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자본에 맞선 한국 기업의 탄생
경성상계史/박상하 지음/푸른 길
우리나라 경제경영사에서는 1945년 해방을 기준으로, 이전 시기를 '선사시대'로, 이후를 '역사시대'로 종종 구분한다. 말하자면 조선 개항과 일제 침략으로 500년 조선 상계를 대표하던 육의전이 붕괴되면서 우리 상계는 지배력을 상실했고, 상업활동이 있었다고 해도 존재 의미가 미미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러나 "개항과 더불어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던 물질문명의 쓰나미가 밀려왔고, 우리 상계는 막대한 일본 자본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지배력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성상계는 결코 신화가 아니며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아니다. 경제경영의 문법이 엄연히 존재했고, 훗날 이 땅에 만개할 한국 자본주의의 길을 헤쳐 나갔다"고 말한다.
책 '경성상계사'는 구한말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앞뒤까지 근대 자본주의의 싹을 틔운 경성상계(京城商界)의 흥망성쇠, 그 맥을 이어 오늘날 한국 경제계를 이끌고 있는 기업의 탄생과 역사적 배경, 그 치열했던 도전을 방대한 사료와 소설적 얼개로 소개한다.
청일전쟁(1894)에 패한 청나라의 상인들은 폐점과 귀국을 서둘렀고, 그 자리를 일본 상인들이 빠르게 채워나갔다. 도성 안의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상인들은 이익집단인 거류민회나 상업의회를 결성하는가 하면, 서울 진고개 일대를 근거로 일본인 시가지를 조성했다.(대구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북성로, 약전골목, 경상감영로, 태평로, 중앙로 등이 모두 일본인들이 만든 신시가지다.)
경성의 일본인들은 진고개 일대에 조성한 신시가지를 혼마치(本町)라고 칭했다. 1887년 진고개 일대의 일본인은 수천 명이었고, 일본 기생 게이샤, 일본 요릿집 화월루, 일본 과자점, 전당포, 약방, 무역상, 옷가게, 면포가게 등이 들어섰다.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지낸 친일파 송병준이 혼마치에 청화정이라는 일본 요릿집을 차리고 나서는 판이었다.
봉건왕조의 비호 아래 도성 안의 상권을 독식하던 육의전은 조선왕조가 주변 열강에 눌려 더 이상 적극적으로 비호할 수 없게 된 데다, 1883년 인천 제물포 개항과 일본 상인들의 진출, 서구의 화륜선과 철선이 실어 나르는 개화 상품의 물결에 무너지고 말았다. 편리하고 진기하고, 효율적인 서구 물품에 조선인들이 너도나도 지갑을 열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선의 상업은 맥이 끊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조선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상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궁중의 선전관 민병호는 궁중 전의들과 교류하면서 익힌 궁중 비기를 들고 나와 상계에 뛰어들었다. 그가 만든 것은 목숨을 살리는 물, 즉 '활명수'(活命水)였다. 동의보감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궁중 비방을 토대로 60㎖ 병에 담고, 판매를 위해 동화약방을 창업했다. 1897년 가을이었다. 궁중 비기로 만든 약, 한약처럼 굳이 달여 먹지 않아도 되는 약, 신속한 효과 등으로 활명수는 순식간에 인기를 끌었고, 유사상품이 쏟아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동화약방은 1910년 국내 최초로 부채표를 상표로 등록하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까지 했다.
조선이 망하자 왕족이었던 이재현은 잡화상점을 차렸고, 왜사탕, 물감, 바늘, 쌀 등을 팔았다. 천하가 다 아는 왕족이자 경상도 관찰사까지 역임했던 그는 점포를 낸 뒤에는 손님이라면 양반 상놈 가리지 않고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드릴까요?'라고 응대해 '까무러칠 만큼 변해버린 세상'을 보여주었다.
조선 3대 재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은 1917년 최초로 택시 영업을 시작했는데, 경성은 물론 멀리 충청도 충주까지 노선을 유지했다. 요금이 워낙 비싸(시간당 5원, 현재 가치 약 55만원) 서민들은 이용하지 못했다.
소작농의 후예였던 박승직은 오직 맨주먹으로 전국 규모의 포목 장사를 했다. 전국 가정에서 부녀들이 조금씩 짠 포목을 사들여 한성은 물론, 경상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까지 돌며 팔았다. 교통수단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 그는 조랑말에 포목을 싣고 산과 들을 걸었으나, 맨손으로 일어선 우리나라 첫 근대기업가였다. 그는 1915년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을 내놓고 국내 화장품 업계를 이끌었다.
이 외에도 책은 육의전이 떠난 종로에서 상업을 일으킨 여러 한국인과 그들의 사업을 소개한다. 극장, 은행, 빌딩, 창고를 이용한 물류업, 조선운송, 금광왕, 백화점 사업가, 방직산업, 본격 무역업자 등이다. 총 7부로 구성돼 있는데, 7부에서는 해방과 함께 새롭게 판을 짜기 시작하는 경성상계의 모습을 소개한다. 딱딱한 이야기를 딱딱하지 않게 쓴 흥미로운 책이다. 지은이 박상하는 경성시대 우리나라 기업사에 관심이 깊은 학자이자 소설가로 10여 권의 역사 관련 책을 냈다. 446쪽,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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