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의 공존 포항 히스토리텔링] <8>새마을과 인물의 고장 기계면, 흥해 사방공원

입력 2015-12-21 01:00:07

봉황 전설 봉좌산 품은 기계면, 새마을 운동을 잉태하다

흥해사방기념공원 야외 전시장에 당시 사방사업을 재현해 놓고 있다.
흥해사방기념공원 야외 전시장에 당시 사방사업을 재현해 놓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성리 마을 시찰에 홍선표(가운데 흰색 셔츠) 이장이 동행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성리 마을 시찰에 홍선표(가운데 흰색 셔츠) 이장이 동행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시찰 시 타고 다녔던 지프차가 전시돼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시찰 시 타고 다녔던 지프차가 전시돼 있다.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에 세워진 포항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에 세워진 포항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

고려시대 삼사의 하나로 정일품 벼슬에 해당하는 태사(太師) 3명의 묘소가 있는 마을이 바로 포항 북구 기계면이다. 봉황이 내려앉았다는 봉좌산 자락에 있는 봉좌마을을 비롯해 곳곳에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한다.

특히 봉좌산의 '세계 농촌의 모범마을이 되기 위한 철든 농부가 된다'인데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새마을운동 발상지, 문성리

1970년대 가난에 허덕이던 우리 국민에게 풍요와 희망을 안겨 주었던 '새마을운동'이 처음 시작된 새마을운동 발상지가 이곳 문성리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4월 22일 유시를 통해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고 '알뜰한 마을 만들기'라 해도 좋지만 농민'관계기관 지도요원 간의 협조를 전제로 한 농촌 자조 노력의 진작방안을 연구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1970년 10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해 전국 모든 마을에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시작됐다.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성리는 자조'자립'협동정신을 바탕으로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주민 모두가 합심해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엄청난 결과를 이뤄냄으로써 1971년 9월 17일 박 대통령이 "전국 시장군수는 문성리와 같은 새마을을 만들라"면서 "자조'자립'협동정신이 곧 새마을 정신이다"고 했다.

오늘날 새마을운동은 이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교훈을 바탕으로 1972년부터 명실상부한 국민운동으로 개념을 확고히 했으므로 문성리가 공식적인 새마을운동의 발상지가 됐고 그 상징으로 1970년부터 이미 새마을발상지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

문성리는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이자 새마을운동의 성지다. 또 새마을 정신은 근대 한국인의 대표 정신이며 새마을 사업은 지구촌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성공한 사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같은 대한민국 발전사에 한 획을 그은 새마을운동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외국의 사절단이 새마을 정신을 본받고 새마을 사업의 추진 사례를 배우고자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국내에서도 제2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포항시는 새마을 정신을 후세에게 생생하게 전해주기 위해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을 건립해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 2009년 9월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이 문을 연 이후 지난해까지 내국인 19만여 명, 외국인 6천여 명이 다녀갈 정도로 새마을운동의 메카로 자리 잡고 있다.

◆홍선표 이장과 박 대통령 지프

기계면 문성리에는 새마을운동의 산증인이 있었다. 바로 지난 6월 향년 87세로 타계한 홍선표 이장이다.

홍 이장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문성리 이장을 역임하던 중 정부에서 시행하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지원받은 시멘트 335포(당시 가격으로 10만원 정도)를 시작으로 문성부락(문성마을)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당시 영일군 새마을담당 정환성 씨와 힘을 모아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을 주민들을 변화시켜 잘 살아보자는 의지로 지붕을 개량하고 마을 안길을 넓히는 등 새마을운동의 모범사례를 만들어 1971년 8월 문성리의 기적을 청와대 실사단이 확인하고, 그해 9월 17일 영일군 기계면 문성리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게 된다.

이때 홍 이장은 마을 순시에 나선 대통령의 안내를 맡게 되고, 눈부신 변화를 이룩한 문성마을의 새마을 가꾸기 사업의 성공사례를 본 박 대통령은 "전국 시장 군수는 문성마을과 같이 새마을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처럼 홍 이장은 새마을운동의 선구자이며 산증인이었다.

평생 문성리 마을을 지키면서 문성리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임을 자부하며 그 정신을 이어가고자 증언했으며 뛰어난 리더십으로 문성리 마을 주민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1971년 8월 5일 새마을운동 관련 국민포장을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직접 전수받았으며, 1980년 12월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홍 이장에게 격려문을 직접 발송해 업적을 격려한 바 있다.

포항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에 가면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타고 다녔던 국내 유일의 '지프차'를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970년대 풀뿌리로 연명하던 농촌의 열악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당시 박 대통령은 한창 새마을운동이 펼쳐지던 기계면 문성리 등 승용차가 다니지 못하던 산길과 산림녹화사업 현장 등 전국의 외진 소로길을 다닐 때 이 지프차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 지프차는 박 대통령이 1970년대 농촌 새마을운동 시찰용으로 사용한 방송차량으로 대한민국 경제 재건 운동의 상징물이며, 차종은 1974년에 제작된 일본 '스즈키 미니 지프'로 2인승이다.

