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귀나무 붉은 그늘 아래
늙은 소 묶어놓고 연못가
내 둥글게 구부리고 잠들었네
거친 세월이 가고
커다란 바위 같은 천둥 내 잠 속으로 떨어져 갈라지고
자귀나무 검은 그늘 아래 문득 잠깨었을 때
연못은 여린 짐승처럼 온몸 뒤틀며
붉은 자귀꽃 뱉어내고 있었네
늙은 소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귀나무 붉은 그늘 아래
내 누구의 사랑도 아니었을 때
내 손에 젖은 편지 들려 있었네
검게 번져 읽을 수 없는
버릴 수 없는 젖은 편지 들려 있었네
(부분. 『유리에 가서 불탄다』. 세계사. 1995)
한때 이 시인을 잘 안 적이 있었다. 그의 시는 관념적이고 형식주의적이다. 젖은 편지는, 원본의 편지가 존재하고 그것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지시하면서 플라톤적인 이데아 혹은 원리로서의 아르케(=근원(根源) 및 시원(始原)을 의미하는 말로, 고대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이나 세계의 원질(原質)이라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함)를 염두에 둔다. 그러나 그러한 이데아나 아르케는 존재하지 않거나 이데올로기일 가능성이 많다. 비록 그 젖은 편지를 찢는다 해도 시인은 여전히 그 부재의 가장자리를 더듬는 관념성만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이 시인을 잘 안다고 한 적이 있었고 그의 진심, 붉은 자귀꽃을 씹어 먹는 늙은 소의 독해를 이해한다 해도, 더 나아갈 곳이 보이지는 않는다. 이 시인의, 우리의 진짜 젖은 편지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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