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한 그루 없이, 차창 너머의 북한은 온통 흑백 세상이었다
적십자병원
4-①
1.적십자대구병원 원장
시립 대구정신병원을 창설하고 7년 근무한 뒤 퇴직하여 개원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대구적십자사 회장이 대구적십자 병원에 정신과를 개설해줄 수 있겠는가 하는 제의를 해왔다. 포항성모병원 정신과를 개설하였고 시립 대구정신병원을 창설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대구적십자병원 정신과 개설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제의를 했다. 개원 생활이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던 차에 또다시 공공병원에서 일하게 된다니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여 적십자병원에 근무를 시작하였고 우선 정신과 외래를 만들었다. 곧이어 병실까지 개설하였다. 2002년 1월 17일 진료부장에서 원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정신과 진료와 원장 일이 겹쳐 참 어려운 일과를 보냈다. 난생 처음으로 공공의료 전담 종합병원의 원장이 되고 나니 공공의료라는 명분과 한편으로는 흑자 경영을 해야 된다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아야 돼 일이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이렇게 적십자대구병원과 인연이 맺어졌다. 7년 동안 그곳에는 딴 종합병원에서 경험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들었다. 그런 애환이 깃든 일들을 추려서 소개해보기로 한다.
2. 이산가족상봉
적십자병원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에 하나가 남북이산가족재회 모임에 참여했던 일이다, 군인일 때 '철의 장막'처럼 느껴지던 휴전선, 특수공작원이나 게릴라들만이 넘나들던 그 금단의 지역을 넘어 북측 지역으로 갔다. 2006년 6월 20일 오전. 가슴은 뛰지도 않았다. 너무 벅찬 경험이 시작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비무장지대를 통과하여 북쪽 땅 버스에서 내리니 코앞에 북한 병사들이 서 있었다. 도망을 가야되나 아니면 저 군인을 쓰러뜨려야 되나 순간 망설였다. 군인 시절 매일 '때려잡자'고 외치던 소위 그 '김일성의 북괴군'들이 거기 있었다. 어릴 때부터 교육 받던 '멸공'의 대상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멍한 상태로 서있다 인솔책임자가 빨리 모이라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북한 병사들은 모두들 조그만했다. 우리나라 중학생 크기였다. 저 북한 병사들은 소년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규군이었고 장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병사들은 다 그렇게 작았다.
우리들이 타고 온 10여 대의 버스에는 한국전쟁 전후에 월남하면서 두고 온 가족을 만나러 가는 611명의 이산가족상봉 가족과 함께 정부와 적십자 관계자들이 타고 있었다. 내가 탄 차는 맨 선두를 달렸다. 일행 중에는 가장 먼저 북쪽을 보는 축이었다. 차창에서 보이는 풍경에 내 눈을 의심했다. 이북의 풍경이 어릴 때 우리의 산하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흑백의 세상. 산에는 나무 한 그루도 없고 민가도 모두 흑백으로만 색칠된 모습, 어릴 때 우리의 것과 똑같았다. 10여 대의 버스가 전조등을 켜고 긴 행렬을 이루며 가건만 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거나 손을 흔드는 사람들은 없었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묵묵히 고개 숙이고 땅만 보고 일을 하고 있었다. 철둑에서 일하고 있던 젊은이들도 우리가 마치 바람이라도 되는 듯이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다만 일정한 간격으로 붉은 깃발을 들고 서 있는 병사들만이 우리를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차 속에서 주의를 들었다. 그 군인들은 우리가 실수를 하면 바로 호각을 불며 깃발을 들어 올린다는 것이다. 그럼 차는 운행을 중단하고 의심을 받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불려가 억류되고 심문을 받게 된다고 했다. 그 깃발을 든 군인들은 금강산을 갔을 때도 군데군데 서 있었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도 그들은 서 있었다.
