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해의 엔터 인사이트] 사골 국물 같은 배우 박혁권

입력 2015-12-08 03:00:01

길태미가 뭐라고…맛있게 연기하냐

SBS 드라마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길태미.
JTBC 드라마
JTBC 드라마 '밀회' 강준형.

#능청스러우면서 강단 있는 연기

#드라마 '밀회'서 대중 사로잡아

공들여 오래 끓인 사골 국물이 깊은 맛을 낸다. 사람이 하는 일도 별반 다를 게 없다. 한 분야에서 꾸준히 제 몫을 하며 역량을 쌓은 이가 결국엔 인정받기 마련이다. 물론 기회를 만나야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기회 역시 재능을 잘 갈고닦아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가 된 자만이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최근 푹 고아 놓은 고기 국물처럼 제맛을 과시하며 승승장구하는 연기자가 한 명 있다. SBS 월화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삼한제일검 길태미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박혁권이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닌 검객이지만 겉으로는 장신구에 화장까지 곁들여 치장하고 간드러진 말투와 함께 악행을 저지르는, 이중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해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연극무대에서 '연기 좀 하는', 영화-드라마 조연으로, 그리고 이제는 존재감 돋보이는 한 작품의 주역으로 거듭나 진국의 참맛을 과시하고 있다.

◆길태미, 진가 보여줄 수 있었던 행운의 캐릭터

'육룡이 나르샤'의 길태미는 이미지 자체만으로 충분히 돋보일 수 있는 캐릭터다. 화려한 옷차림에 장신구와 눈 화장까지 곁들인 고려시대 중년 무사라니. 사극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설정인 건 물론이고 강렬한 외모 설정으로 '극 중 꽤 무게를 실어주는 인물'이란 사실을 자연스레 알 수 있게 만든다. 단 자신의 힘을 악용해 약자 위에 군림하는 양면적인 성격과 강한 외형적 이미지를 표현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주목도가 높은 만큼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경우 치명타를 입을 확률도 크다. 연기 좀 한다고 아무나 도전할 순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캐릭터를 박혁권에게 맡긴 건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다수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능글능글하거나 또는 소심하고 어딘가 모자란 남자의 이미지를 보여줬던 터라 길태미라는 개성 강한 인물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질적인 느낌이 양면적인 성격의 길태미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져 시너지를 냈다. 시청자 입장에선 '밀회'나 '펀치' 등의 드라마에서 익숙해진 박혁권이란 배우의, 처음 보는 낯선 모습에 일단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리고 박혁권이 능청스럽게 묘사하는 길태미라는 캐릭터의 매력에 슬슬 빠져들게 된다. 삼한제일검이란 설정과 달리 뛰어난 액션을 보여준 건 아니지만 등장하는 매 신마다 임팩트 있는 표정연기와 대사처리로 몰입도를 높였다.

길태미는 캐릭터의 존재감으로만 따졌을 때 '육룡이 나르샤'의 주연으로 활약하고 있는 톱스타 유아인을 넘어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실제로 이 드라마가 방송된 후 공식 게시판을 비롯해 관련기사 댓글 창과 커뮤니티, 또 SNS 등에서 가장 호응도가 높은 등장인물이었으며 심지어 극 중 퇴장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팬들 사이에서 구명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을 뿐 아니라 '육룡이 나르샤'의 초반 인기 견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캐릭터다. 심지어 팬들은 '예쁘다'는 뜻으로 김태희 앞에 붙었던 별명 '태쁘'를 길태미의 이름 앞에 사용하며 열광했다.

