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 방법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막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아이한테 이야기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고3이 된 막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서 우리는 하고 싶으면 한 번 해보라고 했다. 막내는 일하는 게 재미있다며 열심히 한 달 정도 하였을까. 여기에서도 등본이 필요하다고 해서 막내한테 못 주고 집사람이 등본을 직접 가지고 가서 우리 사정 이야기를 전하면서 아이에게 직접 줄 수 없어 대신 가지고 왔다고 전했다.

집사람과 나는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방법을 내기로 했다. 그래서 2013년 11월 매일신문에서 매주 목요일 발간되는 주간매일 가족상담 면에 조언을 구해 봤는데 전문가의 말씀이 가정에서 친자식처럼 자랐고 착한 청소년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알아도 우리 품에 안기지 빗나가거나 나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는 답변을 받았다. 전문가의 조언도 들었지만 사실을 이야기할 용기가 안 나 하루하루 미루게 되었다.

다시 2014년 연말이 가까워 왔다. 올해가 지나면 대학생이 되고 군대도 가야 하니 이제 문제는 코앞에 닥쳐서 더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막내한테 사실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고 친부모는 제외시키고 우리 가족 모두 모인 가운데 정말 힘들게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막내에게 "우리 집에 네가 모르는 일이 있는데 오늘 우리 가족 있는 데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듣고 충격이 되겠지만 놀라지 말고 너한테는 엄마 아빠 누나 형이 있으니 믿어라 알겠지"라고 하니 막내는 알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근 20년 묵은 속이야기를 조용히 시작하였다. 사실 이야기를 하기 전에는 이야기 중간에 뛰쳐나가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끝까지 들어주어서 나는 놀랐다. 내가 이야기하던 중에 막내는 눈물만 줄줄 흘리더니 이야기가 끝나자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 가족 모두가 눈물바다가 되어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한참 있다가 막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나에게 잘해줬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냐. 생각도 못 했지만 엄마 아빠 신경 쓰지 말아. 난 변하는 거 없어"라고 말을 했다. 나는 정말 고마웠다. 키운 정이 이렇게 깊은 줄 미처 몰랐다.

그 다음 날 막내가 앞으로도 엄마 아빠한테 잘하겠다고 이야기하더라는 말을 집사람에게 들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그게 벌써 일 년이란 세월이 지난 일이다. 막내는 대학생이 되어 옛일을 잊고 열심히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 고맙다 막내야. 바르게 커 줘서.

이렇게 어려운 일이 해결되고 2015년 출발은 좋았다. 4월에는 친구 부부와 우리 부부가 마음 놓고 자유롭게 여행도 갔다 오고 6월에는 우리 가족 모두 외국여행도 즐겁게 다녀왔다.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데 그것도 전반기에 뚝. 후반기가 시작되자 내 생에 제일 큰 불행이 닥쳤다. 직장에 일하러 가서 기계 제작 중 크레인 로프가 끊어져 제작 중이던 기계가 철판 위에 넘어지면서 나의 오른쪽 손등을 덮쳐버렸다. 순간 나는 잠깐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상태가 심각했다. 손등과 손바닥이 맞붙어버리고 손가락만 멀쩡했다.

두꺼운 철판 위에 제작 중인 기계가 떨어졌으니 큰소리에 우리 직원은 물론 옆 공장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그 와중에 나와 같이 일하던 동료는 손을 덮친 기계를 들어 올리려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내가 동료한테 서두른다고 달라질 게 없으니 천천히 하라고 했다. 그러던 중 기계가 들려 내 손이 빠져나왔다. 그런데 크게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순간 내 머리에 나의 인생사가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는 중 오른손에 피를 많이 흘려서 왼손으로 팔목을 움켜잡으니 오른손이 덜렁덜렁 흔들렸다. 내 옆으로 모인 직원들은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 고함을 질렀다. "내가 무슨 죄가 있나. 나는 아직 일을 해야 되는데."

정문 앞에서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데 구급차가 왔다. 구급차는 왜 그리 늦게 오는지 짜증이 났다. 구급차가 온 후 내가 얼른 차에 타니까 동료와 경리도 같이 타고 출발하니 구급대원이 이 환자는 손을 전문으로 보는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또 하늘이 깜깜했다. 내가 사고 난 공장에서 그 병원까지는 낮에도 40분 이상 걸리는 길인데 퇴근 시간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지루하게 달려 병원에 도착한 후 응급실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나를 보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

병원에서는 수술 준비가 되고 있었다. 병원의 수술 담당자가 이야기하기를 손목 절단이 맞을 거 같은데 봉합 수술도 해볼 만하다고 하였다. 나도 당연히 봉합을 원하며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수술을 시작하여 다섯 시간이 걸려 1차 수술을 마쳤다. 수술이 끝나고 나오니 가족과 동료, 사장님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 2차 수술을 3시간 걸려 했다. 나는 중환자실로 들어와 내 손가락에 피가 돌기를 기다리며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손가락이 살아나지 않으면 병원장에게 몇% 성공 가능성을 가지고 수술을 했냐고, 혹시 병원의 장사가 아니냐고 따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2주 후 손가락이 살아나지 않아 결국 손목절단 수술을 또 하게 되었다. 절단 수술 후 수술실 밖으로 나와 기다리는 가족과 나는 펑펑 울었다. 사실 수술실에서도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나는 정말 맨손으로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너무 서러웠다. 나는 병실까지 울면서 왔다. 병실의 다른 사람에게 창피한 줄도 몰랐다.

병실로 오고부터는 병문안을 모두 거절했다. 도저히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줄 용기가 나질 않았다. 병문안 오신 분들은 휴게실에서 집사람만 보고 갔다. 그리고 근 2개월 만에 퇴원을 하여 통원치료를 하고 있다. 이제는 내가 힘을 내야 한다고 마음으로 노력 중이다. 병원장에게 따지려고 한 것도 잊기로 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권하는 정신과병원도 다니고 근로복지공단에서 권하는 심리상담도 받고 멘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열심히 통원 치료를 했다. 손목 부위 두 군데에 신경이 자라 볼록하게 나와 아파서 팔목뼈에 구멍 뚫어 신경을 넣는 수술을 하기 위해 또 일주일을 입원해서 수술을 하였다.

신경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 중 우리 집안에 또 안 좋은 일이 생겼다. 우리 큰아들이 결혼 3년이 지났는데 아기가 없어 늘 서운함이 떠나지 않았는데 내가 이렇게 병원에 입원해 있는 때에 이혼을 한다고 한다. 참 기가 막히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어쩌랴.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둘의 일이니 알아서 하라고 하였고 아들은 아직 젊고 건강하니까 앞으로 좋은 사람 만나 새 출발하길 바란다.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인생사에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간다. 하지만 어쩌랴. 내 마음도 챙겨야지. 나는 평생 가는 고통과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니 정신적인 고통이 거짓말이라고 하겠나. 아직도 언제까지 갈지 모르는 통원치료를 빠짐없이 받으며 정신과 약도 먹는다. 내 옆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집사람이 있어 늘 고맙고 사랑한다. 사랑하는 집사람을 위해서라도 내가 웃는 얼굴로 힘을 내야지.(사실 더 낼 힘도 없지만)

내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낸 것은 집사람을 잘 만난 덕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에게 행복한 날만 연속되길 빌며 사랑한다. 마누라.

최동식(대구 북구 노원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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