이 지프차 앞에는 운전기사가 운전대를 잡고 운전석 바로 옆에 박 대통령이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 지프차는 지난해 6월 육영재단 한 관계자가 새마을운동발상지인 문성리를 둘러본 뒤 이곳이 타 자치단체의 새마을기념관과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다고 판단, 당시 취임을 앞둔 이강덕 포항시장에게 기증할 뜻을 밝혔다는 것.

이에 이강덕 시장과 포항시는 이 같은 육영재단의 숭고한 뜻을 감사히 받아들여 지난해 7월 이곳에 지프차를 전시하게 됐다.

박 대통령의 지프가 포항에 있다는 입소문이 전국적으로 나돌면서 포항새마을기념관을 찾는 발길도 크게 늘어나면서 전시관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흥해 사방기념공원

시방기념공원은 한국 사방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07년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 황폐지 복구의 대표적 성공사례인 흥해읍 오도리에 위치한 사방기념공원은 1971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해 "이곳은 국제항로의 관문이며, 영일지구의 한'수해 원인이 되므로 근본대책을 세워 완전 복구해 버려진 땅을 되찾도록 하라"는 지시로 본격적인 영일지역 사방사업이 시작됐다. 이 사업은 새마을운동의 한 사례로도 꼽힌다.

특히 1975년 4월 17일 오도리 현장순시 때는 영일지구가 왜 이렇게 헐벗게 되었는지를 물어보았고, 이곳이 지질이 매우 척박한 이암(떡돌)지대이며 심한 해풍 때문에 수목 생육이 불량하다는 말을 듣고는 "나무가 잘 자라는 곳도 있으니 골을 깊이 파고 객토를 많이 넣어서 토질에 알맞은 나무를 밀식하고 풀씨도 뿌려서 잘 가꾸도록 하라"고 했다.

영일지구 황폐지 복구는 1973~1977년(5년간) 4천538㏊에 달하는 면적에 연인원 360만 명이 투입돼 단기간에 녹화사업이 마무리돼 오늘날 사방기술의 우수성과 포항을 알리는 홍보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사방기념공원은 1960'70년대 보릿고개 시절에 춘궁기를 넘기기 위해 사방사업에 종사하며 국토 녹화에 이바지한 사방기술인의 혼과 땀이 깃든 자료를 한곳에 모아 전시한 실내전시실과, 사방사업에 필요한 각종 사업종류를 기념관 뒤편 야산에 실제 시공을 해 산림복구기술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실제 황폐지 복구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복구기술인의 형상을 본떠 현지에 전시함으로써 마치 현재 작업이 진행 중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게 전시기법을 구성한 점이 특징이다.

사방공원은 관광객은 물론 국내외 임업관련 학계, 공무원, 단체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는데 지금까지 일본, 중국, 몽골, 인도네시아 등 16개국 500여 명이 다녀갔으며 누적 방문객은 50여만 명이 넘는다.

◆고려 3태사(太師) 묘소…명당마을 기계면

고려시대 3사의 하나로 정일품 벼슬에 해당하는 태사(太師) 3명의 묘소가 있는 명당 마을이 바로 포항 기계면이다. 3태사는 윤신달, 신몽삼, 유삼재를 일컫는다.

파평 윤씨의 시조인 윤태사 윤신달(尹辛達'893~973)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가 남달리 뛰어났고, 장성해서는 고려 태조 왕건의 막료가 돼 고려의 건국과 국가기반을 다지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윤신달과 관련한 재미난 전설도 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파평산 기슭에 용연이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용연에 구름과 안개가 서리면서 천둥과 번개가 쳤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 지 사흘째 되던 날 윤온이라는 할머니가 연못 한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을 보고 건져서 열어보니 한 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채 속에 누워 있었다. 그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있었으며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할머니는 이 아이를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 윤씨가 됐다고 한다.

윤신달은 동료인 신숭겸, 홍유 등과 더불어 918년 궁예를 축출하고 새로운 왕으로 왕건을 추대했다. 왕건의 고려 건국에 대한 공로로 2등 공신에 책훈돼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직이 내려졌다. 윤신달의 묘지는 기계면 봉계리에 있다.

신태사 신몽삼은 영산(靈山) 신씨 시조인 신경의 증손이다. 신몽삼은 고려 의종 때(1166) 중국에서 태어나 명종 때 과거에 급제,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으며 고려태사 영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918년에 기계면 화봉리에서 묘지석이 발견돼 후손들이 화봉재사(禾峰齋舍)를 건립해 위덕을 기리고 있다.

유태사 유삼재는 기계 유씨(杞溪 兪氏)의 시조로 신라시대에 진골이 아닌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 벼슬을 지냈다. 신라가 쇠하고 그의 후손 유의신이 고려에 불복하자 태조 왕건이 그를 기계 호장으로 삼았다. 이후 그 후손들은 기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선조의 덕을 추모하고 후손의 번창함을 기원하는 기계 유씨의 성역으로 부운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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