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마주한 순간 용솟음치는 사랑…그는 내 기쁨이자 위로였다
1. 운명
"공양주 구함"
경주 D대학교 석림원
연락: 원주스님, 010-8xxx9xxx
내가 그 광고를 본 것은 2011년 9월 초순의 일이다.
첩첩산중, 깊은 산골짜기로 이사를 해놓고, 주린 들개(野犬)가 먹이를 찾아 온 들판을 헤매듯 날마다 교차로 구인 광고를 뒤지던 끝이었다.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아무 여물이나 먹어 대는 배고픈 암소' 같이 일자리에 대한 갈망이 그 정도로 절실하던 때였다.
간혹 괜찮겠다 싶은 광고가 있어 전화를 해보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을 당하던 터라 적잖이 의기소침해 있던 무렵이기도 하였다.
사람을 찾아 쓰는 입장이라면 누구라도 경험상 노련하고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젊음에다 방점을 놓을 일이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거절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심리적으로도 상당히 위축이 돼 있는 상태였다.
설령 원더우먼(Wonder Woman)같은 전천후 능력자라 한대도 연령적으로는 이제 더 이상 취사선택의 여지가 없구나, 하는 자각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구인광고 문안이 워낙 단순한데 용기를 얻어 되면 좋고, 안 돼도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 바람이라면 미풍이고, 온화하기로는 창호를 투과한 봄볕 같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건너왔다. 단전에서 올라오는 듯한, 매우 깊이 있고 정감어린 남자 목소리였다. 사람의 육성이 꼭 양지녘 같다는 느낌과 함께 정서가 대단히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반짝이는 강물 한 줄기가 내 안으로 그윽하게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찰나였다. 그 때문에 흐흡, 숨을 죽였던 것일까.
" 전화를 걸었으면 말씀을 하셔야지요…? "
채근하는 음성을 듣고서야 화들짝 놀라 꼬리도 대가리도 없이 불쑥 말했다.
"…그 일을 제가 해보고 싶어서요, 스님 그래서 전활 드렸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면접을 거쳐야만 가능한 일이라면, 외람되지만 기동력이 있는 쪽에서 제 집을 좀 방문해 주실 수는 없을는지요?. "
그래놓고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진의(眞意)야 어떠하건 시초부터 건방을 떤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충분하다고 인지(認知)했던 까닭이다. 세상에 어느 경우가 구인 처에다 대고, 구인자 면접을 직접 와서 보고 가란 소리를 한단 말인가.
듣는 사람 입장에선 황당할 수도 있는 몰상식한 청을 했구나, 스스로도 무안해서 속이 마구 들끓었다.
옷이 젖을까봐 걱정이 된다면 고무보트 하나 믿고 계류를 타고 가는 래프팅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 거라고, 그런 나를 연신 다독이고 위로했지만 그런다고 창피하고 낭패한 속내가 평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내가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 정도로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원래 시골 출신이라 정서가 그러한 까닭도 있었지만 중년을 지나면서 어느 한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전원생활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도 향수려니와, 내게 허락된 지구촌에서의 시간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앞으로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잘 죽을 수 있는 준비를 차근차근 해가면서, 주변 정리도 하나씩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까닭이다.
초야(草野)에 묻혀 좋아하는 일을 좇아 살다가, 때가 되면 그대로 순응하리라는 인간적 의지였다고나 할까. 그런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길 위에서 보낸 날들만 햇수로 자그만치 3년이 넘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짓고 사는 집이 내 취향에 딱 맞는 경우는 쉽지 않으리라, 처음부터 각오는 했던 일이지만.
합당한 집을 찾는 일이 짐작보단 훨씬 더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다니면서 알았다. 그래도 찾아보면 어딘가에는 분명 근사치에 이르는 집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시간 투자에 따른 고생이나 부담은 기꺼이 감수하였다.
