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 30대 남성인 나의 어느 하루를 들여다보자. 전날 과음으로 아침에 일어나 자가용 대신 버스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출근한다. 내게서 풍겨오는 지독한 술냄새에 주변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린다. 이럴 때면 스스로 '아! 이런 게 출근충이구나' 싶다. 회사에 와서는 부장에게 눈도장을 찍자마자 일하러 거리로 나선다. '하하' '호호' 거리며 웃는 시민을 상대로 취재할 때 나는 그들의 분위기를 깨뜨리는 '진지충'이 되고 만다. 취재를 마치고 회사에 앉아 기사를 작성할 때는 '설명충'이 되어야만 한다. 이날 하루 세 종류의 벌레가 됐다.
우리는 전 국민이 벌레인 세상에 살고 있다. 다소 도발적인 말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몇 해 전 누리꾼들은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이용자를 혐오하는 뜻에서 '일베충'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게 전부였다. 2015년 현재 '충'은 그 가짓수도 다양해졌다. '노인충' '찍먹충' '부먹충' '꼰대충' '급식충' 등의 새로운 '충'이 생겨났다. 심지어 '설명충' '진지충'처럼 특정 성향의 사람을 지칭하는 접미어로도 사용되면서 국민 전부를 벌레로 만들고 있다.
나는 '○○충'이라는 신조어가 몹시 거슬린다. 신조어가 생겨난 게 어디 어제오늘 일이겠느냐만 이 신조어가 못마땅한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충(蟲)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바늘 가는데 실 가듯 '충'에 으레 따라붙는 표현이 있다. 바로 '극혐', 극도로 혐오한다는 뜻이다. 용례를 살펴보자. "급식충 극혐" "맘충 극혐" 등의 방식이다. 반면 '대통령충'이나 '재벌충'과 같은 표현은 없다. 결국 '충'은 화자 자신보다 약자라 여겨지는 대상을 향해 비하와 혐오의 정서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마치 게르만 우월주의 같은 느낌이다.
얼마 전 한 임상심리전문가와 이야기를 하던 중 인터넷 댓글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충 극혐"이라거나 비하와 혐오 등의 공격 성향을 띠는 댓글을 남기는 이들의 일상이 어떨지 몹시 궁금했었단다. 그래서 이들의 SNS만 집요하게 찾아 들어가 봤는데, 너무나 일반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 놀랍기까지 했단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럼 그 사람들이 반사회성이라도 띨 거로 생각하셨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런 식의 댓글을 쓴 이들이 또 다른 곳에서 쓴 댓글까지 모조리 훑어 보면 학문적으로 '반사회성 성격군'에 해당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답했다.
대화의 끝은 슬펐다. 상대적 약자를 향한 공격성 표출이 특정 성격군의 특징이 아니라 단순히 인터넷 하위문화의 한 형태로 일상적이게 흘러가는 듯해서다. 나의 이런 생각이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슬프다. 자신과 다른 입장에 있다고 해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게 단순히 장난에 그치지 않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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