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강물 갠지스<3>-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입력 2015-11-20 01:00:08

꿈만 같은 스님과 재회 이후, 겨우 참고 있던 가슴에 또 불이…

※삽화: 이영철 화가
※삽화: 이영철 화가

5 조우(遭遇)

그 무렵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화가 68명의 합동 전시회가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보게 되었다. 2013년 봄이었지 싶다.

산중 생활에 특별한 일도 없었던 터라 한번 갔다 와야지 벼르다가 전시 일정에 맞춰서 상경했다. 미완으로 끝나버린 미련 때문인지 평소 내 안테나는 대부분 예술 관련 뉴스에 민감한 편인데 그곳에서 '김현정 내숭 시리즈'란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모두 13점인가 개인 코너에 걸려 있었다.

많은 그림들을 보아 왔지만 '아차'(김현정 2012년 작)란 제목을 단 젊은 신예 작가의 그림은 쌈박한 제목만큼이나 시선을 확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대단히 신선하고 인상적인 그림들이었다.

서울대 2011년도 동양화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그녀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을 기사 내용 그대로 인용해 보면 "그림에다 '아차'라는 제목을 단 이유는 곧 나 아(我)자, 모자랄 차(差)자를 써서, 겉으론 완벽해 보이지만 내면은 결핍 되어 있는 현대인의 단면을 나타내 보고자 했다" 는 것이었다.

"우아하고 고상한 한복을 입고 가장 고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인간의 양면성과, 앞에서는 칭찬하고 뒤에서는 욕하는 사람들의 위선, 즉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그림을 통해서 해학적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는 것, 그리고 자신한테도 그런 면이 있다는 걸 깨닫고 희화화하려는 의도에서 작품을 그리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림의 주제를 한복으로 정한 것도 독특했지만 스물다섯 나이를 뛰어넘는 통찰력이 인간의 심리를 꿰뚫고 있다는 측면에서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특히 풀을 먹인 한지를 그림속의 여자 저고리에다 그대로 붙여,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치마와의 차별을 시도한 콜라주 기법은 "촉감이나 시감(視感)이 실제 저고리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의도대로 치마저고리의 질감 차이가 실감나게 사실적이어서 그 대비가 놀라웠다. 젊은 세대답고 프로다운 발상에 감탄을 거듭하면서 그림 감상에 푹 빠져 있었다. 아이디어도 독특하지만 그림을 그리기도 참 잘 그렸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 그림이 참신한 것 같지요?"

소리 나는 쪽을 힐끗 돌아다 본 순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바로 그 J.M스님이었다. 찰나에 일련의 오케스트라가 정수리로부터 짜아아앙- 쏟아져 내려왔다. 나뭇잎마냥 셀 수 없이 많은 음표들이 4분의 4박자로 한꺼번에 뇌리를 두들겨 대었다. 그 동안 억누르기만 하고 살았던 감정이 깊숙한 의식의 바닥에서 댐이 무너지듯 일시에 도발하고 터져 나왔다. 폭포수처럼 한꺼번에 솟구쳐 오르는 마음 자체가 내심 충격적인데다 뜻밖의 조우에 얼마나 놀랐던지 멍청하게 눈만 껌벅이고 서있는 날 보더니 스님이 먼저 빙그레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관세음보살…"

합장을 하시는데 정중해 보였다. 질정 없이 쿵쿵 뛰는 내 심장박동 소리가 스님 귀에까지 들릴 것만 같아 노심초사하고, 그 형형한 눈빛을 바로 받지 못해 쩔쩔 매었다. 난 기독교인이므로 정서나 종교적인 문화 차이 때문이겠지만 평소에 두 손을 모아서 합장하는 불교식 인사가 염(念)이나 습(習)에 없었던 터라 더욱 허둥거렸다. 순간이었지만 스스로도 어처구니없고 겸연쩍어 웃었더니 스님도 따라 빙그레 미소를 지었는데 하마터면 펄쩍 뛰어올라 그의 목을 껴안고 깡충깡충 뛸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엄마가 손대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 물건을 몰래 만지다 들켜버린 아이처럼 난 속으로 자꾸만 스님 눈치를 살폈다. 취향뿐만 아니라 사고 체계도 난 대부분 모노(Mono)적이라서 눈치를 살피는 따위의 짓거리란 전혀 나답지 않은 행위였지만 안 하던 짓거리를 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스님의 마음에 들고 싶다는 무의식적 작용이 아니었나 모르겠다.