당시의 생활터전인 서울에서 땅 끝 마을인 강진까지, 우리 강산 오지마다 안 가본 데 없이 다니는 동안 소요 경비만 해도 수월찮은 목돈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아무런 장애나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시골집을 장만하는 것도 내가 가진 예산 한도 내에서 찾았다면 별 무리 없이 진작에 결판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취향만 믿고 업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 보니 돈에다 집을 맞추면 집이 맘에 안 들고, 저 정도면 됐다 싶은 집은 항상 예산이 모자랐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주식 투자였다. 조금만 살을 붙인다면 텃밭도 있고,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옴직한 그림 같은 시골집을 장만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주식이란, 결과적으로 돈을 벌기보다는 잃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확률 게임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위험 부담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을 분명하게 따져보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내 불찰이고 실수였다. 저간에 소액 투자를 한 것마다 매번 이익을 조금씩 내곤 했던 투자경험이 부지불식간에 간을 키운 원흉이 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화를 자초하게 된 원인은 순전히 내 경솔한 감성적 판단 때문이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부실 주택자금 모기지론'이 자국시장 경제를 후려치면서 그 '쓰나미'가 세계적인 연동으로 이어져 아시아 전역과 우리나라까지 시속(時速)으로 불어 닥쳤다. 그 예후가 어떻게 되리라는 계산을 정확히 못한 결과는 참담 하였다. 경제의 흐름을 빨리 읽어낼 줄 알아야 하는 것은 주식투자의 기본 조건인데 난 그 중요한 것을 설마하고 간과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외국 자본이 쥐락펴락하는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미국 발(發) 폭격을 맞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으니 내 돈이라고 무사할 리가 있겠는가. 어설픈 주식 공부를 믿고 과감하게 투자한 것이 하루 아침에 몽땅 깡통 계좌로 둔갑해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로 인해 과한 욕심은 항상 화를 부른다는 교훈을 덤으로 얻었지만 세상으로부터 한 수 배운 학습비 치고는 액수가 너무 과했다. 그 날벼락 같은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 난 무언가를 모색해야 한다는 당위에 덜미가 잡혀 도망자라도 그 이상 더 불안하고 초조할 수 없을 만큼 전전긍긍, 절박하였다.
일이 그 지경이 되고난 뒤로는 한 순간에 비밀이 생겨 마음의 여유가 요만치도 없었다. 자식들한테 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지나 자기 단속이야 당연한 것으로 치더라도, 시골집 마련을 할 수 없게 생긴 속사정은 혼자 끙끙댈 수밖에 없었다. 나로선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비상사태인 셈이었다.
이미 집을 사러 돌아다닌 그간의 세월만으로도 주변에 소문은 널리 나 있는데, 정작 수중에는 집값이 없으니, 그보다 더 당혹스런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속은 있는 대로 타들어가고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온갖 궁리를 다 해본 끝에 결국 제2금융권에서 일부 신용대출을 받아내고, 나머지 부족한 금액은 현금 서비스를 이용해서 그럭저럭 참을만하다 싶은 오두막을 찾아내 벼락치기 이사를 하게 되었다. 산골짜기라 한겨울 난방을 고려해서 벽난로를 설치하고, 단열재로 흙벽을 보완하는 등등, 전체 수리를 마치고 나니까 통장에 돈이라곤 씨가 말랐다. 다행히 그런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아들 녀석들이 시골집을 둘러본 후에 나타낸 반응들은, 제어미의 취향이 뜻밖에 소박한 경우려니 해석하는 듯한 눈치여서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떤 형태로든 겉모양은 텃밭 달린 시골집으로 이사를 하긴 하였다. 그러나 자식들로부터 매달 들어오는 기존의 생활비에서 이자와 원금을 갚아나가려니 뒷감당이 여간만 벅찬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아랫돌 빼어다 위에다 박고, 윗돌 빼다가 아랫돌 박는 식으로 돌려막기에 급급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실인즉 그때까지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해 본 경험이라면 처녀시절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 8년이 전부였다. 결혼 후에는 전문직인 남편 덕에 세상 물정 모르고 잘 살 수 있었던 것을 복으로 여겼고, 중년에 홀어미가 된 이후로는 장성한 자식들의 보호 덕분에 또 어려움을 몰랐다.
