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강물 갠지스<2>-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입력 2015-11-13 01:00:08

지척에 그를 두고, 난 언제나 길증 같은 그리움에…

삽화:이영철 화가
삽화:이영철 화가

3. 사랑

일반적으론 사랑한다는 명분이 생기면 사람들은 대개 결혼이란 틀 속에 안주하면서 서로에게 특별한 언덕이 되어 가슴과 가슴을 겯고 살아간다. 척박한 삶이거나 왕연(旺然)한 삶이거나 사는 동안에는 기꺼이 서로에게 든든한 울이 되는 것이다. 내겐 그런 울이나 외풍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 받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없었다. 가슴 휑하게 뚫어진 동공(洞空)사이로 바람이 막 슉슉슉 관통하고 지나갈 때도 내가, 외로운 영혼의 윤활제랄까 자기 구원의 방편으로 삼은 것은 고작해야 미술이나 동서양의 고전음악이 다였다.

만만하고 부담 없기로는 예술이 사람보다 나은 정신의 동반자라 여기고, 거기에 마음을 기댄 채 살았던 셈이다. 적어도 청산(靑山)같은 스님이 내 맘속으로 쑥,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사랑의 감정은 굉장히 단세포적이면서도 무조건적이고,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라고 해야 맞았다. 적어도 지고지순한 불집(火宅)이랄지, 풀무질로 달구어진 것 같은 잉걸불이 내 가슴에 이글거린다는 사실을 상대방도 알아주길 바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일방적이되 어떤 식으로든 영악한 계산 같은 것은 해본 적도 없었고 그 정도로 매사에 계산이 바로 팍팍 튀어나올 만치 그 방면으로 영리한 여자도 난 아니었다. 단순히 생각만으로도 좋아죽는, 열렬하고, 순후하고, 진지한 순애의 감정이었다. 그러나 구도자(求道者)에 대한 짝사랑은 그 자체로서 이미 지난(持難)함이 예견되는 대형 사고였으므로, 응당 험로(險路)에 대한 각오가 따라야 할 일이었다.

애초부터 가능성이 희박한 일을 두고, 석상처럼 무심해지려는 노력을 시도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장차 감당해야할 어려움이 물 없는 사막을 횡단하는 일 같으리라, 와락 겁이 났지만 단념은커녕, 반발심만 점점 더 거세어졌다. 못 잊을 한 사람, 가슴에 품고 사는 일이 그 정도로 피 마르는 마음고생인 줄 어찌 짐작인들 해본 적이 있었으랴.

무쇠라도 녹일 듯한 열화가 심장을 달구고, 대책 없는 그리움은 아무런 장비 없이 빙벽을 오르는 것과 같은 괴로움을 동반해, 난 늘 그것을 완화할 수 있는 지혜가 갈급하고 아쉬웠다. 사람을 좀 더 사람답게 하는데 필요한 절대 불가결한 요소 중 하나는, 아니라고 판단했을 때 즉각 멈출 수 있는 용기였으나 안타깝게도 사랑의 감정에 관한 한, 내겐 그것이 너무나 많이 모자랐다.

상대를 가슴으로 품고, 위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면 그에 대한 연정만으로는 왜 행복할 수 없는지,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내 화두였다. 그 가슴과 내 심장이 한데 어우러져 깊은 강물을 이룰 수만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을까만 모래벌판에서 생선을 구하는 일보다 더 가망 없는 일에 목숨을 거는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지. 이성적으로는 나도 우아하게 스님을 공경하고 거룩한 맘으로 경배하면서 순리를 따라 내 안의 시냇물만으로도 기쁘게 흘러갈 수 있어야 내가 사람이라고 믿었지만, 그러한 생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납득하고 수용하려 들지 않는 한, 그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일이었다.

