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병원<2>-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입력 2015-12-18 02:00:01

지하철 참사 부상자 장비·의료진 부족 다른 병원으로 이송 "어찌나 부끄럽던지…"

※삽화:이영철 화가
※삽화:이영철 화가

그 위 군은 나중에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계명의대 의공학부 교수로 취업이 되었다. 그가 추천사를 부탁했을 때 나는 당당하게 신일희 총장님께 이 인물을 만난 것은 총장님의 복이라고 썼다. 당시 봉사하던 사람들이 취업을 할 때는 자주 추천서를 써달라고 왔다. 이런 시간이 정말 기분이 좋았다. 좋은 인재를 뽑게 되는 그 직장도 행운이고 또 그런 훌륭한 인재를 추천하는 나 자신도 행운아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인들의 통역은 그 나라 출신인 샤이드가 해주었고 나머지 나라는 영어로 통역을 했다. 영어 통역은 계명대 영어과 이경희 교수가 담당해 주었는데 항상 제자들과 함께 와서 봉사를 해주었다.

병원의 직원들도 조를 짜서 나왔는데 약제실, 주사실, 심전도, 방사선, 임상병리, 그리고 물리치료 등의 일을 했다. 이 사람들은 정말 봉사의 의지가 있었는지 몰라도 내가 지시를 해서 일요일에 병원에 출근하게 되었으므로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후일 세월이 가면 일요 진료봉사가 자신들의 인격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애써 자위해본다.

나의 목표는 의료봉사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외국인 근로자들이 우리 병원에 온 김에 밥도 먹고 마당에서 놀다 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을 통해 서로서로 이국의 외로움을 달래고 우리 문화와 그들의 문화도 함께 체험하게 만들어 주자는 것이었다. 모임이 커지고 괘도에 올라가자 사업 철학을 옳게 세우고 일의 효율성을 위해 회장직을 만들었다. 목사님 대표와 학생들 대표 둘을 공동대표로 정했다. 이렇게 조직까지 정비되어 본격적인 진료가 되던 중 어느 날부터 환자들과 방문객 수가 서서히 줄어들고 대표되는 목사님이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서너 분씩 오던 목사님들이 어떤 때는 아예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어느 날 학생들이 내게 하소연을 했다. 환자 수가 줄어들어 노동상담소에 가서 옛날처럼 도와달라고 협조를 구했다는 것이다. 그곳 목사님 한 분이 "너희들이 의료봉사가 뭔지 알고나 설치는 거야!"라고 핀잔을 주며 꾸중하더라는 것이다. 학생들이 나하고 아무 의논 없이 갔기 때문에 화도 났지만 그 목사님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린 학생들이 모르면 가르쳐 주면 되는 것이고 할 말이 있으면 하면 될 텐데 성직자가 외국인들은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막상 우리 학생들에게 그런 상처를 주다니 나도 화가 났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학생들은 자력으로 이 모임을 키워나갈 생각을 하고 기왕에 하고 있던 동대구역의 노숙자 진료소와 성서공단의 국내 노동자 무료 진료소에서 기웃거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전단지도 나눠 주며 우리 모임을 홍보하고 다녔다.

우리 병원 옆에 오래 되고 큰 교회인 남산교회에도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출입하고 있었다. 이쪽 목사님들도 일요 예배가 끝나면 환자들을 보내 주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남산교회 목사님들과도 친하게 진했다. 이런 행동이 외국인 노동자 상담 목사님들의 비위를 상하게 한지도 모르겠다. 이러던 중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에 일하던 목사님 세 분이 찾아왔다. 상담소 내에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딴 살림을 차렸다며 인사를 하러 왔다. 그 분들은 얼마 전까지 일요일마다 우리 모임에 왔기 때문에 나와는 친숙한 분들이었다. 이 목사님들은 자신들에게 오는 외국인들을 진료에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전에 있던 곳의 책임자 목사님이 선배가 되어 그 분의 눈치가 보인다며 그 쪽에 먼저 양해를 구해주면 자신들이 우리 모임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다.

병원 관리부장이 그 쪽에 협조를 요청하러 갔는데 '왜 언제는 협조를 안 했어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라고 비아냥거리며 핀잔을 주더라는 것이다. 말로는 앞으로 협조를 잘하겠다고 하며 딴 살림 차린 목사들은 못 오게 해달라는 대답을 듣고 왔다. 뭔가에 많이 삐져있는 모습이었지만 딱히 생각나는 잘못도 없고 해서 우리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후로도 환자들은 보내주지 않았고 대신에 못 보던 목사님 한 분을 우리에게 고정으로 파견해 주었다.

그 분은 그동안 농촌에서 특수사목을 하다 왔는데 외국인 노동자 사목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 목사님은 사회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는 분이었는데 나와는 대화가 잘 통하는 분이었다. 순수하고 맑은 분이었다. 약점이랄까 특징이랄까 생각이 이상적이어서 너무 한 쪽에 치우쳐 있었고 남들과 자신의 생각이 다름을 틀렸다고 착각하고 자주 투쟁적인 행동경향이 있었다.

변호사님들과는 잘 맞지 않았다. 우리 모임에 오는 변호사님들은 보수적인 단체에서 파견된 분들이 되어 이 목사님과는 근본적으로 생각이 달랐다. 상담자가 없는 시각에는 같이 앉아 심심파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서로 생각이 달라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이렇게 한 부분이 삐거덕거리면서도 모임은 잘 이루어 가고 있었다.

창립기념일 잔치는 언제나 흥겨웠다. 그런 날에는 각국 출신들이 그들의 고유복장을 하고 자기 나라의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걸 보노라면 눈물도 나고 신도 났다. 그 중에는 우리 가요를 아주 잘 부르는 파키스탄 노동자가 있어 그가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기념행사의 날에는 경북대학교 밴드부 학생들이 신나는 팝송 연주를 하고 적십자 부녀봉사회의 풍물패가 놀이와 춤을 보여 주는 걸 보노라면 마치 국제음악제라도 보는 듯 신이 났다.