그러나 어리석은 판단이 자초한 화로 하루아침에 당장 절실하게 된 문제가 경제 활동이다 보니 속으로 은근히 겁이 나고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 생의 가을에 당도해서 가리 늦게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과연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오만 가지가 두려운 것투성이였다. 그럼에도 분명히 요구되는 것은 경제활동 즉, 일자리였다.
2. 만남
전화를 받은 구인처의 스님이 뜻밖에도 내 제의를 군말 없이 받아들인 것은 썩 다행한 일이었다. 아니,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안 좋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려니 내심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궁하면 통한다더니 정말 그랬던 것일까. 너무나 선선하고 수월한 대답에 공연히 마음이 다 설레었다. 지저귀는 산새 소리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듣는 이가 시끄럽게 여긴다면 그것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몰상식의 우를 범한 일에 자비를 베푸는 그분이 그지없이 미덥고 고마웠다. 그간의 심로(心勞)가 비갠 하늘 같이 단박에 갠 다음 날 점심 때 쯤, 내 집으로 찾아오신 그 J.M스님이란 분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세상에 나서 60 평생에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질화로 같이 온화하면서도 생생한 눈빛이 날빛처럼 내 동공을 관통하고 뒤통수로 쑥 빠져나갔다. 동시에 서늘한 전율이 내 전신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수행자의 안광이 그렇게, 찌르듯 형형한 이치는 그의 정신세계가 그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뜻하는 것일 터였다. 어질고 선한 기운과 곧고 강한 듯하면서도 온유한 덕이 그의 몸 전체에서 줄줄 흘렀다. '극과 극은 양립 한다' 는 말이 순간적으로 내 안에서 맴돌다 스러졌다. 그런 독특한 분위기와 인자한 모습은 그때까지 인간에 대한 내 근본적인 인식이 뿌리째 흔들릴 정도로 강렬했으며 여들없는 내 눈에도 구도자의 품격이 산처럼 다가왔다.
몹시 조심스러운 가운데, 우선 내 집으로 오시게 한 이유와 면담 요청을 한 까닭을 말하고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종교에 관한 편견이 없음을 미리 밝혔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불교든 기독교든 이르고자 하는 궁극의 정점(頂點)은 진리 그 자체인데, 과정이 다르다고 해서 내 방법만이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하는 건 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과연 이 말은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말이었나 또 염려가 되었다. 도무지 왜 판단력은 그토록 흐려지고 안절부절 못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면접에서 낙방을 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와 극심한 긴장을 감안하더라도 꼭 필요한 것도 아닌 말로 왜 실수를 연발하는지 그런 자신이 정말 난감하고 창피스러웠다.
어쨌든 내게 있어 최대의 관건은 취직이 되었다고 간주했을 때, 구인 처에서 요구하게 될 신원보증 문제였던 까닭에 상대가 납득할 수 있도록 방문 요청 이유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신원보증이란 것이 과연 그 사람을 믿어도 되는가를 가늠하는 제도적 확인 장치 중 하나라면, 정해진 주소지에서 착실하게 정착해 산다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증명해 보임으로써 그 문제에 관한 공문서 제출의 생략이나 이해를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방적인 궁량이었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그런 문제로 인해 어미가 처해 있는 현재 상황을 행여 자식들이 알게 될까 저어해서 그랬다는 말까지….
" 구직자의 입장에서 무람한 요청을 한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모쪼록 해량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하게 토로했으나, 실인즉 내 집에서 구인 처인 경주까지 왕복할 수 있는 교통비가 수중에 없었다는 얘기는 차마 부끄러워 고백할 수가 없었다. 잠자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스님께 내친김에 이번엔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변명 삼아했다. 왜 그렇게 자꾸만 구차한 말이 많아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 스님, 저는 기독교인이라 불교문화에 대한 상식이 많이 부족하고 무지합니다. 불교식으로 예를 다 갖추지 못한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
" ^^... "
대답 대신 스님의 눈이 반달로 떴다. 자애로운 미소였다. 종교 문화가 다른데 따른 인지 부조화로, 곤란하고 어색한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염려가 시종일관 신경 쓰였지만 다행히 종교적 진리나 가치관에 대해 마음을 써야할 만큼 어색하지 않아 속으로 마음이 조금 놓였다. 불교는 종교적 정서가 철학적인데다 심오하다는 평소의 느낌에 편견 없이 스님을 대할 수 있었던 건 썩 다행한 일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유감스럽게도 난 그날 면접에서 낙방을 했다.