무지하게 저돌적이고, 막무가내인 또 하나의 나를 보는 것은 스스로도 난감하고 놀라웠다. 법랍이든, 세상 연수(年數)이든 정확히 스님의 연령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가시적 외양(外樣)만으로 미루어 짐작하게 될 땐 아찔하였다. 솔직히 고백하면 그 문제에 관해선 내가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잠시 뿐이고, 왜 안 돼, 사랑하는데 대체 그 따위 세수(世數)가 무슨 상관이람, 하는 반발심만 더욱 거세지고 강했다. 모름지기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이라면, 상대가 인정하건 안 하건 조건 없이 오직 사랑할 뿐이라면,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라면, 도대체 그게 왜 비난 받을 일인가를 무시로 자신한테 따졌다. 게다가 심각한 것은 내가 그 스님을 사랑하는 만큼 나도 그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욕구가 그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것은 정신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안의 첩첩한 밀실에다 그를 가두고 보석함에 은밀히 감추어 둔 보석을 꺼내보듯 온 마음을 다할지라도 출세간(出世間)의 종지(種旨)가 반석 같은 분에게서 세속적인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가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반면에 인간적인 미혹을 떨치고 마치 발톱을 감춘 매같이 굳세게 비상하는 존재에게서 끄떡없는 청산을 보게 될 적마다 난 그만큼 더 멀고 아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진여(眞如)의 길을 지향하는 격조 높고 기품이 장엄한 수행자를 보고 대책 없이 엎어져 앓아야 했던 기간이 햇수로 5년이다. 반드시 그가 아니면 안 된다는 오직 한 마음은, 막심한 마음고생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처지에 대한 비관이 염세로 발전해서 살아 있어도 사는 것 같은 생활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한번은 세상을 버리고 돌아갈 목숨, 그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쯤에서 그만 명줄을 놓아버릴까, 왕왕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하였다. 게다가 어떻게 죽는 것이 추하지 않을지, 사뭇 구체적인 고민을 해 본 적도 있었다.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아귀가 딱딱 맞아 돌아가고 자신의 의지대로 노력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사회 문제가 생길 리 만무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렵기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 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을 공략도 해보기 전에 포기하고, 마법의 성에 갇힌 공주를 구해내듯 스스로를 구제해야겠다는 작심을 하루에도 수없이 하고 또 했다. 부처님 길에 대한 스님의 철옹성 같은 의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허기 같은 내 정념을 다스리는 것이 도리에 맞는 거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체념은 막심한 마음고생과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동반해 갈등과 회의를 뒤웅박 엎듯 되풀이 하면서 살았다. 자기 길에 대한 수행자의 굳센 의지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일은 이치상 당연한 것인데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에 대한 상심은 사람을 매번 기막히고 절망하게 만들어, 묵상기도 시간마다 안 되는 일에 대한 시름으로 눈물을 참 많이도 흘렸다.

주말을 제외하면 공양(식사)시간에라도 매일 스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축복 같았다. 하지만 지척에서 날마다 스님을 보면서도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사람 그리듯 난 언제나 갈증 같은 그리움에 젖어 살았다. 잊고 말리라, 그러나 영겁의 시간을 돌아서라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땐 내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친 것이었는지 말해주리라, 벼르면서 견뎌내었다.

그러면서도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이 몰려 있어 속내는 늘 간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갈애에 시달렸다. 겉으로는 짐짓 아무 일도 없는 것 마냥 내가 내 감정을 속여야만 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단념해야 한다, 없는 사람으로 치자, 또는 그를 몰랐던 시간대로 돌아가자, 자신과의 타협을 끝도 없이 시도하면서도 마음은 그 모든 것을 순순히 납득하고 수용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종당엔 될 대로 되라지, 내심, 여유 아닌 억지도 허다히 부렸다. 아무도 모르는 애수는 날로 짙어지고, 마음은 어린 아이 보채듯 눈만 뜨면 그냥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위로받을 데 하나 없는 한계 속에서 함박눈이 내려 쌓이듯 그리움은 나날이 쌓이고 또 쌓여갔다.