파키스탄에서 온 불법취업자 샤이드네 부부는 아들까지 하나 있었는데도 결혼식을 못 올리고 있었다. 이런 딱한 사연을 듣고 적십자 부녀회장을 마친 우수정님이 결혼식 경비를 대주었고 주례는 내가 섰다. 우 회장님은 교도소 쪽에서 사형수의 어머니라고 해서 많은 사형수들을 엄마처럼 돌봐준 분으로 유명하다. 결혼식을 마친 뒤 우 회장님은 샤이드 부부를 우리 전통 혼례복을 입혀 사진을 찍어 커다란 액자를 만들어 주었다. 이 사진 액자는 나중에 파키스탄으로 공수되었다. 샤이드는 파키스탄 노동자의 큰 형 노릇을 해 매번 진료 일에 찾아와 자기 나라 노동자들의 진료와 상담을 할 때 통역을 해 주고 성격이 붙임성이 있어 나에겐 커다란 동지였다.

우리나라에는 정말 엉터리 같은 사람들이 많다. 남들 다가는 군대 빼먹고, 땅 투기하고, 위장 전입하는 고관대작들, 그리고 고국을 팔아먹고 전복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일부 종북적 성직자와 시민단체들, 이런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굴러 가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도처에 아무도 몰라주는 일을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소매를 걷어 붙이고 십시일반으로 돕고 같이 뛰는 소금과 빛 같은 사람들이 있는 덕이라는 것을 일요일 봉사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일요 진료의 효율성을 위해 각 나라마다 리더를 정해서 그 사람을 통해서 우리 병원의 방사선과 김기원 실장이 이들과 항상 접촉을 하게 했다. 이 방법은 점점 크게 효과를 보았다. 이런 조직은 평소에라도 응급환자가 생기면 신속하게 조치를 해 줄 수 있고 임금을 떼인 일의 법적 흐름도 알 수 있어 좋았다. 또 행사가 있을 때 연락도 쉬워 인원 동원도 잘 되었다. 이렇게 조직이 안정되어 가자 학생들은 더 이상 환자 유치를 위한 홍보를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상담소에서는 계속 이 목사님을 보내주고는 환자는 더 이상 보내주지 않았다.

계획이 들어맞아 무료 진료일에 진료를 받지 않아도 외국인 노동자들은 친구를 만나러 오기도 하고 온 김에 점심을 먹고 가기도 했다. 우리 병원이 대구 시내 한가운데 있었던 탓에 많은 노동자들이 놀이 겸 오기가 편리했다. 자주 놀러 오는 사람 중에는 안젤라라는 인도 여성이 있었다. 이 사람은 캘커타 의과대학 출신이라고 소문이 나있었지만 아마 중퇴한 것 같았다. 한때는 서울서 대사관 근무도 했던 지식인이었다. 대구에 온 것은 남편의 근무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남편은 원래는 임상병리 기사였는데 어쩌다가 둘이 만나 우리나라에서 자그마한 인도 요리식당을 하고 있었다. 안젤라는 간단한 무역을 하고 통역도 하고 다녔지만 주된 종목은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젤라는 계명대학교 동문 쪽에서 카레 전문 음식점을 하고 있어 우리 직원들 하고 일부러 부조 겸해서 가끔 그 집에서 회식도 하곤 했다. 입맛이 둔한 나로서는 그 식당 음식 맛이 다 똑같이 느껴졌다. 닭고기, 소고기로 만든 여러 가지 음식 메뉴가 있었지만 모두가 카레로 뒤범벅되어 있으니 그게 그 맛 같이 똑같이 느껴지고 매워서 나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식당이 되지 못했다.

그 식당에는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사람들이 주로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 사람들은 음식을 먹으러 오는 사람보다는 그들의 사랑방처럼 마실 온 사람들이 모여 정보도 제공하고 웃고 떠드는 장소였다. 안젤라는 진료 날 자주 와서 통역을 해주다가 친해졌는데 남편이 임상병리사로 근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자주 부탁해 입장이 약간 서먹하기도 했다.

그런 날들이 흘러가고 있던 중 나의 환갑날이 되었다. 요즘 환갑잔치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자식들에게 잔치를 하겠다고 통보를 하였다. 오랜 객지 생활을 하며 몸에 밴 습관대로 생일날도 별로 챙기지 않고 살아 왔는데 새삼 이렇게 호들갑을 떠니 멋모르는 집사람과 애들은 어리둥절해 하는 눈치였다. 생일이 있던 그 주 일요일 중앙로에 있는 '민들레 영토'에서 환갑잔치가 벌어졌다. 이 날의 풍경은 친구 박순해 군이 우리 중고등학교 홈페이지에 실었던 참관기로 대신하겠다.

한산 권영재의 환갑잔치.

2006-9-27 오전 2:38:00(저자가 글을 쓴 시간) 9월 24일 일요일 5시 반.

약속대로 나는 한산이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외국인 노동자들을 초청해 식사를 한 끼 대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회갑연인데도 한산은 굳이 외부의 초청 인사들에게 외국인 노동자들과 그냥 스테이크 한 접시 같이 하자는 가벼운 말로 100여 명을 초청하여 이 '영토'를 꽉 메우게 했었다.

한산이 젊게 보여 오해 받는다는 어 부인과 자녀와 손자를 소개하여 다복함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가족이라며 오늘 행사에 걸맞게 파키스탄 불법 체류자 '샤이드'와 '아니샤' 부부를 소개했다. 한산이 이들의 주례를 서 주었고 지금까지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훤칠한 키에 미남인 샤이드도 약간 물기가 서린 우리말로 아버지의 회갑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불법 체류자는 우리 사회에서 약자다.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 속에서 돈을 벌기 위해 때로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간다. 샤이드의 아들 파리샤는 학령아동인데도 초등학교 입학을 못하고 있어 안타깝단다. 애틋한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이러한 외국인 이주 노동자가 한 두 명뿐이겠는가!