"보살님은 이 일의 적임자로 보이지 않는다 "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 된 일인 줄 믿고 기대가 컸던 나는 바로 앞에서 거절을 당하고 만 일이 하도 불행하고 섭섭해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번한 것을 참느라고 무지하게 애를 썼다. 모르는 남자(승려)앞에서의 눈물이라니, 스스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여튼 기대가 은근했던 만치 상처도 그만큼 컸기에 현실의 냉정함을 실감하고 상심이 큰 자신을 달래었다. 하다못해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는 일마저도 내 뜻대론 안 되는 현실이 참으로 맥 풀리고 서글펐다. 그러나 범종소리의 여운같이 깊고도 진중해 보일뿐만 아니라 구도자(求道者)로서의 고유한 향내랄까, 승려다운 면모가 산처럼 우뚝한 스님을 면전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내내 의미 있는 일로 가슴에 남았다.
비록 내게 퇴짜를 놓긴 했지만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포용력과 샘이 깊은 물 같은 정서하며 정기어린 눈빛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대단히 강하고 격조 있어 보이는 스님이었다. 특히 그의 어깨 언저리 짬에서부터 아지랑이같이 온 몸을 감싸듯 어리어 있는 은근하고도 자애로운 분위기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순수한 기운은, 내가 그간에 살아온 세월을 통 털어 처음 보는 품격의 구도자로서, 평범을 넘어서는 분이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절로 경건해졌다.
나무가 해를 향해 가지를 모두 하늘로 뻗는 것처럼 기독교든 불교든 종교는 오직 진리라는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고 탐구, 지향하는 것이라는 신념이 내게 있었다. 비록 문화라든가, 신앙의 실천 과정이 다르긴 해도 그 스님에게선 무언가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 있었다. 수행자로서의 정체성이랄지, 자기 닦음이 얼마나 치열한 분인가를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무엇이었다. 우물처럼 맑고 깊은데다 순수한 에너지 덩어리 같은 분의 그윽한 눈빛은 흡인력이 어찌나 강한지 한 번 빨려들면 어느 것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시공간 영역을 의미하는 블랙홀 같았다.
강물이라면 갠지스이고, 들판이라면 대평원이며, 부드럽게 쓰다듬듯 들풀 위로 지나가는 산들바람 같다고나 할까, 신체의 어느 한 곳을 지긋이 누르면 그대로 아름다운 풍금소리가 울릴 것만 같은, 흡사 수채화 같은 느낌의 수행자였다. 비록 나하고는 처지나 입은 옷이 다르고, 신앙 또한 달랐지만 종교적으로 따지자면 스승이고 어버이란 생각에 짧은 대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할 나위없는 존경심이 우러났다.
