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2월 15일 마침내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에게 체포된 지 1년 반 만이었다. 그는 나치 친위대 장교로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을 체포해 고문, 강제 이주, 살육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1942년 반제 회의에도 참석, 유대인 절멸을 의미하는 '최종 해결책'을 결정한 멤버 중 한 명이다.
세계가 주목한 이 재판은 독일인 변호사의 문제 제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납치는 국제법 위반이고, 전범 처벌을 위해 1950년 제정된 법은 사후 입법이기 때문에 형벌불소급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이었다. 아이히만도 "나는 전 생애를 칸트의 실천이성에 따라 살아왔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나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서 작은 일밖에 하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1962년 5월 29일 대법원이 사형을 확정함에 따라, 이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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