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긴 외모에 총명함 여덟 살 때 지은 사모곡 마을사람들 깜짝 놀라
구미시 도량동 일대에는 해평 길씨 일족 30여 가구 100여 명이 모여 산다. 길씨의 본관은 해평, 단일본이며 전국적으로 인구가 1만~2만여 명에 그칠 만큼 드문 성씨이다. 그래서 혈족 간 연대의식이 높은 편이며 가문이 낳은 위인 야은 길재를 추앙하며 자랑스럽게 여긴다. 길재는 고려 말에 짧은 관료 생활을 한 후 불사이군의 신념을 고수하며 고향인 구미에 은거해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충절의 발자취는 조선의 관료 사회에 한 줄기 큰 빛이 됐다. 강직한 성품과 올곧은 태도, 청빈한 생활과 학문에 정진하는 자세는 관료의 사표이자 선비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후손들은 길재의 음덕에 힘입어 명문가의 후예로 살아가고 있다.
문중에 따르면 해평 길씨는 구미 외에 충남 금산에 800여 가구가 사는 것을 비롯하여 전남 장흥과 광주, 강원 화천과 춘천, 북한 지역인 평안북도 영변과 선천 등지에 살고 있다. 충남 금산에 가장 많이 모여 사는데 이곳은 길재의 처가가 있었던 곳으로 그가 젊은 시절 잠시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 집안의 유명 인사로는 서울고검장 출신 길태기 법무법인 광장 대표변호사, 1970년대 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낸 고(故) 길전식 의원, 역시 같은 시대에 공화당 사무총장을 역임한 고 길재호 의원, 가수 고 길은정 씨 등이 있다. 길태기 전 서울고검장은 집안이 금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고 길전식 의원은 전남 장흥 출신, 고 길재호 의원은 평북 영변 출신이다. 가수 고 길은정 씨는 고향이 강원 화천이다.
길재는 1353년(고려 공민왕 2년)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원래 봉계리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 봉한리로 지명이 바뀌었다. 일본인 공무원이 '계'(溪) 자를 '한'(漢) 자로 오인해 빚어진 일로 추정된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길원진은 임지를 옮겨 다니던 관료였으며 어머니 김씨는 황해도 토산(지금의 금천)의 사족(토지를 소유하고 일정한 학식을 쌓음으로써 지역에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나 집안) 출신 김희적의 딸이었다. 해평 길씨 집안에서 4대째 출생으로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길재는 해평 길씨 1세조인 길시우의 증손으로 길시우는 성균관 유생 출신이며 그의 조부인 길보는 산원동정이라는 낮은 벼슬을 지냈다. 이 집안의 뿌리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중기인 문종 때 당나라에서 온 8학사 중 한 명인 길당이라는 인물이 시조에 해당한다. 길당은 정당문학 등의 관직에 오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서 해평(海平)으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세계(世系)가 불분명해 후손인 길시우를 1세조로 하게 됐다.
◆여덟 살 때 어머니 그리는 시 지어 놀라게 해
어린 길재는 외모가 똑똑해 보이고 잘생겼으며 그에 걸맞게 총명한 두뇌를 지녔다. 글 배우기와 공부를 좋아하고 습득 속도가 빨랐으며 천성도 착해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임지인 개경에 가 있어 외로움을 많이 탔다. 길재가 여덟 살 때 아버지 원진이 보성대판에 임명돼 전남 보성으로 가게 되자 어머니마저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시골 관아의 벼슬자리라 녹이 변변치 않아 여러 식구를 부양할 처지가 아니었으며 길재는 집안 어른들 손에 맡겼다. 홀로 남게 된 길재는 늘 부모를 그리워했고 특히 어머니가 보고 싶어 몸부림치기도 했다. 낮에는 들판이나 시냇가에 앉아 눈물짓거나 푸른 하늘에 떠도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은 남계천(南溪川) 가를 서성이다가 자라처럼 생긴 돌을 주워 만지작거리며 울먹이다 시를 지었다.
자라야 자라야(鰲兮 鰲兮)
너도 어머니를 잃었느냐.(汝亦失母乎)
나도 어머니를 잃었다.(吾亦失母乎)
내가 너를 삶아 먹을 줄은 알지만(吾知烹其汝食)
네가 어미 잃은 것이 내 처지와 같은지라.(汝之失母猶我也)
너를 놓아주노라.(是以放汝)
그리고는 돌자라를 강물 속으로 던져준 후 서럽게 울었다. 이를 지켜본 이웃집 노파가 길재의 집안 어른들에게 알려 주었고 이야기는 마을 전체로 퍼져 화제가 됐다. 마을 사람들 모두 눈시울을 적시는 한편으로 길재의 영민함에 이구동성으로 감탄했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저처럼 영특하다니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라는 평가였다. 얼마 후 아버지가 다시 개경으로 발령받았고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길재의 17대손인 길화수(76) 씨는 "야은 할아버지가 불과 여덟 살 어린 나이에 그런 시를 지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행장의 기록으로 전해지며 매우 총명하셨다 하니 충분히 가능했겠다는 생각도 든다"라고 했다.