권 원장은 이러한 환경에 처한 많은 사람들에게 무료로 의료 혜택을 주고 있다. 또 경북대, 영남대 의과 대학생들도 권 원장을 도와 돈 없는 이들에게 무료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단다. 내일부터 중간고사 시험인데도 이 의대생들은 오늘도 자원 봉사를 하고 적십자병원에서는 숨어서 봉사하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이들 외국인 이주 노동자뿐 아니라 탈북자, 장기수, 성매매 여성들, 원폭 피해자 등등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에게 무료로 상담도 하고 검진과 치료 혜택을 주고 있단다.

"좋은 추억을 함께 나누자!"는 한산의 건배 제의 후 '사형수의 어머니'인 우수정 평화봉사단장의 꽃다발 증정, 다음은 권 원장이 2001년에 부임한 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꿈의 실현과 중국 홍십자 및 일본 나가사키 적십자병원과의 자매결연을 성사한 것 등 많은 업적 소개가 있어 정말 훌륭한 친구를 가져 흐뭇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초청된 인사들 대부분은 한산의 회갑연인 줄 모르고 왔다며 섭섭한 듯 말했으나 한편으론 감동을 더욱 찐하게 받는 느낌이었다. 적십자협의회장, 남산 복지관 변창식 목사, 200명을 무료로 안과 수술을 한 '난초 꽃피다' 병원의 조희태 원장 등등의 인사말이 그랬다. 우리 462친구 대표로서 인사말은 구국본 원장이 오랜 친구의 뜻 깊은 회갑연을 축하한다고 조리 있게 말했다.

한산의 생일을 위한 외국인 이주 근로자들의 생일 축하 노래가 많았다. 필리핀 찬양 팀 중창단 15명, 중국 팀 6명, 또 우간다, 남아공화국,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이 한 팀을 이루어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다. 한산은 무대로 나와서 고맙다며 일일이 악수를 해 주었다.

우리 462 대표로 축하 노래는 권경 동기가 '송학사'를 구성지게 불러 박수를 많이 받았고, 좌중의 요청으로 특별히 권 원장이 화답으로 '삼팔선의 봄'을 불러 갈채를 받았다. 다른 462들은 백 코러스를 하면서 신이 났었다.

오늘 환갑잔치에서 흥을 돋운 것은 대구사회복지관 풍물봉사단 아주머니들이다. 이들도 한산을 위해 자원 봉사를 한 것인데 좌중을 제일 신명나게 해 주었다. 신명과 한풀이는 맥이 같다. 한풀이 하다 보면 신명이 나고 신명이 나다 보면 이슬이 맺힌다. 이 국악봉사단의 창작 무용, 민요 춤, 그리고 사물놀이를 할 때의 신명은 흥에 겨워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마치 회갑을 맞은 한산의 신명으로 해외 이주 근로자의 한을 풀어주는 타악기의 음향이었다. 샤이드의 7살 아들 파리샤도 꽹과리 음에 맞춰 온몸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불법체류자 아들로 태어난 한을 풀고 있는 것이다.

한산! '민들레 영토' 라는 이름도 오늘 행사와 잘 어울리는 것 같소. 진심으로 회갑을 축하하며 뜻 깊게 잔치한 것 보며 합시다! - 방곡(박순해) -

예부터 잔치 때면 거지들이 몰려온다. 이러다 보면 주인 측과 다툼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특히 시내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라치면 양아치들이 몰려와 음식만 얻어먹는 게 아니고 돈을 달라고 떼를 쓰고 소란을 피워 잔치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날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친구가 건달 노릇하는 후배에게 '사람 부조'를 좀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들의 지역이 여기니까 한 두 사람 정도만 나와 자동차 주차도 돕고 쓸데없는 손님이 오면 쫓아 보내면 된다. 그런데 그날은 약 십여 명의 정장한 깍두기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민들레 영토 행사장 입구에 두 줄로 서서 오는 손님마다 90도 고개를 하며 인사를 했다. 나는 원래 이 친구들을 잘 아니까 재미도 있고 우습기도 해서 이런 행동을 말리지 않고 그냥 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약한 사람들은 많이들 놀라는 눈치였다.

외국인 노동자들이야 한국 잔치 풍습이 원래 이런가보다 하고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우리나라 손님들은 오는 사람마다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이상한 단체의 모임도 아닌데 덩치 큰 장정들이 최경례를 하고 있으니 흐뭇하다기보다 무섭기도 해서 어떤 심약한 친구는 이들이 행패 부리러 온 양아치 무리들인가 해서 두려워하기도 했다. 나는 원래 출생지가 대구 한복판이 되어 중앙초등을 졸업하였는데 우리 학교 동창생들은 여러 분야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 시내의 주먹 세계에도 후배들이 많이 있어 그들은 나를 형님이나 큰 형님으로 부르고 있었다. 우리 후배들이 큰 형님의 생일 날 이런 정도의 부조는 마땅하지 않는가.