이렇게 만나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을, 그동안 쌓여있던 야속한 응어리가 와락 눈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릴없이 미술관 천장이나 올려다보면서 격렬해지는 감정을 억제하느라 수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행여 눈물이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런 낭패가 없을 것 같았고, 또 그런 부끄러운 모습을 들키면 창피할 것 같아서 싫었다.

"오늘 여기 들르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살님도 만나고… 무얼 그리 열심히 보셨습니까?"

치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게 음영을 처리한 테크닉이나 저고리에다 콜라주 기법을 동원한 아이디어가 참 혁신적인 것을 보고 감탄하면서 이참에 나도 한 수 배웠다, 속으로 신이 나있던 참이었다.

"저런 식으로 처리한 그림은 오늘 첨 봤거든요. 전혀 새로운 경험이라서요."

" 보살님, 혹시 미술 전공 하셨습니까? "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관심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반달 같은 눈으로 잠시 날 그윽하게 마주보던 스님은 진지한 태도로 다시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훤칠한 분이 뒷짐을 진 채 말없이 작품을 대하는 모습이 액자 프레임만 들이댄다면 그대로 그림이 됨직한 자태였다.

승복이 참 잘 어울리는 아버지 같은 스님이란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시간이 그대로 정지해 버렸으면, 저 가슴에 안길 수만 있다면. 지구상에 스님과 나, 둘 뿐이라면, 그리고 지금 이 예술의 전당이 우리 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고 기가 차는 상상을 그때 난 줄기차게 하고 있었다.

어차피 우린 변죽만 울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돌아올 때까지 끝까지 속엣 말은 한 마디도 못한 것이 두고두고 지금까지 후회로 남아 있다.

스님은 자신도 그림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단 사실과 앞으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게 될 땐 당신도 그림을 좀 그려볼 생각이란 속내를 피력했다. 수묵담채화에 뜻을 두신 듯 했다. 취향이 비슷한 점도 놀라웠지만 스님과의 조우가 결코 우연만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 날 모처럼 꿈같이 나눌 수 있었던 몇 마디 대화를 통해서 나로선 결정적인 정보를 접했다. 내년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도량의 주지 소임도 끝내고 나면 곧바로 산중 토굴로 들어가서 기도 생활을 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 말의 함의는 아마 그 때는 내 편지도 수신인을 잃게 될 것이란 뜻을 의미하는 것 같아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느닷없는 박탈감으로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으나 끝까지 그런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다. 쥐꼬리만 하게 남아있던 자존감이었을까.

꿈같이 이루어진 스님과의 재회 이후, 겨우 진정의 기미를 보이던 마음에 다시 불이 확 당겨졌다. 돌확마냥 천근 무게로 굳었으면 좋았을 그리움이 벌떼처럼 일어나 윙윙거리고 오래 묵은 앨범을 들춰내서 옛날 사진을 한 장씩 꺼내보듯 되살아난 그리움이 독사 대가리마냥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세월 가면 잊겠지, 잊어지겠지, 잔뜩 짓누르고 있었기에 누그러질 듯한 기미를 보이던 불길에 기름을 통째로 들어부은 격이었다.

6 혼란의 계절

산을 한 바퀴 휘돌아 내려온 바람이 나무 가지들을 흔들고 그때마다 부채만한 오동잎이 떨어지고, 온 마당으로 이리저리 낙엽들이 뒹굴기 시작하면 가을도 가기 전에 덩달아 마음까지 추워져서 저녁이면 서둘러 벽난로에다 불을 지폈다. 나는 미로(Labyrinth)를 탈출한 디탈러스(Daedalus)처럼 복잡하게 돌아가는 내 심경의 미로를 빠져나와 혼란에 빠진 또 하나의 자신을 관조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래오래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곤 했다.

흔들의자를 벽난로 앞으로 아예 끌어다 놓고 앉아서 하나하나 마음의 갈피를 뒤적이다보면 장래에 대한 암울함이 잡동사니로 가득한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것만큼이나 난삽하고 어지러워 심란하고 쓸쓸했다.

눈길이 닿고 마음이 닿는 온갖 것에 그리움 아닌 것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와서, 해가 저물면 그 어스름한 저녁 이내 때문에,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뎅그렁 뎅그렁 울어도, 달빛이 뜨락에 은은한 밤, 멀리서 동네 개가 겅겅 짖어도, 빗물 같은 그리움에 흠뻑 젖어 살았다.