오래 달리지 않아 해금강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일부는 그 호텔에서 약 20분쯤 거리에 있는 콘도 형식의 1층 건물에 분산 수용되었다. 짐을 풀자 말자 환영회를 한다고 다시 버스를 타고 커다랗고 둥근 단층 건물로 몰려갔다. 거기에는 북쪽에서 모여든 이산가족들이 이마 와 있었고 일행들은 미리 통보받은 자신들의 번호가 붙어 있는 둥근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정부 측 인사들과 적십자 직원들은 여기저기 우는 소리와 웃는 소리로 왁자지껄한 상봉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도 혹시 졸도라도 하는 가족은 없는가 하고 간호사와 함께 살피고 다녔다. 그러던 중 북쪽에서 온 의사와 간호사들을 만났다. 이런데서 동업자를 만나니 반가웠다. 그들도 우리처럼 흰 가운을 입긴 했는데 어색한 모습이었다. 마치 의대생들이 예과 때 처음 가운을 입은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의사는 머리도 기름을 발라 뒤로 벗어 넘긴 탓에 마치 우리의 60년대 이발사 같은 모습처럼 느껴졌다. 차림이 어색해서 혹시 의사가 아니고 정보기관에 일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반가운 김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인사말을 했으나 그 의사는 악수도 피하려다 억지로 했고 나의 수인사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상봉 뒤 바로 식사로 이어졌다. 정부 관리들과 적십자 직원들도 북쪽의 상대 정부 기관 사람들과 섞여 앉아 2시간 정도 담소를 하며 식사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과 함께 앉았으니 초면인데다 워낙에 어색한 만남이어서 분위기가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우리 쪽은 나와 간호사와 통일부 여직원 셋이었고 그 쪽은 인상이 험악한 남자 한 사람과 비교적 순하게 보이는 사람 둘이 앉았다. 우리 측은 남자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어 앞으로 2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속으로 걱정을 태산 같이 하고 앉아 있었다.
북쪽으로 갈 때 모든 사람들은 다 적십자 직원이라고 말을 하라고 교육을 받았다. 아마 그쪽 사람들도 우리처럼 그들의 직책을 적당히 둘러대겠지 하는 마음으로 서로 수인사를 했다. 그 사람들은 한 사람은 신문기자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보장성 직원이라는데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정보부 사람으로 느껴졌다. 나는 가운을 입고 앉아 있었는데 깜빡하고는 내 명찰을 지우지 않고 그냥 입고 있었다.
"선생은 적십자병원 원장이시오?"라고 인상이 험악한 사내가 물었다. "예, 예 그렇습니다." 나는 잔뜩 긴장이 되어 비굴하리만큼 공손하게 대답을 했다. "원장이 원장다워야 원장이지"라고 내 말을 들은 험상궂은 사내가 중얼거렸다.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했고 분위기가 굉장히 어색했다. 화가 울컥하고 치밀었지만 억지로 참고 있었다. 이 작자가 왜 이러는가? 혼자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술을 마시지 않고 또 그들에게 잔도 권하지 않아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그 중에는 나이도 더 들고 부드러워 보이는 사내가 말을 시작했다. "대구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구 어디요?"라고 되물었다. 짜증이 났다. "대구 어디라고 하면 알기나 하나요?" 내가 짜증어린 질문을 하였다. "내 대구 잘 알지요. 팔공산도 알고 동화사도 알아요"라고 그 사내가 대답했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를 미리 샅샅이 조사를 다 해두었구나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대구의 그런 곳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하며 물었다, "아. 유니버시아드 때 대구에 취재하러 갔었어요. 팔공산에 있는 대구은행 연수원에서 선수들과 함께 묵어서 그쪽은 대충 알지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되었다. 서로가 등에 칼을 대고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어서 빨리 만찬이 끝났으면 했다. 그러나 시간은 무척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은 술을 아주 잘 마셨다. 얼굴도 붉어지지 않고 자세나 말투도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딴 테이블에 앉아 있었던 딴 팀들은 두 시간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헤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우린 술이 들어가고 대화가 많아지면서 긴장이 풀려가고 있었다. 분위기 조절은 기자라는 사람이 해주었다.
수인사를 하다 보니 그 기자와 나는 동갑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 가면 남자들은 꼭 나이를 물어보고 서로 친해진다. 자기가 형이니 동생이니 하면서 말이다. 이북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동갑이라며 서로 친해지기 시작하였다. 인상이 정보부 쪽으로 보이는 그 사내는 공격적이고 과격한 말을 했지만 그 동갑내기 기자가 잘 중화를 시켜 분위기가 점점 화기애애해지기 시작했다. "귀측은 남측보다 먼저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셨죠?"라고 내가 그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말문을 텄다. "팔만대장경?"하고 둘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또 철렁했다. 말을 잘못한 것인가? 금강산 가기 전에 통일부에서 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남측"이고 이북은 '귀측 혹은 북측'이라고 말하라고 했다. 배지는 '휘장'으로, 화장실은 '위생소'로 부르라고 했다. 아까 내가 한 말 중에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이 있었을까 잠깐 생각을 했다. "흥 그쪽에선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누만……." 그들이 깔보듯 내게 되물었다. "귀측에서는요?" 내가 물었다. "우린 그냥 대장경이라고 하죠"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우리보다 먼저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한 사실에 크게 우쭐대는 모습이었다. 이런 식으로 내가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자 그들은 점점 나에게 호감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우리 여자 직원들에게도 돌아가며 질문을 했다.
