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필경의 에세이 산책] 고봉과 퇴계의 격조 있는 논쟁

입력 2015-12-22 01:00:08

1559년, 고봉 기대승은 당대 최고 학자인 퇴계 이황이 무심코 던진 철학명제에 대담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퇴계는 자신이 편 논리에 허점이있었다는 점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근본 의미에 대한 논조를 설파하는 화답을 보냈다. 이 논쟁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무려 8년간 계속됐다. 교통이 불편한 당시에 호남의 고봉과 영남의 퇴계를 오간 편지 논쟁은 그리 쉽지 않았다. 서로 의견을 굽히지 않아 토론은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논쟁 시작 당시고봉은 막 과거에 급제한 22세의 애송이였고, 퇴계는 그보다 26세 연상이며 당시 대학 총장인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거물이었다. 그 거물이 재기 넘치는 애송이의 사려 깊은 지적을받아들여 논리를 수정하고 발전시킨 것이 바로 '사단칠정론'이다. 이것은우리나라 사상사에서 가장 뛰어남은 물론, 동아시아를 지배한 주자학이라는 유교 이념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로 예의를 갖추고 호소력을 지녔던 이 논쟁은 그 결과보다논쟁하는 방식과 태도에 더 많은 교훈이 있었다.

1175년 아호사(鵝湖寺)에서 있었던 중국 최대의 유학자 주희와 육상산의 역사적 논쟁보다 고봉과 퇴계가 논쟁했던 문답의 질과 진지하면서도 개방적인 마음 자세의 교환이야말로 비교가 불가능하게 뛰어났다고 중국 철학계의 거장 뚜웨이밍이 평가했다.

우리는 논쟁(論爭)을 '말싸움'이라는 언쟁(言爭)으로 비하하는 경우가 많다. '논'이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 아니라 이성적 근거로 무장한 견해를 뜻한다. '자유론' '인간오성론'에서 '논'처럼 논리적 생각의 결과물이다. 이성적 근거와 치열함 없이 그 나름 생각을 배설하듯 마구 뱉으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습성은 좌우를 불문하고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악습이다.

논쟁의 진정한 의미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한다는 데있다. 문제점을 과감히 찾아내려는 용기와 능력이 없는 사람은 논쟁을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논쟁이 있는가? 우리 국회는 논쟁 기관인가, 언쟁 기관인가?

이는 오직 시험에만 매달려온 교육과 일제 잔재와 군부 독재에 얼룩진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탓에, 진실을 찾아내고 사실을 밝히는 것을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풍조 때문이 아닐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단어들을 가슴과 등에 붙이고 거리에서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광신집단, 공산주의에 대해 '수령님 만세' 아니면 '악랄한 반공'만을 외치는 집단, 무상급식 같은 조그만 평등에도 색깔론을 제기하거나 북한 체제를 조금만 비판해도 미 제국주의 앞잡이로 모는 집단, 이런 과장과 광신의 극단적인 집단에 결코 논쟁을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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