해갈(解渴)이 안 되는 갈증 같은 그리움의 근간에는 반드시 그가 있었다. 한 번씩 불길이 치솟듯 후우욱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더운 기운이 치밀어 오르면 자지러질 것 같이 괴로웠다. 그럴 땐 음악조차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아마도 듣는다는 행위 그 자체가 일종의 여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7 나무와 사람

산간의 겨울은 빠르고 길다. 밤낮의 기온 차가 심해서 벽난로 옆에다 아예 나무바구니를 들여다 놓았더니 사위가 물밑처럼 적적하고 고요한 저녁에는 거기서 무언가 갉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짜갈, 짜그락, 짝. 짜갈… 분명 장작에서 나는 그 소리는 물리적으론 분명 더 이상 수액이 돌지 않아 장작이 말라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임에 틀림없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아마도 그것이 생나무였을 땐 몰랐을, 피 마르는 아픔이나 원래의 형체를 잃어버린 슬픔을 조곡(弔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면 내가 너무 역설적인가.

나무도 천수(天壽)를 타고 난 운명이라면 그보다 더한 행운이 무엇일까만, 일반적으로는 용도에 따라 사방팔방 제 자란 환경을 떠나 살게 마련인 것이니 백이면 백, 다 제 뜻대로 사는 일생이 못 됨을 한(恨)하는 탄식이 어찌 없을 것인가.

뜻대로 못하고 살기는 인간인 나도 마찬가지지만, 나무인들 기왕에 베어지는 목숨일 바엔, 베인 족족 궁궐이나 문화재 대들보의 영화를 어찌 누리고 싶지 않을까보냐.

절대자가 있어 내 운명도 이미 생애 가을의 어느 날인가부터는 사랑을 하게 될 것으로 정해진 것이었다면 기왕지사 혁신적이고도 환상적인 낭만과 아름다운 관계로 처리해줄 일이지 하필이면 인생 황혼에서야, 그것도 가당찮게 버거운 짝사랑일까. 부평초 같은 인생사에 삶의 동통으로 아픈 것이 어찌 나 하나에 국한된 일이랴마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인간이로되 나무의 일생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싶어지면 그지없이 심란하고 비통해서 잠이 안 왔다.

내 속에서도 참나무 장작이 내는 것 같은 그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비가(悲歌)였다. 심장이 뿌지직 뻐개지고 미어지는 듯한 틈 사이로 끊임없이 비어져 나오는 애련의 소리, 짝짜글, 짝짜글... 아마도 그것은 내 혈관을 따라 도는 피가, 빠작빠작 가슴을 조이는 탄식이고 비명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면이 계속되자 입술이 마르고 혓바늘이 돋아서 음식을 먹을 때도 무슨 맛인지 거슬리고 당최 식욕 자체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 가슴 이대로 상사(相思)를 견디면서 살아야 하나. 사랑하면 가슴 안에 늘 푸른 신호등이 켜진다고 생각했던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내 무지의 극치였던가. 그만 끝내리라, 이 노릇을 끝내야 되겠다는 생각이 또 다시 의식의 끝을 잡고 맴돌기 시작했다. 도무지 그 거대한 격랑을 어떻게 넘어갈지 막막하고, 갈수록 점점 더 지치고 자신이 없었다.

스님을 단념하리라는 작정이야 이전에도 수없이 해온 터이지만 그때마다 경험하게 되는 것은 빛이 전혀 안 보이는 터널 속에 갇혀버린 듯 마음으로 캄캄한 장막이 드리워진 것이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의 두려움이거나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빈들 같은 가슴으로 서러움이 낟가리처럼 쌓이고 참담한 좌절감은 한정도 없는 절망으로 날 끌고 다녔다. 이렇게 살아 무엇 하나, 집요하게 내 사유(思惟)를 유영하는 의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과연 이렇게라도 살아야 되나…

알고 보니 자그마치 10년 이상이나 연하인 분이었다. 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큰 산 같고, 스승 같고, 어버이 같아 자신이 한없이 왜소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랑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 대단한 억지임을 내가 어찌 모를 수가 있는가. 자신의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이 무엇인지 인식했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를 문제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일 뿐, 부정할 수 있으면 부정하고 싶은 부분이었다. 그 인물됨이 너무나 격이 달라 대책 없이 마음을 빼앗긴 결과이나, 관념적으로는 누구로부터도 환영 받거나 긍정적으로 이해 받을만한 사안이 못 된다는 것 자체가 내겐 괴로움이고, 고통이고, 슬픔이었다. 곧 한(恨)이었다.

