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의 소리와 울림] 좋은 대통령, 나쁜 대통령

입력 2015-10-30 02:00:05

야당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현수막

'좋은 대통령, 나쁜 대통령' 독특한 뉘앙스

역사 만든 박정희·역사책 만든 박근혜로

여권 지지층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요즘 어디를 가나 눈에 뜨이는 것이 각 정당이 내건 현수막이다. 최근에는 가장 큰 이슈인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어 이 문제가 뜨거운 감자임을 알게 해 준다. 새누리당은 '대한민국 부정하는 역사교과서 바로잡겠습니다'라고 포문을 열었고, 새정치민주연합은 '좋은 대통령은 역사를 만들고 나쁜 대통령은 역사책을 바꿉니다'고 대응했으니 가히 현수막 전쟁 시대라고 할 만하다.

새누리당의 구호는 사람을 자극하는 전투적인 것인 데 비해 새정치연합의 구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한다. 새정치연합은 안중근 의사의 유명한 단지 손바닥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아서 교과서 국정화가 민족정신을 배반한다는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다. 통상적으로 야당이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구호를 택하고 여당이 이미지 홍보를 해 왔는데, 그 같은 추세가 뒤바뀐 모습이다. 

야당이 현수막 전쟁에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손혜원 홍보위원장 덕분이다. '처음처럼' '참이슬'(소주), '힐스테이트'(아파트), '트롬'(세탁기) 등 성공적인 상품 브랜드를 연거푸 만들어낸 광고 홍보계의 귀재 손혜원 씨를 문재인 대표가 홍보위원장으로 영입했기에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손 위원장의 최신작인 '좋은 대통령, 나쁜 대통령' 현수막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을 느낀다.

새정치연합 현수막이 지칭하는 '역사책을 바꾸는 나쁜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임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역사를 만드는 좋은 대통령'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새정치연합의 의원이나 당원에게 물어본다면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을 '좋은 대통령'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역사를 만든 좋은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민주화 운동을 했고 대통령이 되어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등 공적을 남겼으며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등 민주주의를 고양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 두 전직 대통령을 '역사를 만든 대통령'이라고 지칭하기에는 무언가 모자란다는 느낌이 든다. 

미국 대통령 중 '역사를 만든 좋은 대통령'을 뽑으라면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들기 마련이다. 사우스다코다주 마운트 러시모어에 새겨진 큰 얼굴 조각상이 바로 이 네 명의 대통령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역사를 만든 좋은 대통령'을 가져본 적이 있기나 한가? 필자는 아무래도 박정희 대통령이 이 범주에 가장 가까이 갔다고 본다. 물론 장기집권과 유신체제에 있었던 심각한 인권유린 등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좋은 대통령'으로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산업화를 통해 최빈국이던 우리나라를 굴지의 경제 대국으로 키우는 토대를 마련했기에 '역사를 만들어 냈다'고 할 만하다고 보는 것이다. 적지 않은 과오가 있었지만 국가안보를 공고히 하고 수출 주도 경제를 일으켜서 빈곤 문제를 해결했으며,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산을 푸르게 했으며, 다목적 댐을 건설해서 홍수와 가뭄에 대처하는 국토 관리의 틀을 세웠고, 건강보험과 부가가치세를 도입해서 국가 발전의 토대를 세운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당이 내건 현수막은 단순히 자기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 머무르기보다는 부동층과 상대 정당 지지층도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좋은 대통령, 나쁜 대통령' 현수막은 독특한 뉘앙스를 풍겨 흥미롭다. 이 현수막을 본 여권 지지층이 '역사를 만든 대통령'은 박정희, '역사책을 바꾸는 대통령'은 박근혜로 대비해서 생각할 여지가 있으니 말이다. 

나는 손 위원장에게 '좋은 대통령'이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이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손 위원장은 새정치연합과 인연을 맺기 전에는 정치적으로 무색무취한 사람이었다. 그와 대화를 해 보면 전두환을 제외한 지난날의 대통령들이 모두가 시대적 소명을 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그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선 손을 내젓는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여야 간 현수막 전쟁에서 손 위원장의 다음 작품이 무엇인지도 궁금해진다.

※이상돈: 1951년 서울 출생. 경기중고'서울대 법대. 중앙대 법대교수·학장.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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