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40) 중국집

입력 2015-10-29 01:00:09

어린 우리는 눈에 띄는 게 중국집이었으므로 그 사람들은 음식점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상업, 토목 등 건축 관련 사업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1913년에는 모문금, 강위관 등이 천주교의 성모당, 성유스티노 신학교, 주교관 그리고 성 바오로 수녀원 등을 건설했다.

1960년대 말까지 대구에는 중국집이 많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이 많았다. 동네마다 중국집이 있었고 시내 중심가에는 밀집해 있었다. 이 무렵에는 주문을 받고 나서 면을 뽑았고, 만두도 주문을 받고 소를 만들었다. 밀가루 반죽 덩어리가 주방장의 손에 올라가면 길고 가느다란 국숫발로 변하는 게 신기했다. 만두소를 만들 때는 통나무 도마 위에서 넓적한 칼 두 개를 들고 무당 칼 춤추듯 고기와 나물을 두드리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식당을 찾아갈 때는 배고플 때인데 이렇게 마냥 기다리노라면 짜증이 날 때도 잦았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아무 반응도 없이 요리만 했다. 중국인의 '만만디'(慢慢的)를 성질 급한 대구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웠다. 손님이 중국집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도 인사를 하는 법이 거의 없다. 마치 소가 닭 쳐다보듯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게 인사이며 음식을 주문하라는 언어도단의 신호였다.

중국집 할아버지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의 일과는 아침이면 종달새 통을 가게 앞에 내다 걸고 종일 밖에 앉아 있었다. 가게가 파할 때면 다시 새장을 안으로 들고 들어갔다. 안주인은 전족(纏足)을 하고 다녔다. 천으로 발을 칭칭 동여매 발이 무척 작았다. 그런 탓에 걸음도 잘 못 걸었다. 어른들 말로는 여자가 귀한 중국에서는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발을 작게 만든다고 했다. 노인들은 우리말이 서툴렀고 거의 반말로 했다. 손님 보고 정 낸다고 하는 소리가 "많이 먹어해"라고 인사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동네는 중국집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구일보사 바로 옆에 있던 '영남반점'이 가장 컸고 우리집은 그 식당 단골이었다. 우리 공장 사람들은 우동이나 자장면을 하루에도 몇 번씩 시켜 먹었고 귀한 손님이 오면 탕수육이나 잡채 그리고 잉어찜이나 라조기 등을 주문했다. 이런 독구이(得意, 단골의 일본어)에게 설과 추석이면 그 사람들은 반드시 선물을 갖고 온다. 추석 때는 월병이었고 다른 때는 고량주를 갖고 왔다. 지금도 내가 단골로 다니는 동성로의 '중화반점'에서는 명절 후 반드시 죽엽청주 같은 술을 선물한다.

다른 지방 사람들은 대구 사람들이 배타적이라고 한다. 배타적이란 말은 그다지 기분 좋은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나쁜 점만 있는 게 아니다. 시속에 쉽게 야합하지 않고 부자나 권력자에게 알랑방귀를 뀌지 않는 행동은 멋있는 배타이다. 이런 똥고집 센 대구에 처음 이민 온 중국인들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쉽게 짐작이 간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두사충이 귀화해 대구에 산 이후 오랜만에 대구에 살러 온 중국인들은 1901년 계산성당 건축을 위한 석공 14명, 목수 3명, 요리사 2명 그리고 건축업자 19명 등이었다. 그들은 일이 끝나고는 돌아가 버리고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905년부터라고 한다. 이 무렵은 경부선 철도가 가설됐는데, 이 공사에 중국인들이 참여하러 왔다 주저앉았다. 그들의 고향은 90%가 산둥현이며 특히 칭다오에서 많이 왔다고 한다.

어린 우리는 눈에 띄는 게 중국집이었으므로 그 사람들은 음식점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상업, 토목 등 건축 관련 사업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1913년에는 모문금, 강위관 등이 천주교의 성모당, 성유스티노 신학교, 주교관 그리고 성 바오로 수녀원 등을 건설했다. 1967년에는 중국인 3천108명이 대구에 거주했다. 대구는 다른 도시보다 화교들이 많이 살았다. 1943년 화교 소학교가 생겼고 1950년에는 서울, 인천, 부산에서도 화교 소학교가 생겼다. 현재도 봉덕동에는 대구 화교 중'고등학교가 있다.

중국인들은 식당을 해도 위생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아 사람들이 께름칙해했다. 그들은 검은 조끼에 검은 모자를 자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조리 시간도 길었다. 식당 상호도 절대로 한글로 쓰지 않았다. 이런 악조건에 대구 사람들의 배타적인 기질이 있었음에도 중국집은 번창했다. 비결의 첫째는 음식값이 싸고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식당은 혼자 가면 얼굴을 찌푸린다. 그러나 중국집은 한 사람이 오든 열 사람이 오든 똑같이 대했다. 더욱이 가장 큰 장점은 배달이었다. 우리나라에는 배달이 없었는데 이 사람들은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배달해주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덕이든 평지든 투덜대지 않고 배달해주었다. 요즘은 철가방이라지만 그때는 나무로 된 무거운 상자였다. 비록 인사는 하지 않고 옷도 깨끗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음식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깊은 정이 녹아있었기 때문에 대구 사람들은 "왕 서방, 왕 서방" 하면서 그들과 친하게 지냈다.

객지에 살다 대구에 돌아와 보니 우리 동네 영남반점은 어디에 가고 없었다. 정들어 살던 우리 동네 중국 사람들도 사라졌다. 수소문해보니 미국으로 많이들 갔다고 했다. 그들의 '엑소더스'(Exodus)는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극심했던 구박 탓이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가게를 할 수 있는 50평 이상의 땅을 살 수가 없게 됐다. 살기 싫으면 가라는 뜻이었다. 이런 등 떠미는 푸대접은 이웃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1990년대 들어 한국은 혈맹이었던 대만과는 외교를 단절하고 중국과 국교를 맺었다. 대구의 중국인들은 그들의 화교소학교 벽에 새겨 둔 교훈대로 살고 있다. '예(禮), 의(義), 염치(廉恥)'가 있는 삶을 산다. 그 학교에는 오늘도 장개석 총통의 흉상이 있고 오성홍기(五星紅旗) 대신에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휘날리고 있다. 대구에는 모택동이 없다. 대구 화교는 멋있는 대구 사람이다. 의리의 인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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