8 소통

어느 날 스님으로부터 가뭄에 빗방울 같은 전화가 왔다. 거짓말 같은 사실에 얼마나 반가운지 나도 모르게 좋아라 함박같이 웃었다.

"…수행자를 맘에 두면 힘들어 지십시다. 상(像)에 집착하다 보면, 있음에 집착하게 되고, 그리되면 자연히 고(苦)가 따르는 것이지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살님을 위해서 이젠 부디 그 마음을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 스님의 부탁이 간곡하고도 진지했다.

수차례에 걸쳐 내 연서를 받은 데 대한 육성 답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려 깊은 스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시기를, 당신의 말씀을 '단순히 머리로만 분석하려들지 말고, 부디 가슴으로 다 받아서 그것이 이해되면 곧바로 행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부가 누누 했지만 그 말씀의 진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고 상관도 없었다. 오로지 그가 전화를 해주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이 대단하고 기뻤다.

그는 천생 자기 닦음과 관리에 철저하고 수승한 수행자로서 내가 봉착해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왜 그것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두고두고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 후부터 간혹 기회 있을 때마다 당부하기를 '아무런 바람 없이 주기만 하는 사랑, 풀잎 끝에 맺힌 이슬같이 맑은 사랑'이 아니면 욕심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는 말씀을 잊지 않았다.

스님은 당신을 이제 막 갠지스 강물에 합류한 수행승이라 본류를 따라 흘러갈 따름이라고 말했다, 현세(現世)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지 못한다면 수만 겁의 생을 윤회해서라도 이루고야 말리라는 출격 대장부였다.

근본종지(根本宗旨)를 받드는 높은 기상과 당신이 지향하는 길에 확신을 가진 기품 있는 한 수행자에게, 미혹한 중생인 내가 사랑을 빌미삼아 자칫 파계를 부추기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를 자각하게 될 때마다 난 수치심과 함께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쿵콰당…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지만 내겐 처음부터 날개 같은 것은 없었다. 수행자로서의 본분과 계율을 마땅히 지키고 구도의 길을 묵묵히 가겠다는 사람을 붙잡고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순리를 거스르고 있다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랄지, 깨달음이 자탄과, 절망과,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9. 슬픈 짝사랑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일이 생기고 또 잊혀지지만 내가 주구장창 마음으로 염원했던 일은 옛날에 잃어버린 내 유리 구두 한 짝을 들고, 어느 날 꿈같이 내 앞에 나타나 줄 왕자님이 바로 그 스님이길 바란 일이었다. 그것은 숫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일 만큼이나 어렵고 가망 없는 일 같았지만 임자를 찾기 위해 유구한 시간을 끈기 있게 찾아 헤맨 장본인이 스님이길 바란 것은 비할 데 없이 간절한 내 소망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땡,땡, 밤 12시가 되면 호박으로 변해버릴, 황금마차 속의 신데렐라 같은 환상이었지만 설령 얼 척 없는 망상일지라도 그 꿈을 꾸는 동안만은 나도 공주일 수 있다는 자체가 좋을 뿐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의 눈동자가 되고 싶었다. 하루 스물 네 시간 그가 바라보는 곳을 같이 보고 싶었고 그의 손길이나 눈길이 닿는 곳이라면 그것이 산이라도 좋고, 책이라도 좋고, 물이든, 그릇이든, 그가 보는 모든 것의 실체가 곧 나이고 싶었다. 하다못해 그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의 핸들이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적어도 차가 운행 중일 동안엔 그의 손이 시종일관 핸들을 잡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저 평범하게 나이 먹은, 초라한 인생 가을의 한 여인에 불과하지만 그는 자기 길에서 초연하고 장엄한 신념으로 형이상학적 구도(求道)를 지향하는 수승한 상근기의 수행자였다.

해 넘어가고 먼 산봉우리로부터 스멀스멀 내려온 운무가 온 동네를 부옇게 감돌기 시작하면 으스름 황혼에 그리움이 되살아나 기승을 부렸다. 체념으로 어느 정도는 진정 국면이라고 믿었던 건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던 내 희망사항이었을 뿐, 무시로 돋는 그리움은 그야말로 시도 없고, 때도 없었다.

"좋은 기계가 소음이 없듯이 부처님 길을 가는 수행자는 따로 말이 필요치 않다"던 스님은 가타부타, 이렇다, 저렇다, 연락이 없었다. 당신에 대한 마음을 거두어야 피차 어려워지지 않는다고 간곡하게 거듭하던 당부가 전부였다.

