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식민지 조선의 스파이와 007 제임스 본드

입력 2015-11-14 02:00:04

1943년 5월 2일 자 매일신보에 실리 김내성 작 스파이 소설
1943년 5월 2일 자 매일신보에 실리 김내성 작 스파이 소설 '태풍' 160회.

식민지 조선의 스파이와 007 제임스본드 

'007 시리즈'는 반세기가 넘게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 스파이물이다. 이런 인기에 걸맞게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대중적 매력이 흘러넘친다. 그는 세련된 매너로 수많은 미녀와 끊임없이 로맨스를 펼치는 바람둥이지만 국가의 안보가 위협을 받는 순간에는 목숨을 걸고 적들을 물리치는 진지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제임스 본드의 이 눈부신 활약에는 영국 과학기술의 결정체인 가공할 만한 신무기도 큰 몫을 하고 있다.

한 치 흔들림도 없는 굳건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영국 스파이 제임스 본드가 '007 시리즈' 주인공으로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53년이었다. 제임스 본드는 전설적 스파이 마타하리 같은 실제 인물이 종횡무진 활약하던 세계대전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적 인물이었다.

007 제임스 본드 같은 '스파이' 소설이 식민지 시기 조선에도 있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여파 속에서 전시체제를 겪고 있었다. 현재 우리 사회에 일반화되어 있는 '반상회'나 '방첩'과 같은 용어와 개념이 조선에 처음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대의 곁에 스파이가 있다'(1940) 같은 무시무시한 제명의 신문 논설이 나타나고, 전 국민의 경계태세 구비를 위해 여자 스파이와 관련한 루머성 기사가 빈번하게 신문이나 잡지에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김내성의 '태풍'(1942)은 이런 삼엄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등장한 스파이 소설이다. 소설 '태풍'은 미국인 금발 미녀 스파이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스파이가 가공할 위력을 지닌 파괴광선 설계도를 탈취하기 위해 경성으로 집결하자, 조선 스파이 유불란이 맞서 나라의 안보를 위해 싸우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렇다 할 과학 지식의 축적은 물론 스파이의 목표물이 될 근거가 전혀 없었던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이 세계첩보전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비현실적인 설정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신무기 설계도를 탈취하려는 사람들이 일본제국과 전쟁 중이던 적대국 사람들이며, 그들은 일본제국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유불란이 목숨을 걸고 지킨 '국가'는 조선이 아닌 일본이라는 점에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제국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 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007 시리즈'의 스파이 제임스 본드는 영국의 안위를 지킨 애국자이지만, '태풍'의 위대한 스파이 유불란은 일본제국의 안위를 수호한다는 점에서 매국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식민지 스파이 소설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식민지 경험을 통해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피아를 나눌 수 없고 선악 구분도 어려웠던 이런 혼란과 혼돈이다. 한발 물러서서 이런 혼란과 혼돈을 냉철히 응시할 때 친일과 반일에 대한 단선적 판단을 넘어 식민지 역사와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미래대 산학협력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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