문제는 다음 날부터 나타났다. 스님은 돌아갔지만 내 염두(念頭)에는 그 스님에 관한 상념으로 가득 차 좀체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열린 창 너머로 진종일 앞산만 바라보는 시간이 하루의 태반을 차지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자기감정에 무시로 간이 철렁철렁 하고 이거 참 낭패났다 우려하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를 거절하고 가신 바로 그 J.M 원주 스님으로부터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당장 눈앞에 원수가 나타난데도 그 순간만은 얼마든지 다 용서하고 말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몇 일 동안만 보살님이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땅한 사람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만 봐주시면 됩니다 " 그러니까 적임자를 구할 동안이란 한시적 조건이라도 일을 해보겠냐는 소리였다. 나로선 '불감청(不感請)이언적 고소원(固所願)'이다. 시일이나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합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기뻤다. 게다가 J.M 스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일이 고함이라도 쳐서 자랑하고 싶을 만치 신났다. (야아, 경주로 간다아… )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그 날로 당장 가방을 꾸려서 경주행 버스에 올랐다. 하루에 한 차례씩 어미의 안부를 염려하는 자식 놈들의 전화 때문에 행여 내가 도모하는 일이 들통 나면 어쩌나 염려가 되었지만 휴대 전화라 둘러대기에 따라선 장소가 어디이든 집인 체, 위장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어른이 된 이후에 돈을 목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그 공양 간 일이 처음이었지만 좋았다. 그곳은 경주시내 소재 D대학교에서 공부하고, 기숙하는 학인(學人)승려들을 위한 공양간(식당)으로, 식사 준비는 채공(菜供)보살이라는 경험자, 다시 말해 식당 선임자인 유경험자가 맡았고, 나는 그를 도와 설거지나 기타 잡일을 하면 되는, 단순 반복 근로 보조 역할이었다.
40인분 이상의 스님들 공양을 준비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으나 막힘없이 일을 척척 잘 해내는 선임자가 내 눈에는 그저 전천후 엄마처럼 미더웠다. 문득 한 번씩 "군자 말년에 배추씨 장사한다"는 옛말이 떠오를 땐 괜히 쓸쓸하였지만 어떤 이유로든 잠깐이라도 선택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마냥 기쁜 일이었다.
오전 6시 30분인 아침 공양 시간에 맞추려면 새벽 4시 30분 정도에는 공양(식당)간으로 나가야 했다. 졸병(?)인 주제에 고참보다 늦게 일어나면 큰일이란 각성 때문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면 한 번도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긴장 때문이었겠지만 핸드폰에 알람을 맞춰두고도 맛있는 잠을 잘 수가 없다보니 몸이 항상 무거웠다. 적응하는데 어려움이야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라서 참을 수 있었지만 돌아가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는 집인데도 고달프니까 자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정신적으로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몇 날이나 지났다고, 사시장철 흘러가는 동구 밖 시냇물이며, 동리 초입의 쉼터 솔밭, 우리 집 감나무에 앉아 나팔수같이 당당하게 우짖던 까치소리까지도 무단히 그리운 것 투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것은 쾌적하고 폭신한 내 침대에서 실컷 자고 싶다는 거였다. 낯선 환경에서 안 해 본 일에 따른 고단함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전적으로 수행자들을 위한 일이라는 그 자체는 그래도 보람으로 다가왔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리고 나면 스님들은 학년별로 나눠진 식탁에서 공양을 하시는데 한 공간에서의 응연(凝然)한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일사분란하면서도 절도 있고, 조용한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참으로 보기에 훌륭했다. 상하(上下)와 선후(先後)가 엄연한 가운데 자유롭되 반듯하고 엄격한 분위기가 그럴 수 없이 신선하고 근사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은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 특히 저학년 스님들은 그냥 쓱 현관을 나가버리는 게 아니라 누가 보든 안 보든 반드시 뒤돌아서서 식사 중인 다른 스님들을 향해 합장 반배를 하고 나가는 모습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곤 하였다. 예를 다하고, 본분을 다하고, 자기의 선자리가 어디인지를 아는 정신은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살아오면서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승려들을 보기도 처음이었거니와 그분들의 생활을 가장 가까운데서 일부나마 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귀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원주(院主)이신 J.M 스님은 군대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공양주들의 직속상관으로서 자기소임인 원주로서의 책임과 관리를 위한 걸음을 하루에 한 번씩은 꼭 공양간으로 했다. 나로선 어떤 명분으로든 스님을 볼 수 있으면 기뻤고, 그날의 힘든 피로가 싹 다 가셨다.
그는 내 기쁨이자 위로였다.
생전 처음 본 이상적인 이성의 출현은 내 인생 가을의 단풍나무 숲 같은 환상이고 동산 위에 걸린 무지개 같았다.
