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실크로드 행사가 열리고 있던 경주 보문단지 세계문화엑스포공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한 30대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 머리만 한 음료수 병을 든 아이 역시 적잖이 지친 모습이었다.
김성훈(34'포항) 씨는 "근무 비번인 날이라 큰 마음 먹고 경주까지 왔는데 볼 것도 없고 바가지 투성이라 실망이다"며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고 했다.
경북도의 대표행사인 '실크로드 경주 2015'(이하 실크로드)가 쏟아부은 돈만큼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관변단체를 통한 무리한 관람객 동원에다 부족한 콘텐츠, 값비싼 입장료 등 갖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관 주도의 전시성 행사와 바가지 등 우리나라 축제의 고질적 병폐는 이번 행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관람객들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부분이다.
"147억원이란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도 왜 관변단체를 동원하지 않고는 사람을 모을 수 없느냐"는 물음이 경상북도를 향해 날아들고 있다.
◆입장료도 비싼데 유료 공연 많아
실크로드 입장료는 보통권의 경우, 성인(만 19세 이상) 1만2천원, 청소년(중'고등학생) 9천원, 어린이(만 4~12세) 7천원이다. 단체(내국인 20명'외국인 10명 이상)는 성인 1만1천원, 청소년 8천원, 어린이 6천원이며 만 65세 이상'장애인 4급 이하'다문화가정'현역군인 등에게는 30~50%가량 우대할인율이 적용된다.
입장료가 결코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정작 실크로드 축제를 모두 즐겨보려면 더 많은 돈을 들여야 한다. 문화공연과 체험시설 등 대부분의 행사가 별도의 입장권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현재 실크로드에 설치된 체험'공연 프로그램은 '백결공연장 상시공연', '플라잉-화랑원정대'와 '바실라' 등이다. 이 중 백결공연장 상시공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료공연이다.
플라잉-화랑원정대는 8천원, 애니메이션 등은 5천원, 특히 규모가 큰 해양액션어드벤처 공연 '바실라-화랑원정대'는 1만원에서 최고 3만원까지 별도 금액을 내야 한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은 공룡박물관과 3D체험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돈을 내지 않고 실크로드를 둘러볼 경우. 30분 만에 눈요기가 끝난다. 백결공연장과 솔거미술관, 기존에 설치돼 있던 엑스포 설치물 등만 둘러보면 더 볼 게 없다. 비싼 값을 치르고 들어온 아버지들의 한숨이 이해되는 부분이다.
음료와 간식거리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즐겨 찾는 슬러시 음료는 1병당 5천원이고, 회오리감자 등 웬만한 길거리 음식은 죄다 3천원을 훌쩍 넘는다.
두 자녀와 함께 행사장을 찾은 이혜진(42'경주) 씨는 "국제적인 축제가 열린다고 해서 왔더니 다 돈을 내라 하고 무료관람 대상은 이미 본 것뿐,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며 "반나절 동안 10만원을 가지고도 우리 세 식구가 축제를 즐기기에 모자라더라"고 혀를 내둘렀다.
◆동네 야시장보다 못한 그랜드 바자르
실크로드가 과거 상인들이 오가던 길임을 감안하면, 이번 행사에서 가장 취지에 걸맞은 프로그램은 '그랜드 바자르'다. 각 나라 상인들이 참가해 특산품과 전통음식 등을 판매하는 국제 장터이다.
하지만 정작 실태를 보고 나면 일반 야시장보다 결코 낫다고 하기 어렵다. 각 나라의 전통문화를 찾아볼 제품은 드물고, 대부분 조잡한 수공품이나 길거리 음식 판매점과 다르지 않다. 이마저도 케밥이나 터키 아이스크림 등 어느 행사장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음식들이다. 비슷비슷한 종류의 가게들이 잇따라 있어 국가별 특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가격도 최소 1만원짜리 양꼬치부터 간혹 80만원 상당의 고급 가방까지 선보여 '바자르'란 이름을 무색하게 했다. 각국의 조리사들이 화장실에서 그냥 나와 맨손으로 재료를 만지는 모습도 눈에 띄는 등 위생 상태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엑스포조직위가 특별 이벤트로 준비한 엽전 체험행사도 참가자들의 외면 속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조직위는 관람객들이 현금을 엽전으로 교환, 이를 그랜드 바자르 내에서 쓰도록 했다. 상인들이 엽전을 다시 가져오면 일정 수수료를 받고 이를 우리나라 돈이나 각 나라 화폐로 환전해주는 방식이다.
과거 고려나 조선시대 상인이 된 듯한 체험을 선사함과 동시에 수수료를 통한 부가적인 수익을 얻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상인들이 편의를 위해 한국 돈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았으며 일부 가게에서는 일반 화폐를 쓸 경우, 물건값을 깎아주기도 했다. 안내데스크에서 수시로 '엽전을 바꿔야만 물건을 살 수 있다'는 방송을 내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랜드 바자르 앞에서 기자가 만난 유윤경(27'경주시) 씨는 "특산품이라고 판매하는 물건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팔찌 등이 대부분이다. 그 나라의 분위기나 풍물을 볼 수 있는 상품이 전혀 없지 않느냐"면서 "케밥도 비싼 가격에 비해 너무 볼품없었다. 일회용 접시에 아무렇게나 음식을 담아주니 위생 상태를 믿을 수 없어 아이들에게 제대로 먹이지도 못했다"고 했다.
◆행사 운영도 위험천만
주말처럼 사람이 모이는 시간대에는 관리 부족으로 위험한 상황이 적잖게 연출됐다. 특히 3천원의 사용료가 드는 '실크로드 관람열차'는 운행 도로와 관람객들의 보행 도로가 구분되지 않아 유모차와 열차가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등 종종 아찔한 장면이 등장했다. 열차가 운행하며 뿌연 먼지바람을 일으키자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들은 계속 불평을 쏟아냈다.
이런 현상은 축제 운영이 조직위의 일괄적인 관리가 아니라 소규모 용역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탓이다. 그랜드 바자르에 참여한 개인업주나 행사 진행 업체에서 개인 아르바이트를 고용, 전체적인 서비스 및 안전'위생교육이 일관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낳고 있는 것이다.
경주의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이번 실크로드는 쉽게 준비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행사를 이어가려는 전형적 관 중심 축제의 재연이었다"면서 "당장의 관람객 숫자나 수익금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향후 행사를 계속하려면 관람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콘텐츠를 처음부터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주엑스포조직위 관계자는 "열심히 준비했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몰리고 한정된 경비 범위 내에서 하다 보니 한계가 분명히 있다. 불편을 겪었다면 죄송하다"며 "실크로드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어서 계속 발전을 거듭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으니 대구경북 지역민들이 애정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