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실사구시<實事求是>

입력 2015-12-08 03:00:01

춘추전국시대 조(趙)나라 무령왕은 '호복기사'(胡服騎射)라는 사자성어를 낳은 인물이다. '호복기사'란 오랑캐의 옷을 입고 말을 타면서 화살을 쏜다는 것으로, 비효율적인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성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령왕이 거추장스러운 복장을 간편하게 바꾸고 전법(戰法)을 기동력 위주로 바꾼 데서 나온 말이다.

당시 중원을 지배하던 사상 체계를 고려하면 혁명적인 결단이었다. 그렇게 북방 유목민의 제도를 수용하는 개혁으로 조나라는 강국으로 부상했다. 형식보다는 실질에 주목한 것이다. 이 같은 정신을 계승한 사람이 현대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그가 남긴 '흑묘백묘'(黑猫白猫)는 중국이 이념적인 굴레를 떨치고 실사구시의 개혁 개방을 추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고양이의 털 색깔은 외형과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은 쥐를 잡는 일이다. 문화혁명이라는 극단적인 이념의 허울을 벗고 그렇게 실용주의를 표방한 중국은 오늘날 미국과 맞먹는 G2 시대를 열었다.

조 무령왕이나 덩샤오핑이 추구한 것은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전형이다. 후한서에서 인용한 실사구시는 '옛것을 바탕으로 사실을 추구한다'는 뜻이었다. 청나라 초기 고증학을 표방한 학자들이 공리공론만을 일삼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을 배격하여 내세운 표어이다. 그 영향으로 조선에서도 '실학'이라는 학파가 탄생하면서 당시 사회적 모순을 개혁할 대안적 사상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을 계승한 노론 중심의 지배계급은 유교적 명분론에 경도되어 실학파의 사회개혁 요구를 배척했다.

인조반정 그 자체가 이미 실사구시와는 거꾸로 가는 정변이었다.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것이 빌미가 되기는 했으나,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 세력이 인조를 내세워 일으킨 쿠데타에 다름 아니다. 그 결과는 혹독했다. 흥기하는 후금과 쇠락 일로에 있던 명나라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의 중립 정책이 무너지면서 호란을 자초했다.

친명배금(親明拜金)의 명분을 표방하다가 또다시 국토가 짓밟히고 국왕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항복하는 전무후무한 치욕을 당하게 된다. 그 후 조선의 운명도 마찬가지이다. 명분에 매몰한 성리학적 세계관은 조선사회의 동맥경화를 가중시켰다. 중흥의 기회였던 실학적 개혁론을 수용하지 못한 채 망국의 길로 치닫게 된 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의 현주소는 어떤가.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등 주변 열강의 노골적인 패권 싸움 속에서 나라와 국민을 보전하기 위해 얼마나 슬기롭게 대처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내우외환에 자중지란이다. 정치권이 안팎으로 패거리를 지어 이전투구를 벌이는데 편승해 사회는 좌우의 이념으로 갈라져 싸우고 개인과 집단은 이기주의에 눈이 멀었다.

여당과 야당은 정권 교체를 통해 국정을 책임질 공존 세력이 아니라 타도해야 할 적군일 뿐이다. 외적이 침략해와도 힘을 모아 물리칠 생각보다는 네 탓에만 열을 올릴 집단이다. 당리당략에 정치 개혁안과 민생 법안을 볼모로 삼다가 툭하면 거리로 뛰쳐나간다. 그러니 불법'폭력시위를 일삼고 법질서와 공권력을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횡행한다. 민중이 총궐기해야 할 만큼 현 정권과 정치체제가 타도의 대상인가. 무엇을 위해 투쟁을 하며 얼마나 더 쟁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가.

우리 사회는 너무 과열되어 있다. 한물간 명분 논쟁이나 되풀이하고 허구한 날 밥그릇 싸움을 벌이다가 집안 거덜나는 줄 모른다. 이러다간 그나마 이루어놓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과조차 다 까먹을 판이다. 극단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와 정치 구조를 극복하는 길은 주관과 감정을 내려놓고 객관과 사실을 존중하는 것이다. '실사구시'의 반전이 없는 정치적 구태와 사회적 혼란이 지속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없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