"저쪽에 앉은 선생은 남편도 일을 하나요?"라고 통일부 직원에게 질문을 했다. 그 직원이 그렇다고 말하자 "그럼 봉급을 따로따로 써요? 아니면 한데 모아 같이 쓰나요?" "우린 자기가 번 건 자기가 따로따로 써요"라고 여직원이 말했다. "아니 한 가족이라면서 어떻게 그렇게 딴 주머니를 차나요?"라고 그들이 꾸중 비슷하게 되물었다. 우리 병원 간호사도 그렇다고 하자 이번에는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난 혼자 돈을 벌어 모두 집사람에게 주고 함께 쓴다"라고 했다. 어느새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편을 갈라 집안 경제권에 대한 토론 아닌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에 적개심과 의심으로 가득 차서 빨리 시간이 갔으면 하던 생각은 어느덧 사라지고 모두들 재미있는 시간이 빨리 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은 개별 가족상봉이 있었는데 먼저 우리 숙소인 해금강호텔에서 이루어졌다. 가족들이 각자의 방에서 헤어졌던 가족들이 개별상봉을 하고 양쪽 정부 직원들은 호텔의 로비나 복도에서 앉거나 서서 서성대고 있었다. 남북의 실무자들은 그동안 여러 번 가족 상봉에 참여를 했으므로 서로 친하게 지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남과 북은 서로가 아무 말도 않고 무표정하게 싸늘한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호텔 로비의 소파에서 상봉이 끝날 때까지 서로가 긴장되고 적대적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우리 쪽 국정원 책임자를 만나 평소 궁금했던 이야기를 물어 보았다.
우선 그 사람이 의심을 갖지 않기 위해 수인사를 한 뒤 고향이 서로 같음도 이야기하고 국정원 고위간부에 내 친구가 있음도 말해주었다. "우리나라 높은 사람들이 이북에 소위 햇볕 정책이란 이름으로 맨 날 조공(?)만 갖다 바치기에 아래 사람들도 다 같은 한통속인 줄 알았는데 현장에 와보니 생각과 다르네요"라고 질문하자 국정원 직원은 "우리의 하부 조직은 그렇지 않아요. 하부가 탄탄해서 대한민국이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거죠. 왜 아까운 쌀 주고 비료 주며 저 사람들에게 비굴하게 군단 말입니까?" 나라가 거의 북남통일이나 된 듯 종북 좌파들이 설치고 다녔는데도 나라가 왜 안 망하는가? 이상하게 일선에서 이렇게 조국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라가 넘어지지 않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다음 날은 북측 숙소인 금강산호텔에서 개별상봉을 한다고 모두 버스를 타고 출발 전 인원 점검을 했다. 한 명이 부족했다. 무슨 긴급 상황이 생겼는가? 해서 직원들이 호텔로 뛰어가고 나도 환자가 생겼을까 해서 그들을 따라갔다. 방에 가보니 한 사람이 누워 있다. 왜 안가냐고 물으니 간밤에 마신 술이 덜 깨서 일어날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람은 당사자가 아니고 이산가족의 조카였다. 촌수가 한 다리 건너니까 이런 일이 생기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쌀 퍼주고 비료 줘가며 겨우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얌체가 끼어있다니 정말 속이 뒤집어 지는 느낌이었다.
정부 실무자들이 북측 금강산호텔에 갈 땐 점심으로 컵라면을 갖고 가야된다고 했다.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거기 가보고서야 그 이야기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쪽 상봉장에 도착하니 예의 그 "반갑습니다"라는 노래가 반복되어 울려 나오고 있었다. 한복을 입은 여성들도 여럿이 줄지어 서 있어 어제 우리 측에서 주최한 상봉 때보다 분위기가 훨씬 화려하고 흥겨워 보였다. 이산가족들은 우선 넓은 방에서 만난 뒤 다시 그들의 방에서 따로 개별 가족상봉이 진행되었다.
