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라디오에서 에너지 넘치는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어느 특별한 데이트를 소개합니다"라며 출발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결혼 20주년을 맞은 어느 부부였다.
아내가 남편에게 진지하게 요구를 했다.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여성과 데이트를 하게 해 주겠다며 대신, 세 가지 약속을 반드시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약속인즉슨, '밤 11시 전에 데이트를 끝내면 안 되고, 식사할 때는 여인의 말을 놓치면 안 되며, 영화를 볼 때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줄 것'이었다. 남편은 '지(아내)가 나올 거면서 저리 야단을 떤다'고 생각하며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 장소에는 남편의 어머니가 와 계신 게 아닌가! 아내가 마련한 특별한 이벤트였던 것이다. 남편은 감동하여 아내가 제시한 세 가지 약속을 잘 지켰다.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아가, 내 칠십 평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구나. 고맙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는 내용이었다.
요즘처럼 '나'만 대단한 세상에 저런 재치 있는 며느리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문득 나의 고향 친구를 떠올렸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혼자 힘으로 삼 남매를 키운 친구의 시어머니는 한평생 얼굴에 화장품 한 번 발라본 적이 없다며 한탄하는 조로 말씀을 자주 하셨단다. 친구는 시어머니의 소원을 풀어 드리기로 작정을 하였다. 남편이 출장 중인 토요일 오후, 시어머니의 피부 관리부터 시작했다. 물을 데워 뜨거운 타월로 찜질을 한 후 정성껏 마사지를 하고 기초 화장부터 가벼운 색조 화장까지 마쳤다. 그러고는 미리 한복집에서 맞춤해 둔 실크 한복을 입혀 드린 후, 함께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하고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는 친구의 신혼 시절, 시어머니와 한 데이트 이야기다. 어디 이 일뿐이겠는가. 매사에 시어머니의 요구를 우선하여 받들고 그러면서도 좀처럼 생색 내지 않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년에 그녀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끔찍이 아끼셨다. 온갖 정성으로 손주들을 길러 효자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며느리의 말은 무조건 진리인 양 받아주셨단다. 효부라고 그녀를 칭찬하면, 모시고 살면서 불효한 일이 책 한 권을 넘는다고 겸손해한다.
시집 식구가 싫어서 '시' 자 든 음식인 시금치도 안 먹는다고 하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고부간의 갈등은 인간의 충돌 이전에 서로 다른 문화의 충돌이다. 충돌은 30초만 비켜 가면 막을 수 있다. 어렵겠지만 매사 '나도 맞고 너도 옳다'는 동글동글한 몽돌 닮은 생각을 많이 해 보면 어떨까?
감칠맛 나는 가을이다. 서로 부대끼면서 잘 익은 벼 이삭 같은 가족에게 특별한 데이트를 선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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