그날 적십자 여성봉사단 중에서 풍물놀이패가 왔었는데 이는 봉사단 회장님의 덕이었다. 지난번에 샤이드의 결혼식을 치르게 해 준 바로 그분이었다. 우수정 회장님이 집사람을 그날 만나 '성질 더러운 원장님 만나 얼마나 고생하느냐'고 위로 겸 농담하는 쑥스런 풍경이 벌어졌었다. 나아가 우 회장님은 잔치 축사를 하는 시간에도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반복해서 한편으로 친한 표시로 고맙기도 했고 한편으로 민망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 풍물패들은 훗날 그날 고마웠고 또 우리 집사람의 노고를 칭찬한다며 새끼손가락 끝마디만한 금송아지 한 마리를 선물해 주었다. 이태껏 살면서 출연진에게 주인 선물을 주는 법은 있어도 거꾸로 출연진이 주인에게 선물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그날 요리 접시는 식당 종업원들이 날랐지만 손님들이 100여 명이 넘어 그들의 힘만으로는 모자랐다. 그리고 간식과 기념품이 있어 이것마저 식당 측의 서비스를 받을 수는 없어 우리병원 정신과 간호사들과 나의 아들딸들이 이런 일을 했다. 돈도 없는 자식들에게 일부러 돈을 내라고 강요를 했고 또 쉬는 날 서울에서 대구까지 와서 내키지 않는 봉사까지 하였으니 정말 내 뜻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일까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나와 함께 진료 봉사를 하는 동지들에게 이렇게라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친구들과 적십자 봉사원들은 이런 모습이 참 좋았다고 말해주어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일요일 무료 진료는 내가 병원 근무하는 7년 동안 계속 한 사업이었기에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은 대구적십자병원이 없어지고 그와 함께 무료진료도 없어졌다. 누군가가 이런 일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환자나 진료 팀이나 각자가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감을 주었다는 사실은 어디서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적십자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원이다. 대구에서는 대구의료원과 적십자병원 두 곳밖에는 이런 사람들을 돌봐 주는 곳이 없다. 크게 적자를 내서는 안 되겠지만 돈을 많이 남겨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공공의료기관에 대한 철학이었다. 이런 철학 탓에 임기 내내 서울 적십자 본사와는 사사건건 궁합이 맞아 티격태격 싸우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대구적십자병원은 시내 한가운데 있는 공공의료기관이다. 그러나 환자의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탓에 환자 숫자는 많았지만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종합병원이지만 봉급이 적어 의사들이 잘 오려고 하지 않았다. 새카만 후배인 진료과장들이 떠날까봐 항상 눈치를 보고 아양을 떠느라 원장으로 군림은커녕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이 의사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공공의료에 대한 개념도 열의도 별로 없었다.

더 한심한 것은 대한적십자사 본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병원이 맨 날 파리만 날리면서 적자라면 병원 직원들을 족쳐도 이해가 가지만 환자의 숫자는 적지 않는데도 의료보호 환자들이 주된 수입이 되니까 의료수입도 적었다. 그런 적자를 따지지도 않고 결과만 보고 우리는 억울하게도 맨 날 꾸중만 듣고 살았다. 흑자를 만드는 큰 병원들은 대개가 의료 외의 수입이다. 대학병원들도 지정 진료니 비 급여 종목이니 하면서 수입을 늘리고 있고 가장 큰 수입은 병원 내 장례식장, 매점과 식당 등으로 그들의 적자를 메우고 있는 곳도 많다. 이런 형편에 적십자병원의 적자의 내용을 살펴보면 악성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환자들도 애를 많이 먹였다. 조금이라도 직원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공기관이 이런 곳이 어디 있냐고 고함치며 온 병원을 휘젓고 다녔다. 더구나 정신과는 정신병 외에도 술 중독된 사람들도 많이 입원을 했는데 그 중에는 예의와 범절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았다. 외출을 나가서 귀원할 때는 만취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병실에 가서는 난동을 부렸다. 이때 꾸지람이라도 하면 전화로 인권위원회에 신고한다. 이곳에 신고 되면 일의 선후는 뒤로 가고 인권만 따져 직원들이 혼날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입원 며칠밖에 안 되었는데도 술이 깨면 또 술을 마시러 마음대로 퇴원했다가 밤에 만취되어서는 콜택시 부르듯이 119를 불러 타고 응급실로 온다. 다시 입원시켜달라고 고래고래 고함치고 거절하면 진료거부로 보건소에 신고하는 사람들도 자주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까지 친절하기가 부처님이나 예수님도 현장에 와보면 어려울 것이다.

우리 병원 주변은 향촌동과 동성로가 있어 유흥업소가 많다. 따라서 입원 환자도 이런 유흥가 출신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아무 소속도 없이 설치고 다니는 양아치도 있고 또 조직원인 사람도 있었다. 술 중독자 중에는 정신과에는 입원하기 싫어서 내과에 입원했다가 술 생각이 나면 괜스레 직원들에게 시비를 걸며 화를 내고는 맞고 있던 수액의 바늘은 뽑아버리고는 병원을 뛰쳐나갔다가 며칠 뒤에 다시 술에 취해 돌아와 입원을 시켜달라고 조른다.

"너희들은 우리 같은 사람 덕에 먹고 사는 주제에 왜 우릴 이렇게 괄시 하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댄다. 불쌍한 것은 원무과 직원들과 병실 간호사들이다.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해 밤새껏 간호사실로 전화질을 해댄다. 만약에 전화를 끊기라도 하는 날에는 불친절 직원이라고 인터넷에 욕하는 글을 싣고 보건소에 신고를 했다.

굽은 소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 때 공부에 취미가 없던 내 친구들이 동성로를 많이들 지키고 있었다. 이런 어린 시절 동무들 덕에 시내 한가운데서 온갖 이상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병원에서 기죽지 않고 원장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내 방에 놀러도 오고 또 부탁을 하려고도 왔다. 이들 중에 랭킹이 높은 건달들은 가끔 그 부하들을 몇 데리고도 왔는데 내 방에서 인사를 시키면 이들은 마치 군대처럼 일제히 "잘 부탁합니다. 큰 형님!"하고 90도로 인사를 해 내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옛 고향 친구들 덕에 자연 나의 계급도 올라가 '동성로의 큰 형님'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위치가 올라가니까 나를 아끼는 몇 몇 사람들은 사람 유치해졌다고 혀를 찼다. 그러나 그동안 소규모의 프리랜서 격인 동네 양아치들은 감히 우리병원에 와서 큰 소리를 칠 수가 없게 되어 속이 다 후련했다.

정신과는 인권 개념이 도입되면서 진료하는 의료인들은 거꾸로 환자들에게서 인권의 탄압을 받는 일이 시작되었다.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나 별 대책도 없이 견뎌내고만 있는 실정이다. 과거에는 심한 정신과 환자의 입원이나 퇴원은 가족과 의사들이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환자들이 현실감이 없고 병에 대한 인지기능이 떨어져 있으니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간혹은 입, 퇴원이 남용되고 당사자인 환자의 의견이 무시되어 인권의 경시현상까지 있을 수도 있었다.