우리 정부 측 인사들은 뷔페식당에서 따로 우리끼리 점심을 먹게 되었다. 식당에 가서 깜짝 놀랐다. 젓가락 댈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상추, 고추와 된장, 나박김치, 전 그리고 기본 반찬 몇 가지 후식으로 깎지 않은 사과가 전부였다. 밥을 먹으며 집어 먹을 마땅한 반찬이 없었다. 젓갈 하나조차 없었으니 마치 절에 온 것 같았다. 손님을 오라고 해서는 이런 대접을 하다니 모멸감과 분함이 함께 솟아올랐다. 나의 이런 태도를 눈치 챈 통일부 직원이 말한다. "이건 많이 좋아진 겁니다. 전에는 밥도 찬밥을 주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차라리 컵라면을 갖고 가야 된다는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겨우 몇 술을 뜨고 호텔 베란다에 앉았다. 금강산에 와서 산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그 산 아래 호텔에 앉아 있으니 만감이 착잡하였다. 커다란 바위에는 온갖 구호가 새겨져 있었는데 글씨가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정보부 사람들이 말했다. "저 건 많이 좋아진 거예요. 전에는 온통 붉은 빛이었죠. 우리가 온다고 색을 바꾼 겁니다. 생각나세요. 천출 김정일 장군이 남한서는 천한 출신이라 뜻이라고 말했다가 정부 요원들 끼리 난리난 이야기…"
식사 때는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금강산 햇볕은 보석처럼 빛났고 공기는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산수의 풍경이 몽유도원도에 온 듯했다. 점심을 먹고 나니 호텔 안을 다녀도 좋다고 한다. 친구들 줄 선물을 사러 이층 매점에 갔는데 점원이 없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오던 날 밤에 만찬장서 같이 식사한 그 험상궂은 사나이와 만났다. 하긴 그날 밤에 화기애애하게 헤어졌으니 이젠 반가운 얼굴이다. "원장 선생님, 왜 그러세요?"하기에 술을 좀 사려는데 점원이 없다고 했다. 그 사내가 일부러 어디엔가 가서 점원을 찾아 데려다 준 후 바쁘게 제 갈 길로 갔다. 외국서 올 때는 항상 술 두 병만 살 수 있다고 알고 있어 그 점원에게 물었다.
"소주도 두 병밖에 안 팔아요?" "선생님은 이산가족이세요? 아님 정부 직원이세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적십자 직원인데요." "그럼 아무 걱정할 것 없어요. 박스채로 사 가셔도 되요."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어디 가든 빽이 통하는군.'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 웃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까 1층에서 본 건데 그쪽 직원들은 왜 당신처럼 웃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아요?" "아, 걔들은 신출내기들 이야요. 아직 여기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어색해서 그러지요"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정부 측 손님은 제한받지 않고 물건을 살 수 있고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도 소지품 검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분이 좋았다. 소주와 금강산 담배를 샀다. 전두환 대통령 때 남북회담 갔다 온 이기호 장관이 준 금강산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있다. 당시는 담배가 필터가 없었는데 그날 보니 필터가 잘 달려 있었다. 그 때보다 경제가 좀 나아진 모양이다. 그러나 소주는 대구 와서 보니 마개가 허술해서 술이 새고 있었다.
이산 가족상봉 동안 북쪽에서는 서커스도 보고 쇼도 보여 주었다. 기술이 훌륭했고 가수나 배우들도 인물이 뛰어났다.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우리가 가족상봉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 측의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도 닭이 소 쳐다보듯 하고 인사도 없이 지나갔다.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많이 섭섭했다. 저 사람들이 관광을 올 수 있는 건 우리가 있기 때문인데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첫날 상봉행사를 했던 곳은 나중에 보니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파는 가게였다. 우리는 가족상봉 행사 때문에 코앞에 둔 금강산도 올라 가보지도 못하고 외식도 못해 보고 선물을 살 시간도 없어 많이 아쉬웠다.
