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달성 스토리로드] ⑧다사읍

입력 2015-11-10 01:00:08

낙동·금호강 두물머리에 떠있던 정자…해랑부부 孝로 쌓은 도깨비 징검다리

대구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낙동강 물 문화관인 디아크를 중심으로 낙동강(왼쪽)과 금호강이 만나는
대구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낙동강 물 문화관인 디아크를 중심으로 낙동강(왼쪽)과 금호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이곳에 부강정(浮江亭)이 세워져 조선시대 선비들의 학술문화 공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달성군 제공
과부 어머니를 위해 놓은
과부 어머니를 위해 놓은 '도깨비 징검다리'. 지금은 현대식 대형 교량이 놓여 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다. 달성군 제공

다사읍은 달성군 서쪽에 위치해 있다. 읍소재지는 매곡리다. 금호강과 궁산~와룡산 사이의 능선, 낙동강 등을 경계로 대구 달서구'서구'북구를 비롯해 고령'칠곡군과 분리된다.

1914년 하동면과 하남면을 합쳐 다사면이라 하고 달성군에 소속됐다. 1996년 3개 리, 1997년 6개 리가 증설돼 인구가 급증한 가운데 1997년 다사읍으로 승격했다.

다사읍은 달성군 9개 읍면 주민등록 인구 가운데 1위(6만4천 명)를 차지하고 있다. 다사읍은 2011년 11월 말 인구 5만7천358명으로 화원읍(5만6천85명)을 처음으로 따돌리고 줄곧 앞서 나가고 있다.

다사읍은 이천리(伊川里), 달천리(達川里), 박곡리(朴谷里), 방천리(坊川里), 서재리(鋤齋里), 세천리(世川里), 죽곡리(竹谷里), 매곡리(梅谷里), 부곡리(釜谷里), 문양리(汶陽里), 문산리(汶山里) 등 11개의 법정리와 46개의 행정리가 있다.

◆낙동'금호강 두물머리의 부강정(浮江亭)

다사읍은 낙동강과 금호강이 서로 만나는 두물머리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시대 때부터 이곳 경치에 반한 시인묵객들이 정자를 짓고 세월을 낚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인 16세기 이후 사림파의 성장과 더불어 강(江)은 주변 문화와 접목돼 풍광 좋은 곳곳에 누정(樓亭)이 세워졌다. 선비들의 학술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부강정(浮江亭). 강 위에 정자가 세워졌다는 의미다. 부강정은 낙동강과 그 지류인 금호강(伊川)의 합류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본래 신라 왕이 놀던 곳으로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정자 주변에는 아름드리 노송이 자태를 드러내고 해 질 녘 아름다운 낙조는 선비들로 하여금 시구를 저절로 분출케 하는 공간이었다.

지금 부강정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수백 년의 역사 속에 비바람으로 허물어지고 범람하는 강물에 휩쓸려 갔는지에 대한 기록조차 묘연하다. 현재 부강정으로 추정되는 터에는 마을이 들어서고 길만 나 있을 뿐이다.

부강정은 윤대승(尹大承)이 건립한 정자다. 다사 인근 성주 사람인 윤대승은 1564년(명종19)에 생원시에 붙었을 뿐 바깥으로는 크게 명문을 떨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1577년(선조10년) 외가의 선대 심의(沈義)의 유고인 '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를 편찬했다. 이 책의 간행을 위해 김극일(金克一)'권응인(權應仁)에게 감수를 부탁할 만큼 글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한다.

송계 권응인은 부강정을 두고 "사방에 장애물이 없어 바람을 타고 하늘을 자유로이 훨훨 나는 기사(騎士)의 기세고/ 또한 칼을 집고 엄연히 선 장부의 늠름한 모습과도 같고/ 하늘을 가르는 듯한 그 장대한 기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떨게 하고/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누구에게도 굽힐 수 없는 무리 같다"고 했다.

그러나 부강정은 임진왜란 때 크게 파손됐고 정자의 주인마저 사망하는 바람에 예전의 화려함도 일시에 사라지게 된다.

이후 부강정은 이지화(李之華, 1588~1666)라는 새로운 주인을 맞아 점차 지난날의 모습을 다시 되찾게 된다. 이지화는 하빈의 하목정을 세운 이종문의 아들이다. 전의 이씨인 이지화는 1613년 문과에 합격해 병조'예조참의를 지내는 등 비교적 정치나 학문에 밝은 인물이었고, 정구'장현광과 사우 관계를 맺었다.

◆선비들의 학술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아

원래 이지화의 선대는 경기 부평에 세거하다 증조 이필(李佖) 대에 달성으로 내려왔고 조부 이경두(李慶斗)는 임란 당시 곽재우의 의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지화가 부강정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은 혼맥과 관련이 있었다. 조부는 파평 윤씨 가문 윤황(尹滉)의 딸과 혼인했는데 윤황은 부강정의 창건자 윤대승의 아버지다.

결국 부강정은 이지화의 아버지 이종문 외가의 정자였던 것이다. 윤씨 가문의 부강정 터를 인수한 이지화는 정자를 화려하게 중수한 뒤 부강거사(浮江居士)로 이름하고 문패를 달게 된다.

이지화가 언제 부강정을 중수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병자호란(1636)을 전후한 시기로 추측된다. 부강정에 대한 이지화의 애정은 특별했다. 상량문'기문 등 중수와 관련된 주요 문장들을 이식(李植)'이민구(李敏求) 등 당시 조선 문단의 거장들에게 부탁한 것부터가 그랬다.

