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훈민정음 창제의 참뜻

입력 2015-10-12 01:00:04

한글이 만들어진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한글이 우리말을 잘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서문 외에도 훈민정음 해례본에 있는 '정인지 서(序)'를 보면 그 생각은 어느 정도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정인지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세상은 풍토가 다르기 때문에 말소리 또한 따라 다르게 된다. 대개 외국의 말은 그 소리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으므로, 중국의 글자를 빌려서 일상생활에 쓰고 있다. 이것은 마치 둥근 자루를 모난 구멍에 끼운 것 같이 어긋남이 있는데, 어찌 막힘이 없겠는가. 요컨대 글자는 각 나라의 실정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이지,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글은 우리말만을 잘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글자는 아니다. 훈민정음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우리 말소리를 표기할 수 있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말에는 없는 소리까지 표기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난 뒤 처음 편찬한 책인 동국정운(東國正韻)은 훈민정음으로 중국의 말소리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정인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비로소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지으셨다. 이 글자는 상형해서 만들되 글자 모양은 중국의 고전(古篆: 옛 중국에서 한자를 표기하는 데 쓰인 서체의 하나)을 본떴고, 소리의 원리는 칠조(七調)에 맞고, 삼극(三極)과 이기(二氣)가 모두 포괄되어 있어서 28자를 가지고도 전환이 무궁하며, 간략하면서도 정교하게 이루어져 있다.…(중략)…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 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세종대왕께서 만드셨던 처음의 문자 체계는 세상의 모든 언어뿐만 아니라 모든 소리들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를 보면 훈민정음을 만든 본뜻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문자로 표현하기 위한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문자를 남겨둔다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라질 것들은 사라지고, 현재와 같은 문자 체계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사라진 글자들을 재구성해 보면 훈민정음이 외국의 소리를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ㅸ'(순경음 비읍)이다. 'ㅸ'은 안울림소리 'ㅂ'이 울림소리화한 것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하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pabo]로 표기를 한다. 첫소리의 'ㅂ'과 울림소리인 모음 사이에 들어가 소리가 약해져 울림소리가 된 'ㅂ'을 다른 소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두 소리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의미를 구분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안 쓰이지만, 'ㅸ'은 오늘날 외국의 'b' 발음을 정확하게 적을 수 있다. 'ㅿ'(반치음) 역시 비슷한 원리로 'ㅅ'이 울림소리화해서 외국어의 [z] 발음 비슷하게 된 것이다.(경상도에서 아직도 '마실 간다'고 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ㅿ'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로마자로 표기하면 'Seri Pak'[씨뤼팩(박세리)], 'Chanho Park'[챈호우팔크(박찬호)]처럼 이상한 소리로 기록되지만 외국 말을 한글로 쓰면 원래 말에 가깝게 쓸 수 있다.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체계를 이용하면 좀 더 원음에 가깝게 쓸 수 있다. 한글이 또 하나의 한류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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