공양 간에서 지낸 지 열하루 만에, 마침내 새로운 공양주 한 사람이 추가 되었다. 그것은 곧 내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처음 약속대로 난 미련 없이 가방을 꾸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마음은 홀가분하면서도 다시는 스님을 볼 수 없겠구나, 싶자 맥이 탁 풀어졌다.

돌아오는 날 아침에 스님께서 버스 터미널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는데, 지금 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거대한 선박이 해저로 침몰한들 그보다 더 절망적일 수 없을 것 같은 비감(悲感)이 느릿하고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침울해서 그런지 차 안의 공기도 이상하리만치 가라앉아 있었다. 내 울적한 기운이 마치 자동차 안을 돌아다니면서 안개를 피우는 것 같아 그냥 막 휘저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때 시종일관 앞만 보고 차를 몰던 스님이 침묵을 밀치고 내게 일렀다. 저 안 깊은 데서 올라오는 목소리였다.

"…나는 허공으로서의 나 일 뿐이므로 육신은 성품이 없는 가짜라고 생각하시면 어느 순간 고(苦)도 편안해지실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그 뿐이었다.

법문(法文)같은 그 말씀의 함의를 다 헤아릴 순 없었지만 아마도 스님은 내 병(?)을 어렴풋이나마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몸은 편안해졌으나 마음에 적체된 미완의 감정 탓인지 불면으로 온 밤을 뒤척이는 일이 잦아졌다. 멀거니 올려다보는 천장으로 자꾸만 그의 모습이 어른거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어질디 어진 그 얼굴 그대로, 웃을 듯 말듯하던 그 표정 그대로, 맘속에 어리는 그를 잊을 수가 없어 괴로웠다. 밤잠이 어려운 밤에는 그의 생각 자체를 피하기 위해 베개에다 얼굴을 파묻은 채 이리저리 뒹굴면서 몸부림을 쳤다. 도대체 그런 자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현실이 더 막막하고, 기막히고, 절망스러웠다.

심장이 터질 듯 저리고 자지러질 것 같은 느낌이 가슴을 통째로 잠식하면 내 의식을 심판하는 초자아는 그런 비이성적 원초아를 향해 옐로 카드를 뻔질나게 꺼내들고 흔들어 젖혔다. 워어-워,워..., 삿된 욕망은 다이너마이트의 뇌관 같은 것이란 것을 알았지만 그걸 과감히 내던질 수 있는 용기가 내겐 없었다.

일필휘지(一筆揮之), 한 바람에 마음을 내려 긋고 싶어도 잊기 위해 내가 기댈 데라곤 그저 가는 세월, 그 가없는 시간의 역학적 기능뿐이었다.

사랑의 감정이 수반하는 욕망은 분별심이 없는 탓일까. 체념의 끝을 서성이면서도 해갈(解渴)이 안 되는, 갈증 같은 그리움은 이따금 성적 환상으로 이어졌다. 잠자리에 누우면 잠들기 전까지는 뇌리를 지배하는 대상이 그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내 옆에 나란히 누워있다고 상상 하면 가슴이 열기로 가득 차올랐다. 마음껏 그의 뺨을 만져보고, 그의 가슴도 쓸어보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성적 상상을 따라가다 보면 급기야는 수음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한 번 결혼했던 적이 있었고, 성을 알고 있었으며 아직도 성적으로 건강한 여자였다.

4.

①마음의 겨울

나는 여전히 절망적인 사랑의 겨울, 그 한복판에서 살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은 어쩌면 마지막 비상구를 찾지 못한 채 영원 속에 묻힐지도 모를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었다. 혼자 앓을 수밖에 없는 짝사랑이 너무나 기막혀서 울음이 터지는 것도 주로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절망과 막막함 때문이었다.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일들이 생기고 잊혀지기도 하지만 딱, 한번만이라도 꿈길에서나마 그가 찾아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막연한 기다림의 수위는 날로 높아갔다 봄, 여름, 가을과, 눈 내리는 겨울이 다 가도록 그 마음은 도무지 잦아들 줄 몰랐다.