이 무슨 알 수 없는 천둥 같은 버꾸놀음인가, 인생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라더니 난, 날마다 격랑같이 일어서는 자기감정의 집중 포화를 감당하느라 거의 녹초가 되다시피 쩔쩔매고 허둥거렸다.
상대가 명실상부한 수행자란 사실이 가슴 철렁하고 앞일이 결코 평탄치 않으리란 예감 때문에 알게 모르게 곤혹스럽고, 불행했다. 집채만 한 바윗돌에 짓눌리듯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서 되도록이면 그의 생각을 안 하려고 의식적으로 안간힘을 썼다. 잊겠지, 잊어지겠지 언제나 그 생각에 마음을 기대었다.
'연애할 운명에 놓인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이 그야말로 운명처럼 내 안에서 맴돌았다. 따져보면 면접을 보던 날 외엔 특별히 둘이서만 있었던 적도 없고,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퍼스널 히스토리나 각별한 추억이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닌데 어찌 단박에 혼이 다 빠져버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지...
스님과 둘이 마주 앉아 있었던 시간도 겨우 1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내 생애 전부의 것으로 착각할 만큼 귀하고 소중할 뿐만 아니라, 남자도 그리 순정하게 우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지금 사랑을 위한 사랑에 빠진 것일까, 인생의 마지막 언덕을 넘어가고 있다는 어떤 위기감이 부리는 마술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아직도 남아있는 인생 황혼의 마지막 잉여의 불씨 같은 것일까.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더 화안한 것처럼 말이다.
과연 내 감정이 얼마만큼 진실한가, 잠깐 본 것만 가지고 철석같이 믿기엔 지나치게 가변적인 것이 아니냐고 자신을 닦달 해봐도 그러한 느낌에 대해 단 한 점의 의혹이나 의구심이 내겐 없었다. 원체 속에서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그의 기운이 자애로운데다 관후한 기품까지 갖추고 있어 일거수일투족, 자그마한 표정 하나까지, 어느 것 한가진들 뇌리에 쏙쏙 들어와 박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서로의 감정이 같은 주파수 대역에서 소통 가능한 것이라면 그 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무엇일까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설령 혼자 빠진 짝사랑일지라도 아직 펄펄 끓는 피가 여전히 내 심장을 뛰게 하고 있다는 엄연함과 '인생에는 가끔 정답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인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농부가 밭에다 씨앗을 뿌린다고 해서 심은 족족 모조리 다 싹이 나는 것은 아닐 터였다. 바로 그러한 이치였다.
오후 6시 저녁 공양이 끝난 후에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가면 잠들기 전까지 묵상을 했다. 그때마다, 독감 바이러스 전염하듯 염두(念頭)를 지배하는 열화와 같은 염원은, 용솟음치는 내 사랑의 감정이, 온 세상을 다 준대도 안 바꿀 것 같은 그 스님한테로 고스란히 옮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가득 차올랐다.
얼마나 간절하고 진지한지 오로지 그 한 가지 외에는 아무 것도 의식할 수 없었다. 다행히 비록 마주 앉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못 되더라도 공양시간이나마 스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만은 내 에너지원으로써 상당히 고무적이었으며 충분히 날 재충전 시켰다.
학인(學人 )승려들의 기숙사인 석림원은 공양간 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약간 높은 구릉지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다 원주이신 J.M 스님의 차는 색깔이 까만 데다 차체도 커서 언제나 한눈에 들어왔다. 공양간에서 내다보면 항상 곧바로 보이는 곳에 주차 돼 있어 차가 보이지 않는 날은 사람을 잃은 것 같이 섭섭해서 속으로 늘 차가 있나, 없나 그것만 살피고 찾았다.
내겐 스님의 차가 곧 스님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그와 연관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소중하고 귀하기만 하였다.
▷필자 약력
- 홍 지 운(필명'67)
- 전 간호사
- 현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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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이낙연 "'줄탄핵·줄기각' 이재명 책임…민주당 사과없이 뭉개는 것 문화돼"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