길재는 열한 살 때 본격적으로 글공부를 시작했다. 도리사(구미시 해평면)로 가서 글자를 배우고 문장도 차츰 익히게 되었다. 열여섯 살 때에는 학문에 정진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뜻을 담은 '술지'(述志)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시냇가 띠풀집에 홀로 한가히 살매(臨溪茅屋獨閑居)
달 밝고 바람 맑아 흥겹구나(月白風淸興有餘)
손님이라곤 오는 이 없고 산새들만 지저귀는데(外客不來山鳥語)
대숲 아래 상 옮겨놓고 누워서 글을 읽네(移床竹塢臥看書)
◆박대하던 새어머니도 공경심으로 감복시켜
이 무렵 길재의 아버지 원진은 개경에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검교군기감 노영의 딸과 다시 혼인을 해 고향 집으로 소식도 잘 보내지 않았다. 이에 길재의 어머니 김씨는 남편을 원망하게 되었고 집안은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였다. 이를 지켜보던 길재는 어머니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아내가 남편에게 있어서나, 자식이 어버이에게 있어서 비록 의롭지 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비난하는 마음을 지니면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륜이 변하는 것은 옛 성인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만, 올바름으로 대처해서 천정(天定)을 기다릴 따름이었습니다. 제가 어머님의 어여삐 여기심에 힘입어 이만큼 성장했는데 지금 어머님께서 그러한 원망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저를 어여삐 여기지 않으시는 결과가 됩니다." 어머니는 그의 의젓한 말을 듣고 느낀 바가 있어 그 후부터는 남편을 원망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들이 새장가를 들고 생모를 소홀히 대하는 아버지를 두둔하는 것은 좀 이례적이다. 어머니 역성을 들어 같이 아버지를 비난할 수도 있었지만, 길재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생모에게 부부로서 의롭지 못한 일을 했더라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었으니 마음을 다스리라고 위로하며 타일렀다. 아직 10대를 벗어나지 못한 나이였지만 그로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 자식으로서 효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담아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길재의 말에 대해 역정을 내지 않고 받아들인 것도 자식의 그러한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일 것이다.
길재는 열여덟 살이 되자 상산(商山'지금의 상주) 사록 박분을 찾아가 논어'맹자 등 경서를 배웠고 처음으로 성리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해 길재는 아버지를 찾아뵙고자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고 때마침 개경으로 올라가는 스승 박분을 따라 고향 집을 떠났다. 홀로 가난하게 지내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지만, 큰물에서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장차 관직으로 나아가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특히 떠나면서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를 찾아 뵈어야 한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는 점에서 그의 효성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된 길재는 아버지를 성심으로 받들면서 새어머니 노씨에게도 한결같이 공경심을 갖고 대했다. 새어머니는 길재를 처음에는 백안시하고 거칠게 대했지만, 길재가 변함없이 자신을 섬기자 마침내 감복해 자기가 낳은 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길재는 당대의 명유들인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양촌 권근 등을 차례로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더 크고 넓은 학문의 세계를 접하면서 길재의 학구열도 불타올랐고 그의 학문이 깊어지는 계기가 됐다. 개경에 올라온 지 5년 만인 스물두 살 때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되고 31살 때 사마감시에 급제했다. 이해에 그의 아버지는 금주지사로 재직 중이어서 지금의 충남 금산에 가 있었다. 길재는 아버지 임지에 찾아가 지내던 중 중랑장 신면의 딸과 혼인하게 됐다. 처가인 신씨 집안은 부자여서 재산이 넉넉했다. 길재는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자랐고 그 자신도 청빈한 생활을 추구해 처가 도움은 받지 않으려 했다. 길재의 처 신씨 역시 막내딸로 귀하게 자랐음에도 그런 티를 내지 않고 남편을 받들면서 남편 뜻을 좇으려 했다. 바로 이듬해 길재의 아버지가 임지에서 별세했다. 길재는 예법에 따라 장사 지내고 삼년상을 치렀다. 신씨 부인도 남편을 따라 법을 지켰다.
사진 한태덕 사진 전문 프리랜서
도움말:길화수 (사)금오서원보존회 부이사장(야은 길재 17대 종가손)
이택용 경북정체성포럼 선비분과위원(고전문학 연구가)
김석배 금오공대 교양교직과정부 교수
박인호 금오공대 교양교직과정부 교수
참고자료:야은 길재의 학문과 사상(금오공대 선주문화연구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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