암만 올곧은 정신으로 계를 지키고 정진하는 그일지라도, '강이 풀리면 배가 오듯이' 어느 날 갑자기 내 집 마당으로 썩 들어설지 모른다는 기대를 시도 때도 없이 하면서 지냈다. 확률로 치자면 날아가는 기러기를 바늘 끝으로 맞추려는 것보다 더 가능성이 희박한 일인 것을, 느닷없는 돌풍이 창을 흔들고 가도, 번연히 아닌 줄 알면서 기어이 창문을 열어 확인해 보고, 그러다가 지치면 의기소침해져서 시름시름 몸살처럼 마음을 앓았다. 수행자로서 빈틈이 조금도 없어보이던 그를 잊을 길이 없었다.

②마음의 겨울

바람에 몸서리를 치듯 푸슬푸슬 눈꽃을 털어내는 상록수나 산 숲에서 일어나는 질풍노도(疾風怒濤)같은 북풍을 귀로 보는 겨울에는, 굽이굽이 휘돌아서 재를 하나 넘어야만 올 수 있는 산마을엔 응달의 눈이 녹을 때까지 한 이틀은 버스도 오지 않는다. 고라니가 먹을 것을 찾아 마을로 내려오고 산 꿩 우는 소리도 그친 깊은 두메 산골짜기로, 고랑 물이 다시 또로롱 졸졸 물소리를 내는 봄이 올 때까지, 겨울 내내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곤 지나가는 산바람 소리와 잔설이 희끗한 산이 전부이다. 그렇다보니 나한테는 보이는 것 족족, 들리는 것마다 구구절절 그 스님 생각을 부추기는 것들뿐이었다.

삭막하고 을씨년스럽기가 그지없는 골짜기의 겨울은 엄동 한 철 내내 계절풍의 카니발이 계속되고, 800고지가 넘는 재를 일 같잖게 넘나드는 북풍의 기세는 산이라도 자빠트릴 것같이 드세고 위압적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깨어 노는 바람이라도 시끄럽기로 치자면야 아무려면 사람한테 미친 내 속에다 비할까.

위풍당당하기까지 한 북풍의 속성은 워낙에 거침없고 그악스러워서 삭풍이 점령군처럼 숲속을 제압하는 날엔 더 이상 산새들도 얼씬 안 하고, 강풍이 잡목 숲을 휩쓸고 지날 적마다 쏴아아아 산파도가 숲 전체를 한바탕 희롱하고 간다. 계절풍의 위세가 그리 등등하다보면 기식(氣息)이 엄엄(奄奄)해진 상록수들의 저항이 골짜기마다 방자하고, 그때마다 근목(根木)을 하직하는 낙엽들의 방성대곡이 도린곁에 무량으로 메아리친다.

가달길의 별리(別離)가 그리 사무친다 해도 알고 보면 자연은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련만, 쇠락한 모습이나 등을 보이고 가는 것들의 잔영은 그렇게 처연하였다. 거센 바람 앞에서 적나라(赤裸裸)한 속내를 드러내고도 당당할 수 있는 산 숲의 목소리를 통해, 꺾이기보다는 통섭하는 대자연의 섭리를 보았고 그때마다 좀 더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려 나도 마음을 추스리곤 하였다.

하루 스물네 시간, 잠을 안 자고 파도처럼 몰아가는 겨울 산 숲의 바람은 산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도 늘 그렇게 불었다.

시도 없고, 때도 없고, 질정도 없는 그 바람은 내 안의 원초아가 갈망을 탑처럼 쌓아올린 오직 하나의 희구이자 흔모(欣慕)였다. 포기 할 줄 모르는 한결같은 욕망과 스님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이 내 안에서 무시로 강풍을 일으키면 사실상 이전의 나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예전 같으면 그래도 모차르트나 베토벤 제씨들의 음악이 흔히 집안을 감돌았으나 스님 생각으로 휘둘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그 소리도 그치고, 아니, 그럴만한 틈이랄까 마음의 여유가 그 정도로 없었다.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 심각한 것은 구도자로서의 그가 아니라 내겐 자꾸 한 남성으로서의 존재로만 부각된다는 사실이었다.