이식의 '부강정상량문'은 경관의 아름다움, 새로운 주인을 맞은 것에 대한 축하, 그곳에서 신선처럼 살아갔으면 하는 정자 주인에 대한 당부가 잘 녹아 있다.

-팔공산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멀리 대륙의 언덕이 펼쳐지고, 낙동강 물은 남쪽으로 흘러내려 금호나루에서 합류한다. 그 가운데에 물길을 가로막고 우뚝 선 지주(砥柱)처럼 푸른 산이 둥글게 서 있다. 그곳에 일찍부터 화려한 정자가 있어 마치 뗏목을 타고 은하에 올라간 것과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그 터가 오래도록 방치된 채 매몰되어 왔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그 이름만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태평한 시대나 어지러운 시대나 그 땅은 항상 열려 있었건마는, 그곳에서 주인 노릇을 하거나 손님으로 찾아왔던 사람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야성(冶城)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음(山陰)의 별장이 있고, 낙수(洛水) 물가의 전원으로 물러나 반령(潘令)이 살았던 것처럼, 이곳에다 새로 정자를 짓고서 다시 명승의 이름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지화가 부강정을 중수하고 수백여 년이 흐른 지금 와당 하나라도 부강정의 그때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온갖 병화와 세월의 풍수해를 수없이 거치면서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도깨비 징검다리 해랑교(海娘橋)

다사읍 박곡리와 방천리를 잇는 금호강에는 옛날부터 돌로 놓은 징검다리가 하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동네 사람들은 이 다리를 '도깨비 징검다리'라고 불렀다. 지금 이곳에는 현대식 공법의 콘크리트 다리가 놓였으며 '해랑교'(海娘橋)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이 다리를 도깨비들이 사흘 밤 동안 놓았다고 전해진다. 그 사흘 밤사이 돌을 움직이는 소리가 시끄럽게 났으며 이 다리는 도깨비가 놓아서 그런지 아무리 심한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다리는 옛날 영남 사람들이 서울로 가는 길목이라 많은 선비가 왕래했을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대구의 큰 시장을 오갈 때마다 고마움을 느끼고 살았다. 도깨비 징검다리에 대한 얘기는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옛날 부산에서 낙동강 상류까지 배가 왕래하던 시절, 많은 배가 물건을 싣고 이곳에 도착해 쉬어가곤 했다. 지금도 이곳을 여진(驪津)이라 부른다. 나루터가 생겨나니 자연 사람들도 많이 모이게 되고 장터도 형성됐다.

어느 날 부산에서 오는 소금 배가 여진에 당도하게 됐다. 그 배에서 한 여인이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나루에 내렸다. 그 여인의 옷매무새는 초라하고 세찬 풍상에 시달려 보였으나 얼굴은 남들에게 빠지지 않았다. 그 여인은 남편을 잃고 무남독녀 어린 자식을 데리고 의지할 곳 없이 헤매다 마침내 여진으로 오게 된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그 여인은 여진나루에 주막을 차리게 됐고, 동네 사람들은 그 여인을 '해랑 어미'라고 불렀다. 그녀의 어린 딸 이름이 '해랑'(海娘) 이었기 때문이다. 해랑 어미는 장사에도 열심이었고, 동네에서도 인심을 얻게 됐다.

◆과부 어머니를 위한 효행다리

젊은 나이에 외롭게 지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동네 홀아비들의 청혼도 거절하고 오로지 돈벌이와 해랑이를 키우는 데만 정성을 쏟았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해랑이는 점점 예뻐지고 마음씨도 착하게 커 갔다. 해랑 모녀가 이곳에 온 지도 어언 10년이 돼 갔다.

해랑 어미는 돈을 벌어 강 건너에 수마지기의 땅을 사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딸 해랑을 혼인시켜 데릴사위를 삼았다. 사위까지 본 해랑 어미는 농사짓는 데만 전념을 했다. 하루는 연장을 들고 강을 건너가다가 건넛마을에 사는 어떤 홀아비를 보게 된다. 그러자 문득 자기의 신세에 대한 외로움이 묻어났다.

그 이후로 논에 농사를 지으러 갈 때마다 서로 마주치게 되고 둘은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그때부터 해랑 어미의 표정이 예전보다 훨씬 밝아졌고, 둘은 남의 눈을 피해 주로 밤에 만나는 횟수가 많아졌다.

해랑과 그의 남편은 어머니의 밤 외출이 잦아지자 무척 궁금한 나머지 어머니의 뒤를 밟아 결국 모든 연유를 알게 됐다. 해랑과 남편은 의논 끝에 "그냥 모른 척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매일 밤, 그것도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강을 건너다니는 어머니가 걱정되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해랑과 남편은 동네 사람들 몰래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밤마다 어머니가 건너가고 난 후 몰래 강가에 가서 밤이 새는 줄 모르고 돌을 들어다 놓고 쌓았다. 그런 노력으로 며칠 만에 훌륭한 징검다리가 완공됐고, 아무것도 모르는 해랑 어미는 매일 그 징검다리를 밟고 쉽게 오가면서 홀아비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침내 해랑 어미와 홀아비는 자식들의 축복 속에 재혼을 하게 되고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됐다. 동네 사람들은 며칠 밤사이 완공된 이 징검다리를 누가 놓았는지 몰라 '도깨비 징검다리'라고 이름을 지었다. 나중에 가서야 해랑 부부가 어머니를 위해 놓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동네 사람들은 이 다리를 '효행다리'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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