현재는 그런 과거의 잘못된 관습을 고쳐 나간다는 명분하에 망상과 환각이 심한 환자라도 당사자가 원하면 퇴원을 시키라는 것이 인권위원회의 지시사항이다. 만약에 이런 현실감 없는 사람들이 동네에서 헛소리의 지시에 따라 폭력을 휘두르고 망상 때문에 자살을 하게 되면 누가 책임을 지는 걸까? 환자들의 권리와 인권문제로 역차별 받고 있는 그들의 가족이나 의료인들의 인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적십자부녀봉사회 회원들이 병실에서 환자의 밥도 먹여주고 대소변도 받아주며 각종 놀이치료나 작업요법, 예술치료 등의 봉사를 해주었다. 한편으로는 작은 기업체에 가서 일거리를 떼어 와서 작업요법에 이용하고 그들의 용돈도 벌 수 있게 주선했다. 머플러 접기, 고무지우개 포장 등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환자들은 시간도 잘 가고 재활에도 도움이 되었다. 적십자 대구지사에도 협조를 구해 한 달에 한번 씩은 버스를 타고 야외로 놀이 겸 드라이브도 다녔다. 시간표를 짜서 장보기, 골목투어도 다녔다. 돈은 없어도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최대한 협조를 얻고 봉사를 받아 가난한 병실이었지만 환자들은 부자처럼 대접을 받았다.

주먹패들을 어느 정도 평정한 어느 날 외래 환자를 보고 있는데 대기실이 소란하다. 나가보니 중년의 남자 환자 한 사람이 외래조무사에게 쌍욕을 하고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하는 줄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이런 행동을 한다. 남들을 화나게 하려는 목적이나 또는 주위 사람들에게 소란을 끼쳐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런다. 작정을 하고 난동을 부리는 까닭에 조용히 하라고 부탁을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 지금 환자를 보는 중인데 너무 소란해서 면담을 할 수 없으니 조용히 좀 해달라고 부탁조로 타일렀다. 그러자 이 사람은 잘되었다 싶었는지 온갖 욕을 하면서 나의 넥타이를 잡고 늘어졌다. 이 지경이 되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성질 같아서는 한 주먹에 때려눕히고 싶었다. 하지만 형편이 그러질 못했다. 그러나 넥타이에 매달려 온몸을 발로 차는데 그냥 맞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어 대기실 밖으로 내몰아버렸다.

며칠 뒤 경찰서에서 출두명령이 왔다. 환자를 폭행했으므로 조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경찰서에 가서 나름대로 해명을 했지만 형사는 막무가내다. "정황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환자를 때려서는 되나요?"라고 훈계조로 비웃으며 내 말을 묵살했다. 의아한 표정을 하자 그는 진단서를 보여주며 전치 2주일의 진단이 나왔는데 뭘 그리 변명이 많으냐며 오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형사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의사들이 평소에 고깝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오후에는 대질 신문을 했다. "말을 듣고 보니 원장님이 직접 저 사람을 때린 것은 아니군요. 하지만 목에 저렇게 붉은 자국이 생긴 건 원장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요. 그래서 원장님이 폭행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자 "저 사람은 의사가 아니고 깡패예요. 그 중에서도 두목입니다. 힘이 장사 라요. 동성로 가서 물어 보세요.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다들 큰 형님이라고 하지"라고 그 고소인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이 사람은 나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평소에 병원서 제 정신이 아닌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소새끼, 개새끼 하는 욕을 얻어먹다 이제 새로운 욕을 얻어먹으니 소나 개보다 차라리 깡패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때 그 취조실의 분위기는 나는 깡패 같은 의사이며 공공병원의 의사로서 죽을 죄를 지었고, 상대는 선량한 소시민으로 별 잘못도 없이 폭행당한 너무도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형사는 내일 또 보자고 한다. 사건을 한 쪽으로 몰아가려는 형사가 미웠다.

더 참을 수가 없어 경찰서를 나오자 말자 고위 공무원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정형외과에 가서 맞은 자리를 보여 주고 2주일 진단서를 떼었다. 다음 날 아침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출두할 때는 형사계로 오지 말고 수사 과장 방으로 오라고 한다. 수사의 강도가 더 높아지는 건가? 이건 또 무슨 일이지 하며 다음 날 수사 과장 방에 갔다. 수사 과장은 지금 서장님이 어디를 가셔서 죄송하지만 자신이 모신다고 한다. 사건 내용은 보고 받아 잘 아는데 상습 전과자에게 재수 없게 걸려들었다고 하면서 세세하게 사건 전말을 내게 확인해 준다. 그 사람은 무고와 공공기관 소란 죄의 다중 전과자로 현재도 벌금을 물지도 않은 채 또 그러고 다닌다며 나의 편을 화끈하게 들어준다.

친구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있으니까 취조 받으러 오라는데 등 뒤에 대고 과장이 하는 소리가 "우리 직원들이 알아서 할 거니까 원장님은 그저 대답만 하십시오"라고 친절하게 요령까지 설명해 준다. 그날의 분위기는 전날과 달라도 너무 다른 분위기였다. "제가 조사를 해봤는데요. 이놈이 상습범이더군요. 원장님은 그 놈이 멱살을 잡고 흔드니까 무심코 방어를 한 거지 일부러 때린 건 아니잖아요?"라고 형사가 말했다. 사건 당시의 나의 행동에 관한 해석이 어제와는 너무도 다르다. 기분 좋게 담당 형사의 물음에 답만 하면 되었다. 그날은 질문도 간단하고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나를 고소한 사내가 수갑을 차고 나가고 있었다.

