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 문경새재

입력 2015-12-22 01:00:08

조선시대 영남·기호 선비들 학맥 잇던 '화합 새재'

"조선시대 문경새재는 영남과 한양을 이어주던 인적, 물적 통로였습니다. 그 소통과 화합의 길을 '엄홍길 원정대'와 함께 걷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 엄 대장과 등산객들이 산행에 앞서 주흘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비슬산에서 신불산까지 산과 봉(峰)을 오르내리던 '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가 이번엔 고도를 낮추었다. 18일 원정대가 찾은 곳은 문경새재. 경부고속도로(428㎞)가 생기기 전 조령은 영남과 서울을 연결하는 최단거리(380㎞)였다. 조선시대 낙동강으로 몰려든 영남지방의 화물이 충주-한강을 거쳐 서울로 넘어가는 수운과 교통의 길목이었다.

근대화 과정 속에서 새재는 이화령, 죽령에 교통과 물류의 기능을 모두 넘겨버리고 역사, 관광, 레저 같은 문화공간으로 특화되었다. 삼국시대부터 민족의 정한이 서린 역사 현장을 보전해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작용하면서 개발을 막아낸 것이다. 영남지역 역사, 인문학의 보고로 떠오르고 있는 문경새재를 엄 대장과 함께 걸었다.

◆대구 산악인 박무택 비극 그린 '히말라야'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려 새재로 가는 길, 길옆 봉우리엔 제법 눈이 쌓였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주차장에 이르렀다. 벌써 4회를 맞은 엄홍길 원정대에 오늘도 전국에서 30여 대의 버스가 주차장을 메웠다.

엄 대장과 산행을 시작하며 조심스럽게 16일 개봉한 영화 '히말라야'로 말문을 열었다.

"아! 무택이…." 그의 첫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계명대 산악부 출신 고 박무택은 엄 대장과 히말라야 4좌를 함께 올랐던 산우이자 동지였다. 같은 날 각자 다른 코스에서 산행을 하다 비보를 접한 엄 대장은 큰 충격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무택이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습니다. 말수는 적었지만 위험한 등정길엔 늘 맨 앞에 섰죠. 칸첸중가 등정 땐 정상 100m를 앞두고 빙벽에 매달려 목숨을 건 비박을 했습니다. 영하 40℃ 눈보라 속에서 서로 이름을 불러가며 잠을 깨웠어요."

사선(死線)을 함께 넘은 동지였기에 에베레스트 빙벽 로프에 달린 채 잠들어 있는 '동생'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산악 역사 최초로 '등정'이 목표가 아닌 '사람'이 목적인 휴먼원정대가 꾸며졌고 이 모든 과정이 영화에 담기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 잇던 통로

부산에서 한강 뱃길로 통하는 최단거리였던 새재. 조선시대 조령은 인적, 물적 유통의 대동맥이었다. 등짐을 진 보부상들과 진상품을 실은 우마차들이 넘던 물산 통로였고 영남과 기호(畿湖) 선비들이 학맥을 잇던 지적(知的) 통로이기도 했다.

'소통과 화합의 새재'를 떠올리면 이번 밀레와 함께하는 16좌 산행도 그 취지에 근접한 듯하다. 오늘 산행을 위해 호남, 충청, 대구경북 등 전국에서 산객들이 모여들었으니 말이다.

첫 관문 주흘문을 나선다. 앞을 막아서는 바람이 무척 차다. 올 들어 가장 낮은 수은주를 기록한 탓이다.

제일 먼저 오른쪽으로 길에 늘어선 선정비(善政碑)가 눈에 띈다. 선정비는 지방관 퇴임 후에 지역 주민들이 선덕(善德)을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비들의 상당수가 삼정(三政)이 문란했던 조선 후기에 세워져 순수성을 의심받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낯 내기, 이름 내기 좋아하는 것은 위선자들의 몫이었으니….

찜찜한 마음으로 비림(碑林)을 지나쳐 오는데 계곡 건너에서 낯선 풍경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턱수염에 대감 복장을 한 남성이 패딩을 입고 뜰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 모호한 시차(時差)의 원인은 바로 세트장이었다. 지금 문경세트장에선 '장사의 신'과 '장영실'(내년 1월 방영)을 찍고 있다. 촬영이 한창일 때는 이덕화, 장혁 씨도 눈에 띄고 운이 좋으면 식당에서 인증샷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교귀정'조령원 터'산불됴심비 이어져

옛날 참기름 공장을 연상케 하는 '지름틀 바우'를 지나치니 오른쪽으로 조령원 터가 나타난다. 원(院)은 조선시대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나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이다. 조령원은 영남과 한양을 오가던 아전, 상인들의 여독을 달래주던 일종의 국립호텔 같은 것이었다.

흙길을 거슬러 오르면 신구(新舊) 관찰사가 관인(官印) 인수인계를 했다는 교귀정이 나온다. 이 건물은 1999년 사료를 근거로 복원되었고 교인처 유적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교귀정 바로 위쪽에 있는 '산불됴심비'도 재미있다. 우리나라 공익 캠페인의 효시로 평가받는 이 비는 전국에서도 그 사례가 드물다. 서민들이 알기 쉽도록 비를 세웠으니 '눈높이 행정'의 표본이고 자연보호, 환경운동의 지표이기도 하다.

제2관문인 조곡관을 나와 동화원터를 지나면 오늘 산행의 종점인 제3관문이 나온다. 이곳을 넘어 북진(北進)하면 괴산, 충주를 거쳐 남한강 수계에 닿는다.

이제 조령관문을 찍고 하산 길로 들어선다. 내리막길로 바뀌면서 보행이 한결 수월해졌다.

하산 길에 엄 대장이 '마운틴TV'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16일 개봉한 영화 '히말라야'와 박무택과 관련된 얘기였다.

혈육과 같은 후배를 히말라야에 걸어둔 채 살아야만 했던 세월이 무척 죄스러웠다고 말했다. 빙벽에서 떨고 있을 '무택'이 생각에 단 한 번도 '춥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고 한다. 인터뷰 후 엄 대장은 대구 독자들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박무택은 대구가 낳은 훌륭한 산악인입니다. 영화 안 봐도 좋으니 여러분들이 그 프라이드만큼은 꼭 지켜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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