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도 체면 구기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 먼 옛날 일도 아니면서 이미 멀고 먼 옛날 일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체면이나 그 사촌뻘 되는 염치는 보편적 생활신조나 다름없었다. 서로 돈을 내겠노라 계산대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모습. 박봉의 월급쟁이 주머니 사정이야 빠듯하기 피차일반일 텐데, 누구 할 것 없이 앞다투어 값을 치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실랑이가 다반사로 벌어졌다.
오랜만에 찾아오신 친인척 어른이 귀엽다 하시며 찔러주신 용돈도 버릇 나빠진다며 극구 사양하던 야속한 어머니. 몇 차례 주거니 받거니, 귀신도 모르게 구겨 넣고 달아나신 후에야 못 이긴 척 슬그머니 챙길 수 있었던 고작 몇 푼의 용돈. 적어도 남의 호의를 당연한 듯 덥석 받아먹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적도 있었다.
지나치게 차린 체면과 겉치레의 속 빈 강정도 틀림없는 문제지만,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파렴치가 활개를 친다면 이미 손을 쓰기엔 너무 늦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편협한 시각에 입에는 독을 품고 모든 것을 왜곡할 줄밖에 모르는 정신적 미숙이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는 장님이나 다름없고 남 탓으로 돌리는 데는 그렇게 명석할 수가 없다. 손톱에 낀 때보다도 못한 이익을 챙기려 양심이나 체면은 팔아먹은 지 오래다. 지켜야 할 명예도 없고, 명예를 지켜야 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묵은해와 새해의 길목에서 반성과 자숙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하는지 거리의 분위기는 차분하다 못해 침울하기 그지없다. 철없는 젊은이들만 들뜬 기분으로 거리를 배회할 뿐이다. 끌어주는 '어른'이 없으니 아이들은 방황할 수밖에 없다. 어른이 어른 노릇을 제대로 못 하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따끔하게 야단을 치기는커녕 어설프게 가르치려다 오히려 봉변을 당하기 일쑤다.
언제까지 팔짱만 낀 채 모든 잘못을 세상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지킬 만한 의리도, 지켜 주고 싶은 자존심도 없는 이 시절, 스스로의 생각을 비좁은 골방에 가두어두고 잘잘못을 따져봐야 본질은 간데없고 껍질뿐인 말싸움만 오갈 뿐이니,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기반성이다.
원래 자극은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슬픔이 닥치면 마음이 무너질 듯 쓰라린 것이 당연하고, 기쁜 일이 생기면 온 세상이 모두 제 것이라도 된 양 가슴이 뛴다. 병든 마음은 자극에 이상할 정도로 무디거나 지나칠 정도로 과민하게 반응을 한다.
성숙한 인격의 사람들에게 쓴소리는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반면, 동일한 자극은 미숙한 인격의 소유자들에게 화병만 일으킬 뿐이다. 전 인류의 평화를 위해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 그 평화가 이 땅에 싹트기 위해서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인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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