"쌍방이 서로 고소한 상태인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해요?"라고 물었다. "저 새끼는 지난번에도 이런 사건을 일으켰다가 무고죄로 입건되어 검찰에서 벌금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동안 돈을 내지 않고 도망 다니다 오늘 바로 걸린 거죠. 우리도 원장님 덕분에 한 건 했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경찰서를 나섰다. 다음 날 전화로 문자가 왔다. "원장님, 이번 사건은 무혐의로 끝났습니다. 그 사람은 벌금을 물게 되었습니다"라는 담당 형사의 친절한 결과 보고였다.

4. 대구 지하철 참사

2003년 2월 18일 대구에 비극적인 사고가 터졌다.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대구지하철 참사'이다. 사고의 첫 시발은 한 정신이상자가 제1080호 열차에서 불을 지른 자그마한 화재였다. 그 화재를 지하철 당국의 미숙한 사건처리로 교행하는 열차의 바람에 불꽃이 커져 무려 136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간 전대미문의 사건이 된 것이다. 대구적십자병원에서 멀지 않은 중앙로 지하역에서 사고가 났다. 화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중앙로로 나가보니 지하도에서 연기가 조금 나오고 있었다. 별 일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병원으로 되돌아 왔다. 라디오에서 두 사람이 질식해서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화재는 쉽게 진화가 될 줄 알았다. 점심을 먹는데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다. 중앙로에 다시 나가 보았다. 지하철 입구에서 시커먼 연기가 꽉 차서 올라오고 있었다. 지하에서 들것에 실려 부상자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불이 꺼지기는커녕 심해지고 있었다. 우리도 진료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을 두고 모두 현장으로 뛰쳐나갔다. 화재 현장인 지하철역으로는 내려 갈 수가 없었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소방관에 의해 올라오는 환자들을 우리병원으로 데려 오고 또 각 병원에서 온 구급차에 옮겨 싣는 것을 도왔다. 사람이라기보다 숯덩이처럼 된 물체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구조에 나섰던 우리 직원들은 석탄 캐다 온 광부 같은 차림새로 돌아왔다. 화재는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한 공공병원인 우리가 가장 많은 환자를 돌봐야 됨에도 불구하고 의료진이나 장비 부족으로 많은 환자를 다른 큰 병원으로 보내는 것이 부끄러웠다. 명색이 종합병원이라 일반외과도 있었지만 화상환자를 치료할 시설과 도구도 없고 과장 한 사람으로는 이런 환자를 치료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 급하게 우리한테 왔던 환자들도 다시 다른 병원으로 보냈으니 누가 알까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 화재는 진압이 되었으나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136명이 숨지고 몇 백 명의 희생자들이 생겼으니 조용하게 일이 끝날 수가 없었다. 그 후 중앙로는 몇 달 동안 화재의 원인 규명과 희생자 뒤처리 등에 대한 불만과 불평으로 연일 가족 및 시민단체의 시위로 마치 전장과 흡사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 바람에 중앙로 부근의 번화가인 향촌동, 동성로까지 모든 상가는 폭탄 맞은 도시처럼 그 기능을 잃고 말았다.

대구역 앞에는 분향소가 차려지고 그 앞에서 반월당 네거리까지는 연일 외쳐대는 시위꾼들의 함성과 무질서가 난무했다. 이 바람에 이 지역의 큰 건물에는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제 맘대로 화장실도 쓰고 세수도 하는 무질서한 행동들이 계속되었다. 건물 주인들은 벙어리 냉가슴 격으로 말도 못하고 속으로 울고 있었다.

그런 건물 중 특히 아카데미극장은 가장 크고 시설이 잘되어 있었으므로 자연 군중들은 주로 그곳으로 몰려가 북적거렸다. 이런 북새통에 사장은 벙어리 냉가슴으로 죽을 지경인데 극장 구경하러 오는 관객을 보고 "이런 판국에 영화 보러 오는 놈도 있어?"라고 욕을 하는 시위꾼도 있었다. 이런 인간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은 2차 대전 중에 미국과 싸우면서도 영어를 교육했고 영국도 전쟁 중에 오페라를 공연하고 사람들은 그걸 보러 다녔다. 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도 내 부모 내 형제들이 내 덕에 그런 공연을 본다면 마음이 흐뭇할 것이지 화가 나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비상시라고 하여도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들 때문에 일상사를 벗어난다는 것은 정말 속 좁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아카데미극장 사장은 크게 화가 났다. 누구도 양해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극장에 무단으로 들어와 용변을 보고 세수를 하고 시설을 쓰고 더럽히는데도 아무 말도 않고 꾹 참고 지냈다. 그런데 이제는 더 나아가 그의 밥그릇까지 뺏으려는 소리가 들리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새대구시민회의'라는 시민단체에 속해 있었다. 그 단체는 여러 시민단체의 원로나 책임자들이 운영을 하고 있어서 나라로 치면 상원 국회쯤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모임에 가서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친구가 하는 업소라고 편을 드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염체가 있어야지 실컷 남에게 신세져 놓고서는 그 사람에게 침을 뱉으면 되겠는가라고 항의를 했다.

새대구시민회의는 원로들이 모여 있었음으로 상식이 통하는 단체였다. 설명을 듣고서는 장주효 대표와 다른 간부들이 아카데미극장에 가서 신세지고 있음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말을 함부로 한 사람은 누구인지 몰라도 알면 혼내주겠다고 사과를 해 일은 깨끗이 해결되었다. 그런 모임 이후로는 그 극장을 내왕하는 사람들도 미안함이 덜한 채로 쉽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몰상식한 말을 하는 인간도 없었다.

사건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나서 현장이 공개되었다. 계단을 내려가 보니 입구에서부터 꽉 차 있는 하얀 국화 꽃동산, 그 꽃들이 무서웠다. 온통 새카맣게 그을려 있는 벽, 그곳에는 헤일 수 없는 진혼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눈물은 물론이고 감정마저 메말라 다만 멍한 상태로 서있었다. 참혹한 현장에서 멀지 않은 대구역 옆에 있는 분향소인 시민회관을 멀리서 보면 여느 분향소와 다름이 없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136명의 희생자 사진들이 빼곡히 걸려 있는 모습을 보면 이게 내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정신도 쇼크를 받아 다만 멍한 상태로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떠날 수가 없게 된다.