떠나기 전날은 삼일포로 남북한 가족들과 직원들 모두가 나들이를 갔다. 그곳은 원래 바다였는데 입구가 막혀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조선시대에도 많은 시인묵객들이 머물렀고 몇 년 전에는 김일성 부자도 방문했다는 곳이다. 북쪽에서 온 이산가족들은 전부 남자였는데 하나 같이 검은 양복에 검은 중절모를 쓰고 왔다. 마치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유니폼처럼 똑 같은 차림이었다. 그들 중에 훈장들을 자랑스럽게 가슴에 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여러 개를 손가방에 넣어 가져 오기도 했다. 훈장이란 것이 조잡하게 만들어 깡통을 펴서 만든 것처럼 보였다. 마치 우리 어린 시절 놀이 계급장과 흡사한 싸구려 모양들을 하고 있었다. 우습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했다.
삼일포를 돌아다니다 다리가 아파 마침 검고 매끈한 작은 바위돌이 있어 거기서 앉아 쉬고 있는데 난데없이 한 사내가 달려오더니 빨리 일어서라고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그 사람은 우리 측 사람인데 그 돌은 김일성 부자가 삼일포 방문을 기록한 기념비석이라고 했다. 만약에 북쪽 사람들이 보았으면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 했다. 그런 귀한 기념돌이라면 세워서 남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만들 일이지 왜 땅 바닥에 눕혀 놓아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들어 하며 혼자 불만을 중얼거렸다. 불안하고 머쓱한 기분에 경치가 좋아 보이는 조용한 언덕 쪽으로 올라가 기분 전환이나 하려고 하는데 거기는 관람객 금지구역이라고 북쪽 직원이 가로 막는다. 이때 예의 그 험상궂은 북쪽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원장 선생님, 괜찮으니까 한번 올라가보세요"라고 권한다. 아무도 못가는 곳에 그 사람 덕에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은 꽤나 힘이 있는 자리에 있나보았다. 점점 그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삼일포 나들이 때 북쪽에서 우리 모두에게 선물을 한 보통이 씩 주었다. 그 속에는 사이다, 단물(주스), 과자 등이 있었다. 어릴 때 먹던 그리운 그 촌스런 음료수와 과자들이었다. 별로 달지도 않고 고소하지도 않는 과자. 옛 추억의 먹을거리들이었다. 음료수를 자세히 보니 개중에는 사용기간이 지난 것들도 있었다. 화가 나서 북쪽 사람들에게 항의를 해보고 싶었지만 겁이 나서 하지 못했다. 그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팽개치고 오려다 나중에 증거로 삼기 위해 고이 짐 속에 넣어서 왔다. 우리 적십자 직원 중에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오는 사람 말이 저 남자들이 입는 옷은 단벌로 올 때마다 교대로 그 옷을 입고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키나 몸무게가 모두 고만고만한 사람들이니까 그런 상상도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마지막 날은 아침 식후 이별을 하는데 먼저 북쪽 가족들이 상봉장을 떠났다. 텔레비전에 이럴 때 많이들 울던 광경이 생각이 났다. 지금 가면 언제 다시 볼까 하면서 차창에 매달려 울며불며 하던 이별 광경이 눈앞에 전개되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버스가 우리 앞에 잠간 서있더니 슬슬 북쪽으로 간다. 가족들도 가는가보다 하고 대충 손을 흔들었고 버스도 시야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북쪽으로 빨리 달려 가버렸다.
나이가 들어 월남한 사람들은 헤어진 가족들의 얼굴을 서로 알고 있으니까 늙어도 옛 얼굴을 기억해 울고 웃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전혀 얼굴도 모르는 가족들은 그들이 피붙이라고 해도 그다지 애틋한 감정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 걸 보고 남북이 쇼를 한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진정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의 애달픈 심정을 안다면 판문점이나 금강산에 상설면회소를 두고 일 년 내내 만나게 하면 될 것인데 왜 이렇게 요란스럽게 떠들며 행사를 치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북쪽의 가족들은 그렇게 떠나고 우리는 약간의 시간이 남아 매점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예의 그 이북 사나이를 만났다. 처음에는 무찔러야 할 적처럼 만났다가 이제는 정이 들어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나는 그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의 가슴에는 태극 마크의 배지가 그의 가슴에는 김일성 마크가 그려진 배지가 달려 있었다. 요즘도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 언제 다시 볼 수가 있을까? 다음에는 관광으로 금강산에 꼭 다시 오고 싶었다. 그때 겉으로 무뚝뚝하면서도 정이 깊었던 이 사내도 꼭 다시 보고 싶었다.