훤칠한 체격에 신체를 싸고도는 온후함. 어눌한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그 어눌함이 상당한 내공을 가늠하게 할뿐 아니라 고차원적이고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작용하는 깊고도 진중한 남자. 내 마음은 언제나 오직 그 한 사람을 향해 한결같은 속력을 내었는데 에너지 대사율이 굉장히 높은 질주였다.

관심과 호기심은 전혀 별개의 얼굴이다. 호기심은 일어나고 궁금했던 것을 충족시키면 곧 사그라들고 마는 한시적인 감정이지만 관심은 어떤 것에 대한 끊임없고 지속적인 정서를 말한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관심은 어떤 것으로도 비견할 바 없는 고출력 에너지였다. 때문에 양방향 교류가 난감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애가 타서 죽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그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도대체 끝이 없는 사랑의 갈구였다. 그것은 무한 자유를 꿈꾸고 해탈을 갈망하는 영혼을 잡으려고 바람 앞에다 그물망을 들이대는 짓거리나 다르지 않았으며 무모한 짓으로 치자면 궤도를 이탈해서 제어하기 힘든 전차나 흡사하였다.

마음대로 안 되는 현실에 맥이 빠지고, 중증에 가까운 의욕상실로 만 가지가 심드렁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드나나나, 내 심중엔 오로지 그 한 사람으로만 정조준이 돼 있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의미도 없었다.

상대가 일반인이 아니라 앞날이 예견되는 구도자란 사실이 의식을 짓누르고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맑은 정서는 능히 대지위에 내리는 눈 소리도 들음직한 청정 비구승(比丘僧), 한겨울 삭풍이 산골 암자의 기왓장을 울리는 밤중에도 얼음장 같은 냉골에서 꼿꼿이 앉은 채로 수행하다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고꾸라지기도 다반사였다던 스님. 짓찧은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도 몰랐다는 그의 장좌불와(長坐不臥)에 관한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무분별한 통증이 내 안에서 파문을 이루었다.

생각하면 그 투철한 수행자적 용맹전진에 경배를 드려야 할망정 일개 중생의 애욕으로 심기를 어지럽힌대서야, 하는 자책과 반성이 누누하기도 하였다.

근원적으로 무리수에 따른 자각과, 회의적 체념인 것은 분명하면서도 그렇다고 단념이란 어림없는 일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내가 내 굴레를 탈피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는 이유가 나변에 있었다. 아무리 다각도로 살펴봐도 수행자와 이성적인 남녀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소지는 희박한 게 아니라 전혀 가망 없는 일이란 사실을 내가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길에 대한 확신이 그토록 요지부동인 스님을 두고,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란 뽕밭이 바다로 변할 확률보다도 더 난감한 일임을 아는데다, 고질병 앓듯 혼자 상사(相思)로 번민하는 어리석음이 말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이어져 기분이 참담하였다.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면할수록 그야말로 미욱하기 짝이 없는 추태임을 확연히 인지하게 되고, 그 때문에 죽어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충동을 느끼기도 허다하였다.

통념상 남녀 간의 사랑이란 상대적 개념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연 발생적인 교감이고 소통이지, 한쪽에서 조르거나 호소한다고 해서 마음이 통하거나 동화되는 사안이 아니다.

하물며 그는 부처님 길에서의 여법한 정진으로 흔들림 없이 깊어진 수행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니 무슨 용기로 내가 그의 연정을 기대하고 내 마음을 받아 달란 호소인들 해 볼 수가 있을 것이던가. 허기사,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사랑에 비하면 세속적인 인간 사랑쯤이야 일고의 가치 없는 일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하찮다고 여기는 그 세속적인 사랑의 바닥에서 죽도록 애도 한 번 끓여보지 못한 사람이 도대체 관세음 부처님의 대자비는 가능하단 것일까.

