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김장 그리고 나눔

입력 2015-11-23 01:00:03

1950년 경주 출생. 대구고·성균관대 법학과 졸.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1950년 경주 출생. 대구고·성균관대 법학과 졸.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人家一年之大計 김장은 중요한 행사

이웃 간에 정 주고받는 '나눔의 문화'

새내기 행원들과 김장 담가 나눔 실천

올해는 내가 담근 김장 함께 나누고파

얼마 전 입동이 지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이 다가왔다는 말이다. 새벽녘 공기는 입김이 나올 정도로 쌀쌀해졌고, 집 앞을 샛노랗게 물들였던 은행잎은 마치 제가 첫눈인양 속절없이 떨어지더니 어느새 앙상한 속살을 드러낸 채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공기가, 나무가 그리고 자연이 우리에게 이제 겨우살이를 준비해야 한다는 눈짓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집사람이 다음 주말 가족 총동원령을 내렸다. 매년 이맘때만 되면 하는 김장 때문이었다. 집사람은 김장철만 되면 어김없이 온 가족을 불러 모아 200포기가 넘는 어마어마한 양의 김치를 담근다. 아이들도 출가했고, 이제 나이도 있으니 양을 좀 줄이거나 그냥 사서 먹자는 말을 몇 번이나 했지만 집사람은 요지부동이다. 아이들과 친척들까지 다 나눠줘야 하는데 어떻게 양을 줄이며, 또 사먹는 김치보다 직접 담가 먹는 김치가 정성과 손맛이 들어가 더 맛있기에 수고스러워도 직접 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통 큰 집사람 덕분에 김장을 하는 날이면 집안이 마치 잔치라도 하는 것처럼 북적북적대고는 한다.

사먹는 김치가 대세인 요즘에야 이렇게 온 가족이 모여 김장을 하는 풍경이 흔치 않은 모습이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네 어머니들은 가장 먼저 김장준비를 서둘렀다. 월동준비의 첫 번째인 김장은 인가일년지대계(人家一年之大計)라 할 만큼 중요한 연례행사였다. 김장하는 날은 온 가족의 대소사이자, 크게는 마을 잔칫날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이웃 아주머니들은 전날부터 재료 준비를 위해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무를 썰면서 바지런히 움직였고, 온 남정네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장독이 들어갈 구덩이를 깊숙하게 파고 땅을 다졌다. 하다못해 아랫목에 누워만 계시던 할아버지까지 간을 보며 '짜다' '달다' '이것이 부족하다' '저것을 더 넣어 봐라' 한마디씩 거들었다. 누구 하나 김장을 공으로 먹지 않았다.

그러다 슬슬 힘에 부칠 때면 방금 삶아낸 따끈한 돼지고기 수육이 나와 겉절이에 싸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김장을 마치고 나면, 여분의 통에 김치를 넉넉하게 담아 일손을 보탠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김장을 하는 날은 먹을 것이 넘치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마치 잔칫날 같은 들썩거림이 집 안에 가득했다. 김장은 가족과 이웃 간에 서로 일손을 보태기도 하고, 김치를 나눠 먹기도 하며 정(情)을 주고받는 '나눔의 문화'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이제는 그런 정겨운 풍경이 많이 잊힌 것 같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투닥거리며 김장을 하는 모습도, 친지들과 이웃사촌을 찾아다니며 담근 김치를 나눠주던 그 여유로움도 그립다.

은행장 시절, 매년 이맘때가 되면 신입행원들과 함께 김장을 담그는 행사를 했었다. 갓 입행한 새내기 신입행원들에게 나눔의 의미를 알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김장을 다 하고 나면, 정성스레 포장해 인근에 계신 어르신들댁에 직접 가져다 드리곤 했다. 1만 포기가 넘는 김장을 하느라 몇 시간 동안 허리도 제대로 못 펴고 매운 고춧가루에 눈도 따끔거렸지만, 김치를 받고 함박웃음을 지으시는 어르신들의 표정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신입행원들에게 큰 감동과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올해는 내가 직접 만든 김장김치를 이웃들과 함께 나누려고 한다. 그래서 집사람에게 이번 주말에 할 김장은 예년보다 조금 더 넉넉하게 준비하자고 이야기를 했다. 그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일손을 보태야 할 것 같다.

물론, 서툰 솜씨에 집사람에게 타박을 듣고, 한동안 허리에 파스 냄새가 끊이지 않을 게 눈에 빤하다. 하지만 나눔의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주말이 기다려진다. 마침 얼마 전 텃밭에서 수확한 고구마도 있어서, 김장김치와 같이 선물할 생각이다. 노랗게 속이 익은 고구마에 살얼음 깔린 김치를 손으로 쭉쭉 찢어 먹던 추억을 선물할 생각에 벌써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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