난 혼자서 분주하게 오고 가는 상념에 골몰했다. 자신에 대해 그토록 엄격하고 잡기와는 담을 쌓은 분이 얼음 같은 이성으로 내칠 법도 하건만 간헐적으로나마 나를 제도한 것은 통상 절집에서 말하는, 인연에 의해 모든 것이 생긴다는 연기(緣起)법 측면에서 배려하는 것이거나, 혹은 전생의 업이라는 카르마(Karma)로 해석해서 차마 냉정하게 대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업연의 고리를 억지로 강제하다가 자칫 끊어낸 자리에서 사사망념(邪思妄念)이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날지도 모를 것을 염려하고 나를 배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담한 기분이었다. 안타까워하는 스님의 깊은 허희(歔欷)를 기운으로 느낄 수가 있어 더욱 그랬다. 극렬하게 나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만으로 난 흥감해서 위안으로 삼긴 했지만 한편으론 나름대로의 각성도 뒤따랐다.

수행자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온갖 마군(魔軍)이 그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는데 혹시 스님의 관점에선 내가 바로 그 마구니가 아닐까 싶은 것이었다, 그 생각은 지독한 자괴감이나 상실감으로 이어져 간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비애를 느꼈다. 어차피 근원적인 그리움을 베지 못하는 한, 나는 난파선을 끌고 산으로 올라가는 사공이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쩔쩔 매면서도 바보같이 난, 단 한 번도 스님한테 전화 해볼 마음을 내어보진 못했다. 빌미로 내세울 게 마음밖에 없는지라 참는 것을 능사로 여긴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도무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알 수가 없으므로 조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불쑥 전화해서 혹시라도 그의 처지를 곤란하게 만들면 어쩌나 저어해서 극기로 자제하고 참았다. 이를테면 주제 파악이나 현실 인식을 할 만큼은 이성적이었다고나 할까, 달리 보면 그래도 나이 값은 한 셈이었다.

'노련한 사공은 수많은 폭풍우와 성난 파도를 이겨낸 경험의 결과'라는 말처럼 부단히 인내하는 학습을 통해서 난 알게 모르게 조금씩 내적 갈등을 수습할 수 있는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해 본능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했다. 온 가슴을 점령하는 그리움도, 안 되는 일에 대한 체념으로 바뀌면서 약간은 진정이 되는 것 같은 기운을 느꼈다.

사시사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단풍드는 나무라도 그 모든 현상은 다 한 뿌리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헤일 수 없이 많은 나뭇잎 중에 어느 잎은 단풍이 들고, 어느 잎은 낙엽이 되어 떨어질지라도 뿌리는 그 자체로 나무의 근본인 것처럼 내 마음, 내 사랑도 그와 같은 것이었다. 간혹 그리움이 다소 누그러진 것처럼 느낀 것은 자신과의 타협에 불과한 일시적 현상일 뿐 본질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견딜 만하다가도 한 번씩 지병처럼 도지면 입자가 하도 고와 젖는 줄도 모르고 한습해지는 능개비 같이 흠씬 젖은 채 두 무릎 사이에다 얼굴을 묻고 흐느끼면서 견뎠다. 서러움이 서러움을 부르면 잠자리에 들어서도 베개가 펑 다 젖도록 울다가 제풀에 지쳐 잠들기도 다반사였다.

한밤중에 잠이 깨이면, 밥 떠먹고 반찬 그릇에 수저가 가듯 저절로 스님 생각이 났다. 그럴 땐 언제나 시베리아 벌판에 혼자 버려진 것 같아 무단히 외로웠다. 세상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상처 아닌 상처가 어둠 속에서 날이 훤해지도록 뒤척거리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잘 자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하고,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자 급기야는 머리카락도 빠지고, 어느 날은 원형 탈모가 두 군데나 생긴 걸 발견하고 기겁을 했다. 거기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질병을 부르는 빌미가 되어 식도에 궤양까지 생기는 바람에 날마다 동통에 시달리다 못해 전문의를 찾았더니 의사가 그랬다.

"스트레스는 약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아시죠? 약보다는 마음을 편안히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잠도 푸욱, 숙면할 수 있도록 해보시지요."

병원을 다녀 온 후로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오기가 나기도 했지만 그 마음은 잠시뿐이고 기분은 늘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처럼 을씨년스럽고 황량해서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산색처럼 늘 바뀌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지만 내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아 그리움에 의한 동통을 무시로 앓았다.