조문장 밖에는 여러 단체에서 설치해 둔 부스가 많이 있었다. 여기 와보면 인간이란 결코 악한 존재만은 아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부스마다 조문객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려고 만들어진 천막은 비극의 결말을 보는 것 같아 슬픔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 가운데 피어나는 인간애를 볼 수 있어 흐뭇한 마음도 들었다.

적십자사는 봉사 나온 기업들에 비하면 구호사업 한 지가 오래 되었고 또한 전문 단체이다. 그런데도 재난 시 하는 행동을 보면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밥과 국을 장만하여 오가는 사람들을 대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탓에 별로 찾아오는 손님도 없었다. 가끔 오는 사람도 문상객이나 희생자 가족들이 아니고 같이 봉사하고 있는 다른 단체의 사람들이 밥을 먹으러 오고 있었다. 어떤 기독교 단체에서는 여성들의 생리대도 준비하고 남자들을 위해서는 면도기까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보니 정말 이 분들은 상대를 배려하는 진심어린 봉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대형사고 시 본사의 구태의연한 태도들은 도무지 국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총재는 과거에는 총리 출신들이 하다가 좌파정권이 되면서 별 무게가 없는 의외의 인사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인사가 하기에 따라 썩은 정신을 도려내고 오히려 신선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명예총재인 적십자사에 함량 미달의 인사가 총재가 되어 개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들어내어 제 자신보다 더 똑똑한 국민을 계몽하려는 우를 범한다. 그래서 국민정서가 이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의 편향된 이념을 시민단체도 아닌 적십자에서 그 뜻을 펴려는 것이다.

이렇게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국민정서를 외면하니 적십자 회비 납부 율이 해마다 줄어드는 것이었다. 이 현상은 바로 국민들의 적십자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식어간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적십자는 국민이 감동할 수 있게 철학을 재정비하고 조직과 인원의 쇄신을 가져오지 못하면 미미한 조직의 일반 시민단체보다 못한 단체로 전락될 위험성도 있다.

5. 나가사키 적십자사

어느 날 관리부장이 한 통의 공문을 갖고 왔다. 일본 적십자사 나가사키지부에서 그 직원들과 의사들이 우리 병원을 방문해 대구경북원자폭탄 피폭자를 면접하고 그 실태조사를 하러 오니 협조하라는 본사의 지시였다. 일본 의사들은 우리나라에서 진료행위를 할 수 없으니 진료는 우리 병원 의사들이 하고 그들은 견학하면 된다고 했다.

몇 달 뒤 나가사키 의사들, 시청직원, 그리고 적십자사 직원들이 피폭자 관찰을 위한 대구 방문이 있었다. 본사에서 내려 온 직원들과 통역들 그리고 대구지사 직원들이 일본 적십자 직원들과 의료진들을 뒤치다꺼리한다고 신경이 많이 쓰였다. 그 사람들은 병원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잠자리를 정해 놓고 일주일 동안 일을 했다. 아침마다 병원 면담장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점심시간에는 그 의사들이 쉴 마땅한 공간이 없어 내 방을 내주었다. 내가 있으면 쉬지 못할 것 같아 자리를 피해주었다. 우리나라 피폭자들은 대부분이 경상도 특히 대구경북 출신들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우리 병원이 선택된 된 모양이었다. 대구보다는 경북출신들이 많았고 경남서도 피폭자들이 모여 왔다.

진료 마지막 날 저녁 일본 적십자 직원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대접받기가 곤란하다는 대답을 했다. 나는 상대방의 호의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소인배로 보기 때문에 옳은 것은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한다. 사양하는 나가사키 사람들에게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된다고 하며 억지로 불고기집으로 데려갔다. 식사 뒤에는 노래방으로 일행들을 데리고 갔다.

처음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나중에 나의 진심을 알고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를 했고 노래방을 가자고 하니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따라왔다. 노래방에는 일본 노래도 있어 그들은 마음껏 노래를 불렀다. 우리 유행가 또한 그들의 것과 흡사하니 모두들 취기도 오른 데다 노래도 비슷하니 흥겨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으로 우리가 형제처럼 지내자는 말을 했다. 나중에 아예 양쪽 적십자병원이 서로 자매결연을 맺으면 좋겠다는 말로 발전되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그저 술김에 소리로 치부하고 그런 말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몇 달 뒤 일본에서 공문이 왔다. 전에 의논한대로 양측이 자매결연의 과정을 의논하고 일정을 잡자는 내용이었다. 일본인들은 농담이 없었다. 이 사람들과 상대를 하다보면 나처럼 생각이 두서없이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들은 큰 코를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저런 서류가 왔다 갔다 한 뒤 드디어 대구적십자병원과 나가사키적십자병원이 자매병원이 되기로 합의를 하고 그 조인식을 나가사키에서 하기로 했다.

나가사키 시에서는 매년 원자폭탄 피폭자들과 그 관련된 연구를 하는 의과대학 교수들, 합천에 있는 피폭자 요양원 직원, 그리고 적십자사 직원들을 초대하여 연수를 시켜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 연수를 받으러 나가사키를 가면서 아울러 양쪽 병원의 자매결연도 하기로 했다.

2003년 9월 27일 나가사키 공항에 내리니 키가 작은 일본인 한 사람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는데 나가사키 시청에 근무하는 '쿠사바'라는 사람이었다. 우리말을 유창하게 했다. 쿠사바 씨는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유학까지 갔다 온 엘리트였다. 일본인들은 무엇을 한다면 진지하고 열심히 하는 줄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사업을 위해 남의 말까지 공부를 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 적십자사에서 일본어를 배운다는 사람은 본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공항에서 나가사키 시내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우리는 아침에 출발한 덕에 오후에 도착해서는 시간이 남았다. 쿠사바 씨는 오늘 오후에는 일정이 없으니 '구로바 엔' 구경이나 하자며 일행을 데리고 갔다. 구로바는 '글로버'란 영국 무역상의 일본식 발음인데 개화기에 돈을 많이 벌어 자그마한 동산 위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 동산에는 글로버 말고도 함께 살던 '그린거'와 '구오르트' 등 다른 유럽인들의 옛날 집도 아직 남아 있었다.