야속한 나머지 속으로는 그런 힐난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도인 내 눈에도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중물이 제대로 든 스님을 생각하면 내 앞일이 불 보듯 훤하게 내다보여 심란한 마음이 천근 쇳덩이였다.

그런 내 심경과 그리움 속에는 단순하게 그저 보고 싶다는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엘베강이나 알스터 호수를 품고 있는 함부르크의 안개보다 더 짙고 무거운 사무침이 스며 있었다. 끝도 가늠할 수 없는 일에 왕왕 절망과 한계를 느꼈지만, 그가 택한 구도자의 길은 우리네 속인들의 삶과는 방식부터가 전적으로 다른 데다 어려운 고행을 수반한다는 측면에서 난 촌분(寸分)의 기사회생 가망도 없는 마음의 시련을 감수하였다. 특히 불가의 수행자들이 극기로 다스려야 할 많은 것들 가운데 3가지가 식욕, 성욕, 수면욕으로 인간의 근본적인 쾌락은 모두가 금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스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존경심이 더욱 높아지고, 내 아픔의 수위도 비례적인 고공행진으로 이어졌다.

빛을 품고 안으로 안으로만 존재의 의미를 관조하는 천연의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스님은, 어둠 속에 두어도 저 홀로 빛을 발하는 인간 보석이었다. 입으로써 중생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행(行)을 통해 배어나는 향기가 바로 법문 같이 느껴지던 분이었다. 게다가 육안(肉眼)이 아닌 심안(心眼)으로 사물을 통찰하는 듯한 응시는 나로 하여금 생각만으로도 무한 존경심을 우러나게 만들었다. 때문에 밑도 끝도 없는 그리움을 치통같이 앓으면서 참고 또 견디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털끝만치도 그에게 누가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철저하리만치 골수에 와 박혔다.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초지일관 흔들림이 없다는 건 그만큼 의지가 굳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결같은 그에게서 "지혜로운 자는 뜻이 굳세어 비방이나 칭찬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는 그의 부처님 말씀을 연상할 수 있었으며 수행자로서 체질화된 품성과 반듯하고 굳건한 정신의 거장(巨匠)을 보는 듯했다.

특히 만학의 학인(學人)이신 스님은 학교에서 요구하는 과제물을 위한 것 외엔 컴퓨터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은 아마도 기기의 메커니즘에 대한 거부감은 물론, 아날로그 방식에 익숙한 그 스님 특유의 보수적 성향이거나, 세속화에 대한 고전적인 경계심일 것이라고 이해했다.

함께한다고 해서 반드시 생의 끝까지 같이 갈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못보고 산다 해서 그 마음이나 애정이 식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기야,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저 유명한 햄릿의 독백도 있긴 하지만 잠시 구름에 가려진다한들 뒤에 숨은 별이 빛을 잃는 법이란 없지 않은가. 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제 빛을 발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우러져 함께 나누다보면 보다 좋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열망도 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기필코 그 일생이 행복을 보장한다거나 장담할 수 있는 일도 아닐 터였다. 다만 의지가 굳건하고 절대적인 신뢰가 바탕에 있는 교류일 때 이상적이란 사실을 우리 모두가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좋아할 뿐인 것이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스님의 마음을 얻지 못해 날마다 기꺼이 산 채로 지옥을 방황하는 이방인이었다. 가망 없는 일에 대한 자기 제어와 무분별한 사랑의 열정으로 갈등이 날로 증폭되는 가운데 내가 있었다. 그렇게 심화되는 사랑의 상처를 보면서 이건 내가 살아있으므로 어찌할 수 없이 세상에다 바쳐야하는 세금 같은 거라고, 초라한 자신을 달래고 위로하기 바쁜 시간들을 보냈다.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격이었나, 참을 수 없는 자괴감에 시달리던 어느 날, 드디어 나는 에멜무지로 그에게 보낼 장문의 편지를 쓰기에 이르렀다. 궁여지책이자, 자기 구원의 한 방편이었다.