2006년 6월 20일부터 6월 25일까지 있었던 제13차 남북이산가족 상봉단은 이렇게 행사를 마치고 우리 쪽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잠간 동안의 가족들의 상봉과 이별은 옆에서 보기에도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이념이 무엇이기에 인간을 이렇게 비참하고 슬프게 하는 것일까? 전쟁까지 일으키면서 서로를 죽이기까지 하는 것일까? 그리고 세월은 많이도 흘러갔건만 그 감정은 왜 이렇게 남아서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일까?
611명의 우리 쪽 가족들은 재입국 절차를 밟고 있었고 정부 측 인사들은 따로 출국절차를 밟고 있었다. 명단은 '가나다' 순으로 되어 있어 내가 가장 먼저 출국심사를 받게 되었다. 서류를 심사하던 이북 장교가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명단을 들여다보더니 이름이 없다고 한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동안 말투나 행동이 그들의 눈 밖에 난 지도 모르겠다. 나만 이북에 잔류한단 말인가 하는 걱정이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올랐다. 그때 우리 정부인사 한 사람이 그 서류를 들여다보며 "그 분 이름이 맨 꼭대기에 있잖아요."하고 짜증 어린 지적을 하자 그제야 그 장교는 나에게 지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상대를 위협하고 조정해보는 버릇이 있었다.
짧은 금강산 체류기간이었지만 한 십년은 살다 온 느낌이었다. 온통 흑백의 나라, 색깔이란 전혀 없는 곳이었다. 농민들의 옷매무세나 행동, 표정 또한 그들의 강산과 똑같이 경직되고 무감동한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그런 지시를 받았겠지 저러다가도 지시가 바뀌면 죽었다 살아난 부모 보듯이 길길이 뛰며 반가워할 것이다. 밤에도 불빛을 볼 수 없는 민가. 이산가족 상봉 현장으로 그 많은 버스가 상향등을 켜고 긴 행렬을 해도 누구 하나 손 흔드는 광경을 볼 수가 없었다. 휴전선을 넘어 오니 그렇게 유치하고 천박하게 보이던 우리 쪽의 알록달록한 간판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불친절하고 무표정한 가게의 주인들의 얼굴이 너무도 반갑고 다정스럽게 느껴졌다.
3. 외국인 무료진료.
7년간 대구적십자병원 재직시절을 회고하면서 가장 먼저 남북이산가족 상봉단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가장 짧았던 기간의 일이지만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원근무 중에 가장 오래했고 자랑스러운 일은 '이주노동자(외국인노동자) 무료진료'였다. 대구적십자병원의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는 2000년 중반부터 매월 2째, 4째 일요일 이루어졌다. 병원이 돈벌이도 잘못하면서 외국인 무료진료를 한다니까 잘한다는 사람보다는 못한다는 사람이 더 많았다. 심지어 서울적십자 본사에서는 무료진료를 하지 말라고 연락까지 왔다. 딴 곳도 아니고 본사에서 이런 통보를 받고 나니 화가 났다. 하지만 오기가 생겨 더 용기가 났다.
본사에서는 정상적으로 취업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모두가 의료보험이 되니까 굳이 무료진료를 받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일요일 그런 곳에 오는 사람들은 불법취업자들이기 때문에 진료를 해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적십자 본사는 전장에서도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진료를 해주는 게 적십자의 기본 정신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불법취업자들은 진료를 하지 말라고 하니 누가 들어도 웃기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생각하건대 돈도 벌지 못하면서 엉뚱한 짓을 하는 내가 미워서 그런 지시를 한 것으로 짐작이 간다. 직원들이 약간 동요하는 분위기였다. 짐짓 큰 소리로 말했다. '만약에 경찰이나 누구라도 불법 체류자를 체포하러 오면 몽둥이로 때려 쫓아라. 뒤 책임은 내가 진다.'
무료진료는 평일에 하면 쉽지만 이런 날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병원에 오기가 힘이 들었다. 그 사람들은 대구 시내에만 사는 것이 아니고 지방도시인 성주, 상주, 영천, 칠곡, 의성, 안동 등에서도 근무를 하기 때문에 평일에는 병원을 잘 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내에 있는 노동자도 평일 날 병원에 가게 해주는 회사는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는 2주에 한 번씩 일요일마다 진료를 하게 되었다. 무료진료의 문제는 돈과 의사 수급이 가장 큰일이었다. 힘들게 여기저기 다니며 약값을 모으고 또 일할 사람들을 모아 일을 시작했다. 7년 동안 대구적십자병원에 근무하며 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사람들 때문이었다. 시내 각 대학의 전공의들, 경북대 의대생들의 봉사모임인 '장승'과 영남대 의대생의 '나눔 자리', 적십자 부녀회원, 통역 봉사원, 노동상담 목사님들, 법률상담 변호사님들, 그리고 우리 병원 직원들과 소수의 내 친구들 이런 천사 같은 분들이 있기에 그 무료진료는 가능했다.