나가사키는 도시 전체가 동화의 세계처럼 아름다운 곳인데 특히 구로바엔은 그런 곳에서도 특히 꿈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이 공원에는 입장료를 받는다. 곳곳에 있는 가파른 언덕으로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어 편리하고 경치도 좋아 돈이 아깝지 않은 곳이다. 이 동산에는 동화 같은 집도 집이거니와 화초들도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다. 산들바람은 간지럽게 불어오고 내려다보이는 항구에는 배들이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오페라 나비 부인의 여주인공을 맡았던 '미우라 다마키'의 동상이 있어선지 하늘에서는 나비부인의 '허밍 코러스'가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무릉도원이 여긴가 싶은 곳이다. 우리 일행은 구로바엔을 나와 일주일 동안 묵을 호텔에 도착했다.

매일 아침 9시가 되면 쿠사바 씨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일과는 주로 하루 종일 교육과 현장 견학이었는데 전부가 원자폭탄 피해와 관계있는 것들이었다. 2차 대전 막판 일본은 이미 모든 것이 다 파괴되어 싸울 힘이 없어져 패망이 짙었다. 그러나 막대한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미국과 무모한 전쟁을 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우라늄으로 만든 원자폭탄 암호명 '리틀 보이'를 투하했다. 8시 9분 히로시마는 쑥대밭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계속 미국에 대들자 3일 뒤 또 다시 한 발의 원자폭탄을 싣고 일본 본토로 날아갔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투하할 도시 5개를 이미 정해 두고 있었다. 니가타, 교토,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였는데 히로시마 다음은 고쿠라 차례였다.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위해 미 공군이 가던 날 고쿠라 상공은 구름이 잔뜩 끼어 시야가 좋지 않아 폭탄을 투하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음 목표인 나가사키로 날아갔다. 날씨는 여기도 좋지 않았다. 상공을 몇 차례 돌다가 폭격기 B-29 '에놀라 게이'의 연료가 다해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마침 나가사키 상공 한 곳에 둥글게 구름이 없는 곳이 보였다. 미 공군은 그 빈 공간으로 원자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 때의 것보다 더 폭발력이 강한 푸라토늄으로 만든 원자탄 암호명 '패트 맨'(뚱뚱한 남자)은 현재의 평화공원, 나가사키 의과대학, 우라카미 천주당 상공 600m에서 폭발을 했다. 시각은 11시 2분이었다.

패트 맨은 7만3천884명을 죽였다. 이 바람에 우리나라 사람도 1만명 가까이 죽었다. 생존자는 1만 명이고 생존자 중에 8천 명은 귀국하고 2천 명은 그곳에 계속 살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도 문제였지만 산 사람들 역시 문제가 컸다. 원폭의 피해자들은 직접 원자탄을 맞은 사람과 2주일 짧은 기간 동안 피해지역에서 살았던 사람 그리고 피해지역에 들어가 구호활동과 복구사업을 하던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일본과 우리의 적십자사는 이 원폭피해자의 진료에 대해 서로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본 피해자들은 '피폭자 건강수첩'을 갖고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폭피해자 등록증'만 갖고 있었다. 원폭에서 살아남았다고는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6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평생을 병마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후유증은 죽음으로 이르게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여러 가지 장애를 입어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수 십 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 장애자로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많다. 이런 분들을 만나 보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이야기를 한다.

우리 피폭자들은 아무 보상도 없이 소액의 진료비만 받아 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런 억울한 피폭자들의 일에 일본에서는 시민단체들까지 합세하여 자신의 정부에 항의하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그 중에 히로시마에 사는 '이치바'라는 여자 분은 책도 쓰고 도대체 한국정부는 뭐하냐면서 흥분해서 나에게 찾아 온 일도 있었다. 우리 피폭자들은 일 년에 한 번씩 그것도 수첩이 있는 분들만 일본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고 온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떤 때는 현지에서 아무도 안내하는 사람이 없어 병원 가는 날 아침에 어디로 가야 되는지 방법을 몰라 헤맨 적도 있다고 했다. 개 중에 아직도 조금 일본어가 가능한 분들이 나머지 일행을 이끌고 시청이나 병원을 가는 때도 있다고 한다. 우리 정부나 적십자사는 이런 일을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하도 과묵하니 말이다.

교육과 견학은 하루 종일 빡빡하게 일정이 짜여 있었다. 단장인 나도 쉴 틈 없이 힘든 일정에 참여해야 했다. 나는 좀 봐줄 줄 알았는데 어림없는 일이었다. 피폭자들이 살고 있는 요양원을 갔을 때의 가슴 아련한 광경이 아직도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그 당시 90세가 넘은 남자 노인네를 사무실에서 만났다. 원자탄이 떨어지던 날 자신은 인근 산에서 군용 연료용 소나무 관솔을 채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내 쪽에서 공습 사이렌이 울려 내려다보니 커다란 섬광이 번쩍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으니 미국의 신형 폭탄이 하늘에서 터졌다고 했다. 집에 가보니 폭심지에서는 사람과 집들이 후폭풍에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폭심지 밖에 보이는 시체는 온통 화상으로 시커멓게 타버렸고 사지가 찢겨진 시체도 많았다고 한다. 간혹 만나는 부상자들은 모두가 "물, 물을 달라"고 외쳤다고 한다. 시내를 흐르는 강과 도로에는 시체와 부상자와 바람에 날려 온 온갖 쓰레기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고 했다.

▷필자 약력

-권영재(69)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현 동승병원 진료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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