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프로야구 무대 접는 대구시민야구장 "대구시민과 울고 웃고…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

입력 2015-10-28 01:00:05

만수·효조·시진 '레전드',승엽·승환 그리워 질듯, 2002 KS 첫 우승 못잊어

삼성라인온즈 이승엽
삼성라인온즈 이승엽
대구시민야구장
대구시민야구장

저는 대구시민야구장입니다. 1948년 4월 20일 대구 북구 고성동에서 토성 형태의 야구장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이곳은 칠성원두로 불렸습니다. 1960년 보수, 확장하면서 대구종합경기장 내 야구장으로 자리 잡았고, 1976년부터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약칭 대구시민야구장)으로 불리고 있답니다. 프로야구 출범을 앞둔 1981년 외야에 관람석이 설치됐으며 2002년에는 인조잔디가 깔렸습니다.

저는 감히 대구 야구의 산증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대구에 공식경기가 가능한 공공야구장이 저 혼자뿐이기 때문입니다. 긴 세월 대구 야구를 지켜본 저는 이제 프로야구 경기장의 소임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2015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삼성 라이온즈가 서울 잠실구장 원정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우승하기를 스스로 바랄 뿐입니다.

사실 저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허물어져 사라질 뻔했습니다. 대구시민운동장 리모델링 계획에 따라 애초 없어지는 것으로 계획되었지만, 저를 사랑하는 야구팬 등 시민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내년부터는 생활체육 야구를 즐기는 시민들에게 더 친숙한 공간으로 재탄생할 것 같습니다.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1982년 출범 후 34년을 함께 한 프로야구 역사를 떠올려봅니다.

◆많지 않았던 영광의 순간

되돌아보면 삼성은 성적을 떠나 항상 화려한 조명을 받았습니다. 원년부터 우승 후보 1순위로 꼽혔지만, 발자취는 순탄하지 않더군요. 1980, 1990년대 인고의 세월을 보낸 진통 끝에 2000년대 들어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했지요.

최고 영광의 순간은 삼성이 2002년 한국시리즈(KS)에서 우승할 때입니다. LG를 4승 2패로 물리치고 '7전 8기' 끝에 KS에서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지요. 프로야구 무대에 뛰어든 지 21시즌 만에 KS에서 우승하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앞서 1985년 전'후기를 석권하며 전무후무한 통합 우승을 차지했지만, 팬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2002년 11월 11일 KS 6차전.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앞선 삼성은 9회초까지 6대9로 뒤져 패색이 짙었습니다. 그런데 9회말 1사 1'2루에서 '대구 야구의 영웅'이자 '국민타자' 이승엽이 동점 3점 홈런을 터뜨렸습니다. 용광로처럼 들끓는 함성에 저의 몸은 불덩이가 됐습니다. 이어 마해영의 끝내기 1점 홈런이 나왔습니다. 믿기지 않는 연타석 홈런으로 삼성은 KS 첫 우승을 확정했지요.

이후에도 삼성이 2005'2006년, 2011~2014년 KS에서 6차례 더 우승했지만 저는 관람석이 작다는 이유로 2013년을 제외하고 마지막 우승의 순간을 만끽하지 못했습니다.

삼성이 4승 3패로 두산을 꺾고 통합 3연패를 확정한 2013년 KS도 잊지 못할 명승부였습니다. 저는 1, 2차전에서 쓴잔을 들이켰지만, 2승 3패로 몰린 6, 7차전에서 짜릿한 뒤집기 승리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했습니다. 홈 어드밴티지를 발휘한 거죠.

무엇보다 저는 대구가 낳은 기라성 같은 야구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혜택을 누렸습니다. 1985년 프로야구 최초로 타격 3관왕에 오른 '푸른 피의 사나이' 이만수, 고인이 됐지만 역대 통산 타율 1위(0.331) 자리를 지키는 장효조, 가장 먼저 100승 고지에 오른 투수 김시진은 1980년대를 빛낸 레전드로 기억합니다.

1990년대에는 이승엽, 2000년대에는 오승환이라는 걸출한 두 스타가 등장했습니다.

1995년 입단한 이승엽은 대구 경상중 시절부터 저와 함께 했습니다. 경북고 2학년 때는 이미 에이스 투수 역할을 하면서 홈런포를 펑펑 쏘아 올렸죠. '될성부른 떡잎'이더군요. 그가 남긴 수많은 기록 중 으뜸은 아시아 시즌 홈런 신기록(56개)이 아닐까요. 이후 일본프로야구에서 용병에 의해 깨졌지만, 이승엽이 기록을 경신할 당시의 열기가 아직 남아있네요.

2003년 10월 2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이승엽은 2회말 첫 타석에서 롯데 투수 이정민의 3구를 통타해 왼쪽 담장 너머로 날려 보냈습니다. 아시아 타이기록을 깨는 순간 외야석에는 홈런공을 잡으려는 잠자리채가 난무했습니다. 이승엽을 외치는 환호와 축포에 지은 지 오래되고 낡은 저는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2005년 데뷔한 '돌부처' 오승환의 활약상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2006년 10월 1일 당시 아시아 세이브 신기록(47세이브)을 수립할 때는 원정 경기라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는 항상 경기를 매조지 했기에 어느 선수보다도 더 많은 순간 기쁨을 함께했습니다. 그는 2011년 8월 12일 KIA전에서는 보란 듯이 최소경기 200세이브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때 축포가 터지면서 불이 나 소방차가 출동했죠.

◆강렬했던 잊고 싶은 순간

그런데 지난 세월의 기억 가운데 잊고 싶은 순간도 많네요. 1982년 원년부터 시작해 2002년 KS 첫 우승 전까지 이어진 암흑기 때문이겠지요. 이 기간 삼성은 프로야구 첫 몰수경기(1982년 8월 26일)를 당했으며 1984년에는 져주기 게임의 악몽을 겪었습니다. 당시 삼성은 전기리그 우승 후 후기리그에서 OB를 피하려고 롯데에 져주기 게임을 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에게만 4승을 헌납하며 롯데에 3승 4패로 패했습니다.

1986년 10월 22일 밤에 빚어진 해태 구단 버스 방화사건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해 KS 3차전에서 삼성이 해태에 5대6으로 역전패당하면서 분을 이기지 못한 관중이 해태 구단 버스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전남 5가 9405의 번호판을 단 버스는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일부 관중은 이 모습을 보며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광기 어린 모습까지 보였답니다. 결국 경찰이 출동해 최루가스를 쏘며 진압한 끝에 사태가 수습되더군요. 앞서 광주에서 열린 KS 1차전에서 삼성 투수 진동한이 관중이 던진 빈병에 머리를 맞은 것이 발단이 됐지만, 이 사태는 두고두고 대구 야구팬들의 이미지를 흐리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이별을 고하는 지금 이 순간입니다. 삼성의 영원한 레전드로 남을 만한 발자취를 남긴 투수 3명이 해외에서의 도박 물의로 KS 엔트리에서 빠진 것입니다. 선발과 불펜으로 최고의 활약을 이어가던 이들과 마지막으로 멋진 인연을 쌓으려고 했는데 그들이 프로야구 스타라는 준엄한 도덕성에 흠집을 내 참으로 안타깝네요.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3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기술적으로, 경제 규모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음을 지켜봤습니다. 그만큼 FA 계약으로 돈과 명예를 거머쥔 스타들에 대해 빈틈없는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삼성이 부디 새 야구장 '대구 삼성라이온즈 파크'에서도 승승장구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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