멀리 아프리카 케냐에서부터 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스리랑카, 파키스탄, 인도 그리고 근동의 몽골, 필리핀, 중국 출신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진료 경비는 대구적십자병원과 대구시 의사회에서 주로 갹출되었다. 내원하는 노동자들은 내과 환자들이 가장 많았다. 정신과 환자의 의외로 거의 오지 않아 나는 진료보다는 원장으로서 역할이 필요해서 나오게 된 것이다. 변호사님들이 돌아가면서 한 분씩 오고 목사님들이 오면 이 분들은 서로가 모르기 때문에 누군가가 다리를 놓아주어야 했다. 전공의들도 병원별로 순환제로 나오기 때문에 병원의 직원들과 이들을 연결시킬 사람이 필요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훌륭한 사람도 아닌데 본의 아니게 일요일 진료 때마다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료의 초기에는 환자들이 소문을 듣고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김경태 목사님이 경영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상담소'를 통해 오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그 쪽에서는 평소에도 수십 명씩 교회에 살고 있어 그 사람들끼리 연락이 되어 아예 승합차로 오기도 했다.
무료 진료 팀의 분야별로 보면 진료를 위한 의사들이 있고 목사님들은 특수사목활동으로 노동자들의 인권이나 임금문제와 체류기간 연장 등에 대한 상담과 해결을 해주었다. 옆에서 듣다보면 괘씸한 사업주가 많았다. 불법 체류자라는 약점을 이용해서 노임을 후려치기도 하고 떼어 먹기도 했다. 합법의 경우도 악질 업주는 돈을 떼어 먹기도 했고 좋은 사장이라도 경기가 좋지 않으면 봉급을 주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학력도 모자라는데도 한 사람도 화를 내며 이야기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마치 남의 말을 하는 것처럼 차분하게 표현했다. "몇 달치 봉급을 받지 못했으면 먹고 사는 건 어떡해요?"라고 물으면 "주변에서 도와줘서 굶지는 않아요." 그들은 과장해서 말하지 않고 흥분해서 떠들지 않았다.
내가 만약 외국에서 이런 꼴을 당했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까? 입에 거품을 물고 억울함을 토해냈을 것이다. 업주를 욕하고 나아가 그 나라 사람 전체를 욕했을 것 같다. 많은 노동자들이 봉급문제로 상담을 하건만 한사람도 예외 없이 차분하게 그들의 입장을 말하는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하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예의와 염치가 있는 모습을 보며 많은 걸 배웠다. 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경우는 변호사님들에게 의뢰를 하게 된다. 변호사님들은 한번 상담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몇 날 며칠씩 그분들의 사무실에서 문제를 도와주는 경우도 많았다.
의과대학생들은 경북의대와 영남의대 두 곳에서 봉사를 나왔다. 이 학생들은 일요일 봉사 말고도 딴 곳에서도 의료봉사활동도 하고 있는 동아리였다. 나는 의과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전공의도 가르쳤지만 속으로 의사나 의대생들은 항상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의 집단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적십자대구병원에서 만난 이 젊은 의사나 학생들은 이런 편견을 한꺼번에 박살을 내주었다. 어떤 학생들은 시험 기간 중에도 봉사를 나오기도 했다. 인간이란 좁은 곳에서 작은 눈으로 본 편견을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두고는 그것으로 사물의 전체를 평가하는 잣대로 평생 쓰고 산다.
이런 곳에서 활동을 해보지 않았다면 나의 선후배들에 대한 편견을 평생 갖고 살았을 것이다. 젊은 의사와 학생들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고마운 마음에 진료를 마치고는 함께 저녁을 먹게 되고 노래방에서 뒤풀이를 할 때도 많았다. 경북대 의대 '장승 팀'과 영남대 의대 '나눔 자리'는 서로 교류가 없었던 탓에 같은 일을 하면서도 처음에는 서로가 서먹서먹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자리를 만들어 먹고 마시는 가운데 두 학교는 형제자매처럼 친해져 갔다.
