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의 생각] '유희진'이 그립다

입력 2015-11-26 01:00:05

일일연속극이나 아침 드라마는 은근히 재미있다. 사회부 경찰팀 시절, 아침에 해장하려고 간 국밥집에 늘 켜져 있던 아침 드라마는 식당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기 싫을 정도로 사람을 몰입하게 만들었다.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이 보고 계시는 일일연속극도 이야기 구조는 뻔하지만 '욕하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심지어는 악녀 주인공이 착한 여주인공과 대면하는 신에서 '이쯤 되면 따귀를 때리거나 물 뿌리는 신이 나올 때가 됐는데…'라고 예측하다가 그게 맞으면 "그렇지!" "브라보!"라며 무슨 스포츠 경기 보듯이 감탄사를 내뱉곤 한다. 대부분 아줌마가 TV를 보면서 "저런, 저런, 망할…, 썩을…" 식으로 욕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그 마음이 나도 이해가 됐다. 처음엔 따귀 신도, 물벼락 신도 재미있었지만 어느 순간 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러니깐 막장 소릴 듣는 거지'라고 욕하며 보고 있는 나 자신이 때로는 한심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10년 전 방영된 드라마의 한 인물이 떠올랐다. 2005년 MBC 수목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나온 '유희진'(정려원)이란 인물이었다. 유희진은 학생 신분인데도 중형차를 소유할 수 있고, 위암을 앓았음에도 외국에서 치료받을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여성이다. 그리고 유희진은 서울 5성급 호텔 사장의 아들이며 자신이 직접 경영하는 레스토랑을 갖고 있는 현진헌(현빈)과 사귀는 사이였다. 현진헌은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김삼순(김선아)과 묘하게 엮인 사이다. 이 드라마에서 유희진의 미덕은 아침 드라마나 일일연속극에서 말하는 "네깟 것이 감히…"라는 식의 대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보다 무엇 하나 나은 게 없어 보이는 김삼순에게 유희진은 조곤조곤 "내 남자였어요"라며 김삼순을 설득했고, "페어플레이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게다가 유희진은 현진헌의 마음이 김삼순에게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한 뒤에는 쿨하게 현진헌을 김삼순에게 보내준다. 적어도 내가 본 드라마 여주인공 중 가장 쿨했던 부잣집 딸내미가 바로 유희진이었다.

매일같이 TV 속에 눈알을 부라리며 레이저를 발사하는 부잣집 여주인공과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빽빽 소리만 지르는 악녀 주인공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유희진은 정말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캐릭터란 생각이 든다. '땅콩 회항'부터 '백화점 갑질'까지 여러 곳에서 "네깟 것이 감히…" 신이 현실에서도 연출되고 있는 2015년이기 때문이다. "내 남자였어요"라며 김삼순의 마음을 돌려보려던, 김삼순에게 현진헌을 보내면서 꿋꿋하게 버티려 했던, 비록 머리채는 한 번 뜯었을지언정 자신을 생각해 죽까지 쑤어 온 김삼순의 정성을 생각해 그녀가 만들어 온 죽을 다 비웠던 2005년 드라마 속 유희진의 모습을 이제는 현실은커녕 드라마에서조차도 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찌 보면 좀 서글프게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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