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경제성장률과 삶의 질

입력 2015-10-29 01:00:09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종말(또는 급변)을 예견하는 학자들이 많다. 사실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지난 세기처럼 계속 맹위를 떨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경제성장률'과 같은 지표로 표현되는 자본주의의 성장 또는 국부(國富)의 축적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한풀 꺾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이 7%에 못 미칠 것으로 우려되고, 올해와 내년의 국내 경제성장률도 3%대를 담보하기 힘들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다. 유럽과 미국 등 서구 열강들도 20세기의 화려했던 경제성장기를 뒤로하고 저성장 기조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사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3%대에만 이른다고 해도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성장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역작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에 '누적 성장의 법칙'이 등장한다. 피케티는 인구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1700 ~2012년 세계 인구는 불과 연평균 0.8% 증가하는데 그쳤다. '불과'라고는 해도 무려 3세기에 걸쳐 진행된 결과, 세계 인구는 10배 이상(1700년 6억 명 정도에서 2012년 70억 명으로) 늘어났다.

경제성장률도 마찬가지다. 가령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3.5%로 가정했을 때 이런 추세가 한 세대(30년)만 지속돼도 누적 성장률은 무려 181%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비정상적 성장은 존재할 수 없다. '무한 경쟁'을 통해 극적 팽창을 기록했던 20세기에도 이런 성장은 국지적이었을 뿐인데, 하물며 '수직적 경제사회에서 수평적 공유사회로의 전환'이 예견되는 21세기에 기록적 경제성장이 지속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경제성장률로 국부를 따지는 시기는 다소 이른 감이 있다고 해도, 어느덧 막을 내리는 분위기다. 경제성장을 통해 쌓은 국부는 국민 행복을 담보하기 위한 선결 요건이었다.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던 시기에 국부는 곧 행복의 척도였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있다.

자본주의의 변화는 워낙 큰 테두리의 이야기다. 따라서 미래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바뀔가보다는 '삶의 목적'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논하는 편이 조금은 쉬울 듯하다.

경제성장률(또는 국내총생산, 1인당 국민소득 등 경제지표)을 근거로 그 사회나 국가가 '살 만해졌다'거나 '살기 어려워졌다'고 평하는 시스템은 미래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장이 곧 행복'이 아니라 '과연 어떤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가 새 척도라는 말이다.

얼마 전 충격적인 보고서가 나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5 삶의 질'(How's life?)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삶에서 경제적 지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나아진 모습을 보였지만 체감하는 삶의 질은 거의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특히 '사회관계 지원' 항목에서 한국은 OECD 34개국 중 꼴찌를 차지했다.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있는지와 관련한 점수에서 한국은 72.37점을 기록해 OECD(88.02점) 평균에 크게 못 미친 것은 물론 회원국 중 최저였다.

어린이들이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도 OECD에서 가장 짧은 하루 48분에 불과했다. 아빠가 함께 놀아주거나 공부를 가르쳐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하루 3분, 돌봐주는 시간도 3분에 그쳤다. OECD 평균은 하루 151분이고, 이 중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은 47분에 달했다.

이런 사회라면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10%를 달성한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제 지표와 삶의 질(행복) 사이의 '상관관계'는 이미 희박해진 상태다.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행복을 측정하는 척도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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