학생들에게 나중에 전공의가 되어서도 봉사를 나오고 전문의가 되어서도 봉사를 계속하자고 세뇌교육을 꾸준하게 시켰다. 이 사람들과 회식에서 술에 취해 오면 우리 집사람이 자주 핀잔을 주었다. 전공의 때 우리 주임교수가 2차까지 따라와서 분위기가 다 깨졌다고 그렇게 욕을 했으면서도 나이가 드니 나 또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적십자 부녀봉사회'에서 대개 10명 정도로 봉사를 나오는데 40대에서 60대쯤의 부인네들이었다. 텔레비전이나 각종 언론에서 연말에 국군 위문품 주머니 만들기나 가을 적십자사 주최의 바자회 같은 곳에 봉사하는 주인공들은 고관대작들의 부인들이다. 그런 분들은 우리 모임 같은 곳에는 흥미가 없다. 이렇게 초라하게 꾸려지는 모임에는 살기가 빠듯한 부녀봉사자들만 모인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은 어렵게 사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는 사실이다. 언뜻 생각하면 여유 있는 사람들이 남들 잘 도와줄 것 같은데 말이다.
처음에는 봉사자들이 별 할 일이 없었는데 나중에 환자들에게 점심을 주기 시작하면서 이 분들의 할 일이 많아지고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다. 부녀봉사자들은 봉사하면서도 없는 살림살이에서 몇 푼씩 모아 점심 대접에 보태 쓰라며 월 10만원씩을 내어 놓았다. 적십자사나 그 산하 단체에서는 아무 도움을 받은 적도 없건만 이 부녀봉사회에서는 '빈자의 등불'이라는 말처럼 이 분들의 성금은 다른 일요일 봉사자 모두에게 말없는 교훈을 주고 소리 없는 큰 격려였다. 그 10만원은 내게는 1억원과 같은 귀중한 돈이었다.
초기의 점심 식단은 어묵, 김밥, 바나나, 초코파이, 닭튀김, 돼지고기 수육과 순대, 컵라면과 봉지 커피 등이었다. 처음에는 김밥이 가장 인기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많이 준비했다. 그러나 김밥은 항상 남아돌았다. 이상한 일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김밥이 남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알고 보니 김밥은 우리나라와 일본 사람밖에 먹지 않는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조선족 말고는 김밥을 먹는 민족이 없었기에 김밥이 늘 남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조선족만 김밥을 먹었다가 나중에 중국 출신도 먹게 되었다. 회교를 믿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아 차츰 식단도 날이 가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은 식사 때 꼭 자신이 먹을 만큼만 손을 대었다. 진료 끝에 음식이 남아 싸가라고 주어도 절대 사양했다. 기왕에 남는 음식이라면 싸가서 저녁으로 먹거나 친구에게 줄만도 한데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행동은 그들 나라에서 해 오던 습관 탓인지 아니면 가난한 적십자 살림을 알고 일부러 체면을 차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난해도 인격을 팔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자주 감동을 받았다.
한 봉사자 할머니는 딸이 직장 생활을 하기 때문에 외손녀를 데리고 병원에 왔다. 처음에 업고 다니던 갓난 애기가 어느덧 걸어 다니는 소녀가 되었다. 이 소녀는 우리 진료실의 마스코트처럼 되어 자주 오는 외국인들과 장난도 치고 웃고 떠들어 따뜻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를 했다. 이 소녀의 성장을 보며 우리의 보이지 않는 진료도 점차 저렇게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라는 자부를 가져보곤 했다.
통역 봉사자도 중요한 몫을 했다. 가장 쓰임새가 많은 말은 중국말이었는데 '위 군'이라는 경북대학교 공과대학에 유학 온 학생이 주로 맡아주었고 또 한 여학생도 자주 왔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위 군은 상하이 출신으로 부모들은 모두가 공산당원으로 두 분 다 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다. 위 군은 학교에서 밴드부에서도 활약을 했는데 이 팀들이 병원 외국인 노동자 잔치모임에서 연주도 해주었다. 위 군은 학업이 끝나면 중국으로 돌아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일본이나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계속 하고 싶다며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동료 학생들은 "위 군은 자본주의 나라에 잘못 와서 완전히 버린 자식이 되었다"며 자주 농담으로 그를 놀리곤 했다.
▷필자 약력
- 권영재(69)
-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 현 동승병원 진료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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