지난달 30일 방송분에서는 적들이 급습해 칼을 겨누고 있는데도 화장대에 앉아 "눈 짝짝이 되면 너희 다 죽는다"라고 매섭게 경고를 날리는 모습을 보여줘 또 한 번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체 사이에서 국밥을 먹으면서 "이게 뭐라고 이렇게 맛있냐"라고 범상치 않은 언행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이어 다음 날인 12월 1일 방송에서는 결국 이방지(변요한)와의 맞대결에서 패해 죽음을 맞이했다. 맞대결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무섭게 공격을 퍼붓다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상대를 도발하는 등 길태미 캐릭터의 특징을 잘 살려냈다. 이방지의 일격에 쓰러지면서도 "내가 뭘 잘못 했냐. 약자는 언제나 강자에게 짓밟힌다.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것"이라고 일갈하며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악당이지만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상대에 맞서는 검객의 모습을 드러내 매력지수를 높였다.

이날 길태미 캐릭터의 퇴장 이후, SBS는 식지 않는 열기에 보답하겠다며 '길태미 위크'를 지정해 눈길을 끌었다. '육룡이 나르샤' 홈페이지에서 한 주를 통틀어 길태미 역의 박혁권과 관련된 영상과 웹툰 등의 제작물을 요일별로 올려 시청자의 성원에 응답하겠다는 기획이다. 지난 1일에는 길태미 메이크업의 포인트였던 아이섀도와 틴트가 '태미섀도' '태미틴트' 등의 기발한 가상의 제품으로 소개돼 웃음을 자아냈다. 또한 '태미뷰티 토킹 미러 길태미 편'이란 뷰티 프로그램 패러디 웹툰이 공개돼 재미를 주기도 했다.

향후 박혁권은 극 중 길태미의 쌍둥이 형제 길선미를 연기하며 꾸준히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고돼 팬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연극, 독립영화 거치며 연기력 다져

길태미라는 인상적인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배우의 기존 이미지와 연기력, 이 둘의 조화가 잘 맞아떨어져야만 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박혁권은 드라마에서 주로 속물 캐릭터를 연기하며 능청맞은 이미지를 잘 쌓아왔고 동시에 연기력으로 어필하며 신 스틸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연극무대에 오르며 차곡차곡 다져둔 연기력이 제대로 빛을 발했다. 말 그대로 박혁권은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의 정통 연기자다.

홍대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산울림 소극장의 단원으로 무대에 올랐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쉴 틈 없이 연극을 했고 동시에 독립영화에 꾸준히 출연하며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 감각을 익혔다. 이 시기 임창정 주연의 코믹 호러영화 '시실리 2㎞'에서 주요 캐릭터를 연기하며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충무로 상업영화에서는 단역을 맡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다 2007년 화제의 드라마였던 '하얀거탑'에서 꽤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바람의 화원' '드림하이' '뿌리깊은 나무' 등의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인물을 연기했고 영화계에서도 조금씩 '대사 많은' 캐릭터를 따낼 수 있었다. 2009년 개봉된 영화 '차우'에서 연기한 주연급 조연 신형사, 이듬해인 2010년 개봉작 '의형제'에서 보여준 국정원 직원 고경남 등이 박혁권의 인지도를 높여준 캐릭터다.

박혁권을 '알 만한 배우'로 떠오르게 해준 대표적인 작품은 역시 JTBC 드라마 '밀회'였다. 앞서 같은 방송사의 '아내의 자격'에서 꽤 주목받는 역할을 소화해 호평받은 직후다. 속물근성 강한 음대 교수를 연기하며 아내 역의 김희애, 그리고 자신이 키운 피아노 천재 유아인 사이에서 감정싸움을 벌였다. 사실상 주연이라 해도 될 만한 비중 있는 인물을 인상적으로 소화해 연기파라는 말을 듣게 됐다.

이후로는 승승장구였다. 드라마 '펀치' '프로듀사' 등 인기 드라마에 주요 배역으로 캐스팅됐고 여러 작품에 카메오로 불려다닐 정도로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연기력과 함께 표정 속에 페이소스를 머금고 있어 어떤 인물을 연기해도 무난히 소화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진 배우가 박혁권이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주름과 과하지 않은 표정이 보는 이들을 편안하게 만든다. 격한 표정 변화 또는 큰 움직임 없이도 깊이를 보여주는 배우는 흔치 않다. 박혁권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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