친구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마치 수묵 담채화와 같아서 그때그때 심경을 상황에 따라 진하게, 혹은 연하게 채색의 농담(濃淡)을 조절할 수도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은 쉼 없이 흐르는 계곡물과 같아서 낮과 밤이 따로 없고 그칠 줄도 모르니 사랑을 일러 열병이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은 아닐까.

기껏 작정하고 편지를 썼지만 단 한 마디도 사랑한다는 직접 화법의 단어를 채택할 순 없었다. 스스로 추한 짓이라는 생각 때문에 썼다가는 지우고, 다시 또쓰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 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에서도 내심 상처를 많이 받았다. 결국 에둘러 빙빙 돌려가며 변죽만 울린 편지를 부치고 오면서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 일을 두고, 난 자신의 작태를 참 어설프다 힐책하기 바빴다.

자기 연민에 빠져 안타깝고 속상해서 죽을 것 같은 마음이었지만 다음에 편지를 쓸 때에는 내 마음을 있는 대로 다 보여드리자고 위로하며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다음, 그 다음, 몇 번을 쓰게 되더라도 내 입장을 파악하고 있는 한,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쓰지 못하리란 사실을…

직접 화법으로 사랑을 구사한 게 아니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해서 편지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할 분이 아니라고 믿었다. 때문에 수행자한테 연애편지가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승려한테 이 무슨 추태냐고 면박을 당하지나 않을까, 질타를 하거나 힐문하면 그 모욕적인 수치심을 어찌 다 감당하나, 편지를 부치고 난 후에도 무지하게 애를 태웠다. 심장은 질정 없이 쿵쾅거리고 간장은 얼마나 녹아내리는지 만약 그 마음에다 종이를 갖다 대면 단박에 불이 활활 붙어버리고 말 정도로 애가 말랐다.

느닷없이 핸드폰 컬러링이 터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는 또 얼마나…

잡념은 많고, 심장은 장구 열채 놀듯 마구 뛰노는데 스님에게선 전혀 이렇다 할 일체의 반응이 없었다.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그래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수천 개의 바늘 뭉치를 들고 동시에 심장을 찌르는 듯한 동통과 시시각각 간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초조함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편지는 잘 갔을까, 혹시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서 훼손되거나 버려진 것은 아닐까, 오만 것이 다 걱정이었다. 만약에 '걱정과 기다림이 음식이라면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어서, 그의 침묵은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친김에 일주일 간격으로 답신 없는 편지를 계속해서 썼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이쪽에서 랄랄라아- 하고 부르면 저쪽에서도 같은 소리로 랄랄라아- 화답하는 산 메아리 같은 것이라고 믿었던 나에겐 철저하리만치 무반응인 스님의 대응 모랄(Moral)에 주체할 수 없는 모멸감과 제어하기 힘든 자괴감에 떨었다.

결과적으로 거부를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일은 크나큰 아픔이었다.

처음부터 예상치 못 한 일은 아니었으나 실지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자 이만저만 낙심이 큰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존감에 대한 상실감이 상채기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하지만 스님을 향한 그리움은 아무리 퍼 쓰고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고이고 또 고여서 내 안에선 쉼 없는 그리움이 질퍽거렸다.

답신이야 있든 없든 일을 한 번 저지르고 난 후부터는 절로 커진 담을 믿고, 당연한 것 마냥 그에게로 가는 편지를 썼다. 다행히 편지가 되돌아오는 일은 없었으므로 그것 하나만 믿고 종이에다 마음 것 내 심경을 토로해 보낼 수 있었다. 적어도 편지를 받아는 준다는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한 위안거리로 삼을 수가 있었으며 자존심 같은 건 진즉 패대기를 쳐 버린 지도 오래였다.

▷필자 약력

- 홍지운(필명'67)

- 전 간호사

- 주부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