첫사랑에 빠진 틴에이저라 한들 그렇듯 도발적인 열정으로 앓을 수가 있을까. 사랑은 늦게 올수록 격렬하다더니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피폐해진 심신은 만신창이나 다름 아니었다. 혼자 앓는 사랑이라 갈등과 괴로움이 늘 그림자같이 따라붙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 하니까 당연히 고통은 배가되었다. 그리움 안에 그렇듯 많은 감정이 섞여있는 줄을 비로소 알았다. 기다림. 보고픔. 사무침. 함께하고 싶은 바람에다 살을 섞고 싶다는 욕망까지, 실로 오만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다 들어 있었다.

끔찍한 마음고생을 하는 과정에서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것을 막론하고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것은 모조리 내가 다 감당해 주고 싶은 것. 세상에서 좋은 것이라면 아낌없이, 남김없이 전부 다 그에게 주고 싶은 그런 감정이 사랑이었다.

큰 내(川)를 삼킬 듯이 범람하는 장마 같은 그리움과 그러한 감정에 무시로 흔들리며 사는 것이고, 눈보라에는 모닥불이 되고, 비바람엔 우산이고 싶은 것이며 고귀한 정신,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 둘이어도 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좋을 영혼의 돛단배. 그리고 사랑, 그것은 땅속 끝까지 가 닿을 듯 절절한 종소리의 잔향 같은 것이었다.

뿐이랴, 여름날의 산들바람 같이 신선하고, 긴 겨울밤 구들목 같은 것인데다. 방황을 마감하는 종착역이 되고, 내닫는 마상(馬上)위의 펄럭이는 깃발 같은 환희이며, 집배원 아저씨로부터 방금 받은 편지 같은 기쁨의 분수령이었다. 꽃잎에 꽃받침 같은 관계요, 물과 물레방아 같은 조화이고, 유행가 가사마냥 '사슴처럼 기대어 살고'싶은 햇볕 닮은 소망과도 같은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세상에 무엇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본성으로 눈물엔 위로이고, 아픔에는 치료제가 될 수 있으며 동통이 따른대도 종내는 기쁨이자 은혜이고 축복 그 자체인 것일 수가 있으랴. 분명한 것은, 그는 내게 강 건너 등불 같은 존재로서 물위에 뜬 달 같은 사람이었으며 잡고 싶어도 잡히지 않는 파랑새였다.

또한 참사랑이란, 그 사람의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해하는 포용이고,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 상대가 망가지지 않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하는 격려이며, 필요하다면 상황에 맞게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 되어, 먼저 떠나줄 수도 있어야 하는 지혜로운 용기이자 배려란 사실을 이제는 알만해졌다.

내게 대한 스님의 초지일관을 보면서 초극한 인간 정신의 장엄과 극치에 대한 사유(思惟)를 하게 되었다. 오락가락 하는 흰 구름 따위에 청산이 꿈쩍이나 할양이던가. 거목은 강풍에도 넘어지는 법이 없을 것이었다. 그나마 내 편지가 몇 번 정도 가면 가뭄에 빗방울 같이라도 전화를 내시는 뜻은, 미루어 짐작컨대 받은 것에 대한 숙제를 한꺼번에 몰아서 하듯, 중생의 미혹함을 제도하는 차원이나 다름 아닐 터였다.

"산문으로 들어선 수행자로서 진여(眞如)의 길을 가는 동안 이생(生)에서는 단연코 여자하고 돈에는 꺼들리지 않을 것" 이란 그의 신념은 틀림없는 그 길에서의 장엄한 거장(maestro)이었다. 신념에 찬 태산 같은 확신과 차별화 된 의지가 그대로 느껴졌다. 옛말에 '난새와 봉황은 어려서부터 하늘 높이 날 마음이 있고, 기러기와 고니는 나면서부터 물결을 헤칠 기세가 있다'고 하였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 철저하게 차별화된, 특출한 정신의 구도자를 내 안으로 끌어당기려 몸부림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루 강아지였던 것이다.

"수행자로서 용맹정진 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스님의 당부가 진지하고도 간절했다. 그러면서도 당차게 날 내치지 않은 뜻은 무엇이든 맺혀있는 매듭은 풀어놓고 가야 한다는 자기 믿음을 적용한 이른바 자비심인 것 같았다. 기독교인으로서도 나일론 신자인 나로서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짐작도 못한, 무지 그 자체였다.

▷필자 약력

- 홍지운(필명'67)

- 전 간호사

-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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